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손바닥에 닿는 명나라 요동 도사(都司)의 철제 패는 무겁고 차가웠다.

이연의 손가락 끝이 붉은색 비단 끈의 헤진 단면을 천천히 쓸었다. 밤공기는 영변 계곡의 얼음물보다도 시렸고, 가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황의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전하, 이 자들의 음모가 이미 야철지 깊숙이 침투해 있었사옵니다. 소신이 가마를 더 철저히 단속하지 못하여 이런 변을..."

박진국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자책했다. 그의 두 손은 여전히 석탄재와 진흙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국방과학연구소 시절 겪었던 수많은 보안 사고와 정밀 장비 사보타주의 사례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단순한 파괴 공작이 아니었다. 배수 통로를 막아 가마를 터뜨린 것은 시선 끌기용 덫에 불과했다. 진짜 목적은 따로 있을 터였다. 저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조선의 무기 자체가 아니라, 그 무기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찍어내는 ‘표준화된 공정’ 그 자체였으니까.

"박진국."

"예, 전하. 하교하시옵소서."

"지금 즉시 군기시 별제들의 정밀 도구함을 모두 압수하고, 야철지의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라. 쇠를 깎고 구멍을 뚫는 도구를 다루는 자는 단 한 명도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라."

"전하, 도구함 말씀이옵니까?"

박진국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가마가 터졌는데 무기를 만드는 도구부터 압수하라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었다. 하지만 이연의 눈빛에 서린 극단적인 통제욕과 확신을 본 순간, 박진국은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소신, 즉시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수 분 뒤, 야철지 중앙의 넓은 가설 가마터로 횃불이 붉게 타올랐다. 금군들이 서슬 퍼런 창날을 세우고 장인들과 납품 상인들을 포위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횃불의 불꽃이 춤을 출 때마다, 모여든 백여 명의 장인들 얼굴에 공포 서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연은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눈앞에 쌓인 수십 개의 정밀 목각 도구함들을 내려다보았다.

"군기시 별제 박진국은 들으라."

"예, 전하."

"내가 지난여름, 너희 장인들의 문맹을 염려하여 철산과 영변에 직접 배포한 것이 무엇이더냐?"

이연의 나직한 목소리가 가마터의 정적을 깨뜨렸다. 박진국은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마모된 나무 조각 하나를 꺼내 올렸다.

"전하께서 친히 하사하신 '눈금 전 조각'이옵니다. 정확히 1치 2푼의 규격을 새겨, 글을 모르는 야공이라 할지라도 이 나무 조각의 길이에 맞추어 조총의 약실과 총열의 두께를 깎도록 하신 법도이옵니다."

그것은 이연이 현대의 리버스 엔지니어링 개념을 이 조선 땅에 이식하기 위해 고안한 마스터 게이지(Master Gauge)였다. 자의 재질이나 척도가 지역마다 달라 생기는 오차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단단한 대추나무를 깎아 구리 테두리를 두른 1치 2푼짜리 표준 규격 도구였다.

이연은 금군 대장에게 턱짓을 했다.

"도구함들을 전부 열어라. 그리고 장인들이 조총 신의 홈을 깎고 총열을 검사할 때 쓰는 '가죽 자'를 모두 거두어 대조하라."

금군들이 거칠게 상자들을 뒤웅박쳤다. 장인들 사이에서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중 유독 눈동자를 굴리며 뒤로 물러서려는 사내 하나가 이연의 예리한 시선에 걸려들었다.

영변의 군수물자 조달을 담당하던 관허 상인, 마건필이었다. 그는 명나라 요동과 조선을 오가며 가죽과 유지(油脂)를 납품하던 자로, 명나라 사신단의 통사(通事) 심유경의 세력과도 끈이 닿아 있다는 첩보가 진즉에 들어와 있던 인물이었다.

"찾았사옵니다!"

금군이 도구함 깊숙한 곳에서 염색된 소가죽으로 만든 부드러운 가죽 자 수십 개를 찾아내 바닥에 정렬했다.

이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박진국이 들고 있던 대추나무 '눈금 전 조각'을 건네받아, 마건필의 상단에서 납품한 가죽 자 위에 대어 보았다.

"진국아. 이 자리에 있는 장인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어라. 무엇이 다른지."

박진국이 무릎을 꿇고 눈을 부릅뜬 채 대조 작업을 시작했다. 이내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럴 수가... 전하! 자의 눈금이 미세하게 늘어나 있사옵니다!"

