손끝에 닿은 입학 통관증은 서늘하고 무거웠다. 제국의 문장이 조각된 쇳조각이 마치 얼어붙은 낙인처럼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뒤편에서 밀려오는 마법 화염의 열기가 뒤통수를 따갑게 그을렸다. 은발을 휘날리며 연무장의 붉은 결계를 찢고 다가온 제1황녀, 엘리시아 폰 로젠가르트. 그녀의 매서운 시선이 그의 등에 꽂히는 순간, 서우는 심장이 갈비뼈 아래로 툭 떨어지는 듯한 추락감을 느꼈다.
들켰나. 마나가 전혀 없는, 한낱 이세계의 고등학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인가.
식은땀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뇌 신경의 임계점을 알리는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방금 전 결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강행했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연산식들이 머릿속에서 모래알처럼 바스러지며 단기 기억의 공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비린 혈향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절벽 끝에서, 서우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차가운 비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이 굶주린 이계의 맹수들은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터였다.
스스스스.
그러나 들려온 것은 파멸의 선고가 아니었다. 둔탁하게 바닥을 긁는 가죽 장화의 마찰음, 그리고 무거운 비단 예복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였다.
황녀 엘리시아가, 그의 등 뒤에서 일방적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경이로운 권능이군."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만방자하기로 이 아카데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황녀의 목소리에 서린 것은, 적의가 아니라 종교적인 경외감에 가까운 전율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지배하는 자들은 보았으나, 세계의 기하(幾何) 자체를 비틀어 물리 법칙의 인과를 재작성하는 존재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예언서에 기록된 태초의 왕족…… 아니, 마나마저 부정하는 절대적인 지배자여."
서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인 엘리시아의 정수리에 닿았다. 노을빛을 받아 주홍색으로 물들어가는 은발 사이로,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황녀의 머릿속에 어떤 거대한 착각의 탑이 쌓이고 있는지 서우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그녀가 자신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태초의 마왕' 혹은 그에 준하는 초월적 존재로 규정했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가문, 로젠가르트는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이자 불꽃이다."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어 서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기이한 열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 안의 늙은 외척 세력들은 황실의 피를 비천하게 여기며 나를 꼭두각시로 만들려 하지. 세이 님. 당신이 지닌 그 '무마나의 왜곡'이야말로 이 썩어빠진 인과를 청소할 유일한 힘이다. 내 그대의 가장 충직한 사냥개가 되어 제국의 더러운 찌꺼기들을 숙청하리니."
그녀가 오른손을 가슴에 얹었다. 마법적인 붉은 불꽃이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며, 허공에 기괴한 나선형의 문양을 그려나갔다. 피의 거래를 맹약하는 영혼의 낙인이었다. 황녀의 직속 기사단조차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숨을 죽인 채,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서우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서우는 한쪽 뺨을 일그러뜨리며 소리 없는 조소를 흘렸다.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과부하 때문에 시야가 흐릿하게 번져갔다. 하지만 그가 침묵을 지키며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입술을 굳게 다물수록, 황녀와 기사들의 눈에는 그것이 미천한 인간들의 권력 암투를 하찮게 여겨 비웃는 '마왕의 여유'로 비칠 뿐이었다.
"방종하군."
가까스로 짜내어 흘려보낸 목소리는 차갑고 나직하게 연무장의 공기를 가라앉혔다.
"내가 왜 너희의 미천한 분쟁에 손을 더럽혀야 하지?"
엘리시아의 신형이 굳어졌다. 그녀는 서우의 목소리에 담긴 압도적인 거절의 무게에 짓눌려 침을 삼켰다.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기에 더욱 기괴한, 우주의 공허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공포가 그녀의 척추를 관통했다.
"그, 그것은……."
"너의 하찮은 불꽃이 내 주위의 공간을 밝힐 수 있을지, 먼저 증명해 보여라."
서우는 소매 안에서 감각이 무뎌져 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극도로 절제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너의 기하적 무용을 내게 입증하라. 그 가치가 증명되지 않는다면, 네가 바친 맹약은 그저 한 줌의 재로 바스러질 뿐이다."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통제된 어조. 서우는 고등학교 시절 경시대회에서 복잡한 증명 문제를 마주했을 때의 냉정함을 필사적으로 끌어올렸다. 황녀에게 구체적인 요구를 하기보다는, 추상적이고 거대한 과제를 던져 그녀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편이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에 안전했다.
엘리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과연, 제안을 거두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 은혜로우신 처사. 제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은빛 펜던트를 풀었다.
"이것은 로젠가르트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비보이자, 고대 공간 마법의 편린이 깃든 '비유클리드 비틀림 무늬 펜던트'입니다. 공간의 곡률을 미세하게 조정하여 소유자의 인과를 보호하는 물건이지요. 감히 그대의 위대한 연산에 작은 촉매가 되기를 바라며 바치나이다."
펜던트가 서우의 시선 끝에서 흔들렸다. 은색 금속으로 정교하게 짜인 기하학적 나선 무늬. 놀랍게도 그것은 현대 수학에서 다루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위상적 꼬임' 형상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서우의 천재적인 수학적 직관이 강하게 요동쳤다. 이 물건이라면, 자신의 뇌에 걸리는 연산 과부하를 줄여줄 훌륭한 계산 보조 장치(하드웨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차가운 손을 뻗어 황녀의 손바닥 위에 놓인 펜던트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손가락 끝이 스칠 때, 엘리시아는 몸을 크게 떨었으나 반항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에는 자신을 지배해 달라는 듯한 기묘한 굴복의 쾌감이 스쳐 지나갔다.
황녀의 직속 기사들이 그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국의 고귀한 불꽃이라 불리던 황녀가, 단 한 번의 마나도 쓰지 않은 천재 소년의 침묵 앞에 무릎을 꿇고 가문의 보물까지 진상했다. 이 사실이 아카데미 상층부나 외신에 알려진다면 제국 전체가 뒤흔들릴 대사건이었다.
"오늘 연무장에서 일어난 일은……."
기사단장이 검을 거두며 황녀를 향해, 그리고 서우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황실의 이름으로 기밀에 부치겠습니다. 학내의 사설 감시망이나 베르톨트 경의 사법부 부대에도 일절 보고하지 않을 것을 약조하지요."
서우는 대답 대신 가볍게 턱을 까딱였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무장의 출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오만한 대마법사의 걸음걸이를 유지했다.
스윽.
그가 걸어 나간 자리, 연무장의 차가운 룬석 바닥 위로 붉은 핏방울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서우가 참다못해 흘린 과부하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 핏방울이 닿은 룬석은 평범하게 피를 흡수하는 대신, 서우의 무마나 세포 성분과 반응하며 불길할 정도로 짙은 자색으로 변색되기 시작했다. 룬석의 마나 회로가 수학적 인과에 오염되어 비틀리는 기괴한 현상이었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이 광경을 관찰하던 누군가의 시선만이 그 붉은 변색을 조용히 눈에 담았을 뿐이다.
***
낙엽이 성에 가득 내려앉은 늦가을의 밤, 아카데미 외곽의 허름한 귀빈용 별채는 고요했다.
탁.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서우는 문을 걸어 잠그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참아왔던 격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쿨럭! 헉, 흑……!"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마치 뇌 속에 뜨겁게 달군 쇠창살을 밀어 넣고 휘젓는 듯한 극통이었다.
"미치겠네…… 진짜로 죽는 줄 알았잖아."
서우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평범한 고등학생인 그가 감당하기에 이 이세계의 삶은 일분일초가 사선(死線)의 연속이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베르톨트 같은 편집증적인 감시관들이 목을 베려 들 것이고, 힘의 본질이 마나가 아닌 고작 '수학 수식'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해부대 위에 올려질 터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황녀에게 받아온 '비유클리드 비틀림 무늬 펜던트'를 꺼냈다. 달빛을 받은 은빛 무늬가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빛나고 있었다.
"이게 공간의 곡률을 조정한다고……?"
손가락으로 펜던트의 꼬인 표면을 쓸어내렸다. 놀랍게도 펜던트를 만지는 동안, 머릿속을 헤집던 바늘 같은 두통이 아주 미세하게 완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과열된 컴퓨터에 보조 냉각 장치를 장착한 것처럼, 주위의 3차원 공간 좌표들이 한결 부드럽게 뇌리에 매핑되는 기분이었다.
"……해볼 수 있겠어."
서우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궁극의 연산식, '종언의 방정식'. 이 아카데미 심층부에 숨겨진 고대 제단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이 사기극을 완벽하게 성공시켜야만 했다. 황녀라는 거대한 방패를 얻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사방에서 조여오는 감시망을 역이용해 생존의 터전을 굳히는 것뿐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차가운 별빛이 아카데미의 고풍스러운 첨탑들을 스산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때였다.
서우의 등줄기에 소름 끼치는 한기가 돋았다. 마나가 전혀 없는 그였지만, 공간의 위상 변화를 감지하는 기하학적 직관은 그 어떤 대마법사보다도 예민했다.
별채 주변의 대기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압착되고 있었다. 소리도, 바람도, 심지어 달빛조차도 정원의 특정 경계선을 넘지 못하고 굴절되는 기괴한 왜곡 현상.
"……기하학적 고립 영역?"
서우가 낮게 읊조렸다.
그것은 단순한 침입자의 인기척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의 사법 치안을 담당하는 고위 조율사들이 전개하는 최상급 '수마력 감지 차단 역장 결계(Anti-Mana Detection Field)'였다. 마나를 감지하는 모든 레이더를 먹통으로 만들고, 내부의 비명을 외부로 단 1데시벨도 유출하지 않는 완벽한 암살과 격리의 결계.
서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다. 어둠으로 가득 찬 마당의 나무 그늘 사이로, 검은 예복을 입은 형체들이 소리 없이 별채를 포위하며 다가오는 모습이 벽의 그림자를 통해 계산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태초의 마왕이라 불리는 소년의 숨통을, 이 고요한 밤에 은밀히 끊어버리는 것.
창문 너머로 좁혀져 오는 살기의 그물이 실시간으로 서우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