가마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박진국이 가죽 자를 들어 올리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눈금 전 조각의 1치 2푼보다, 이 가죽 자의 1치 2푼이 정확히 반 푼(약 1.5mm)이 더 기옵니다! 가죽 자의 눈금이 이리 늘어나 있으면, 장인들이 조총의 약실을 깎을 때 철판의 두께를 지시보다 반 푼 더 얇게 깎게 되옵니다!"

이연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반 푼의 오차.

현대 공학의 관점에서 보면 고작 1.5밀리미터의 미세한 차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흑색화약의 폭발 압력을 견뎌내야 하는 연철 조총의 약실에서 1.5밀리미터의 두께 감소는 치명적이다. 격발하는 순간 가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총열이 그대로 파열되어 사수의 얼굴을 날려버리는 무서운 부메랑이 된다.

"조선 장인들이 만든 조총은 쏘는 족족 폭발하여 제 군사를 죽이는 잡철 덩어리다... 저들은 이 소문을 퍼뜨리고 싶었던 게지."

이연의 시선이 마건필에게 꽂혔다.

"마건필. 네 상단에서 납품한 가죽 자들이 어찌하여 이리 늘어나 있는가? 겨울철 메마른 날씨에 가죽은 수축하는 법이거늘, 어찌 도리어 늘어났단 말이냐."

마건필은 바닥에 넙죽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전, 전하!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가죽이란 본디 수분에 약해 보관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변형이 생긴 것일 뿐, 소인은 결단코 딴 마음을 품은 적이 없사옵니다! 대국의 상인들과 교역하며 오직 전하의 은덕만을 바란 충신이옵니다!"

"충신이라."

이연은 마건필의 눈앞에 가죽 자 하나를 툭 던졌다.

"수분에 약해 변형이 생겼다라. 허면 이 가죽 자에서 풍기는 은은한 지독한 기름 냄새는 무엇이냐? 가죽을 늘여 뜨린 뒤, 다시 수축하지 못하도록 아교와 석유(석탄 타르)를 섞어 고정하는 기법은 조선에는 없는 기술이다. 요동의 장인들이 가죽 마구를 만들 때 쓰는 공법이지."

마건필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흙바닥을 적셨다.

"아직도 하늘을 기망하려 드는구나."

이연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계처럼 정교하고 차가웠기에 사방을 압도하는 공포가 더 컸다.

"끌어내 형틀에 묶어라. 저 자의 입에서 요동 도사의 이름이 나올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전하! 살려주십시오! 전하!"

금군들이 사정없이 마건필의 멱살을 잡아채 형틀로 끌고 갔다. 가마터 한가운데에 급히 설치된 형틀에 그의 양다리가 묶이고, 두꺼운 주리 나무가 허벅지 사이에 끼워졌다.

"틀어라."

금군들의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주리 나무가 엇갈리며 비틀렸다.

"아아아아악!"

뼈가 어긋나고 근육이 찢어지는 비명이 밤하늘을 찢었다. 피가 가죽 바지를 적시며 붉게 배어 나왔다. 마건필은 단 몇 차례의 가혹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거품을 물었다.

"고, 고하겠사옵니다! 고하겠사옵니다! 주, 죽여만 주지 마옵소서!"

주리 나무가 느슨해지자, 마건필은 피 섞인 침을 뱉으며 헐떡였다.

"심... 심유경 대인의 수하가... 요동에서 온 세작이 소인에게 은자 오백 냥을 주며 이 자들을 바꾸어 치기 하라 지시하였사옵니다. 가마의 물길을 막은 것도... 그 자들이 고용한 요동의 자객들이옵니다! 제발 목숨만은..."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심유경이었다.

이연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명나라 요동군과 심유경의 탐욕이 조선의 무기 국산화를 막기 위해 이토록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도량형의 미세한 오차를 이용해 조선의 신형 무기 체계 자체를 쓰레기로 만들려 했던 고도의 사보타주였다.

주변의 장인들은 자신들이 하마터면 불량 조총을 만들어 반역죄로 몰사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를 쳤다. 동시에 왕이 배포한 고작 1치 2푼짜리 '눈금 전 조각' 하나가 자신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경외심에 압도되었다.

"전하, 이 나라를 해하려 한 명나라의 세작과 이 배신자를 당장 참형에 처하셔야 하옵니다!"

박진국이 이빨을 갈며 외쳤다. 수많은 야공들도 동조하듯 웅성거렸다.

그러나 이연은 손을 들어 그들의 외침을 제지했다.

"참형이라.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연의 머릿속 톱니바퀴가 빠르게 돌아갔다. 명나라 세작의 목을 베어 국경에 걸어두는 것은 일시적인 분풀이는 될지언정, 실리는 전무했다. 오히려 명나라 조정에 조선이 명의 신민을 멋대로 죽였다는 외교적 빌미를 제공하고, 요동군의 대규모 압박을 자초할 뿐이었다.

힘이 부족할 때는 명분을 쥐고 상대를 옭아매야 한다.

"마건필의 상단 가택을 수색하여, 그들이 요동군 장수들에게 바쳤던 뇌물 장부와 밀매 서신을 모두 확보하라."

"전하, 그것으로 무엇을 하시려옵니까?"

이연은 마건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참형 대신, 이 자의 손가락 세 개를 자른 뒤 요동 도사로 돌려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 편에 마건필이 작성한 요동 장수들의 뇌물 수수 장부 사본을 동봉하라."

이연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조선에 숨어든 세작을 처형하는 대신, 요동의 장수들이 대명제국의 군율을 어기고 조선의 밀매 상인에게 은자를 받아 챙긴 사실을 북경의 황제 폐하와 감찰 어사들에게 고발하겠다고 전하라. 만약 이 일이 조용히 묻히기를 바란다면, 앞으로 철산과 영변 일대의 사철 교역과 국경 통제에 대해 요동군은 묵인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양보가 아니었다. 명나라 요동군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완벽한 외교적 역공이었다.

자신들의 부정부패가 탄로 나 목이 달아날 위기에 처한 요동의 장수들은, 조선의 무기 제조를 감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조선의 국경 밀무역과 군수 기지를 철저하게 비밀로 지켜줄 수밖에 없으리라.

"네 놈의 목숨은 대명제국 요동군의 부패한 탐관오리들이 살려주는 줄 알거라."

이연의 선언에 마건필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흙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전하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망극하옵니다!"

현대의 정밀 도량형 제도가 가져다준 완벽한 승리였다. 장인들은 기적과도 같은 왕의 지혜에 감탄하며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마침내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승리했다."

이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 사보타주를 역이용해 요동군의 눈까지 가렸으니, 이제 철산의 양산 공정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가속화될 터였다.

그러나 이연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병적인 불신과 통제 집착증은 여전히 경보를 울려대고 있었다. 영변을 장악했다고 해서 모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진짜 뱀의 대가리는 한양 조정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순간, 가마터 바깥에서 거친 말 발굽 소리가 고요한 밤의 공기를 찢었다.

"파발이옵니다! 한양에서 온 긴급 파발이옵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전령이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 이연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의 품에서 꺼내진 서찰은 붉은 밀랍으로 엄중히 봉인되어 있었다.

이연은 서찰을 받아 밀랍을 뜯었다. 서찰을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빙결되었다.

서찰은 승정원의 심복이 밀파한 극비 통문이었다.

[서인 송익필의 가신들이 대간들을 사주하여 안팎으로 군기시의 공정을 탄핵하였나이다. 우의정 류성룡 대감이 영변에서 사적으로 사금(砂金)을 채굴하고 숯을 군기세 국고에서 누락시켜 사리사욕을 채우고 사병을 육성하려 했다는 반역의 혐의를 뒤집어썼사옵니다. 류 대감은 이미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며, 조정의 간관들은 조종조의 법도를 어긴 죄를 물어 즉시 사약을 내릴 것을 합창하고 있나이다. 전하, 조속히 환궁하셔야 하옵니다!]

이연의 손귀에서 서찰이 구겨졌다.

송익필. 결국 이조전랑의 공백을 틈타 류성룡의 목을 치고, 자신들의 명분론으로 왕의 손발을 묶으려 배수진을 친 것이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의 자구 하나하나를 비틀어 왕권을 제약하려는 사대부들의 음험한 미소가 이연의 뇌리를 스쳤다.

만약 여기서 류성룡이 무너지면, 철산과 영변의 군수 기지는 물론 조선을 화포 제국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모든 계획이 공중분해 될 터였다.

이연은 구겨진 서찰을 타오르는 횃불 속에 던져 넣었다. 불꽃이 서찰을 집어삼키며 붉은 재로 변해갔다.

"진국아."

"예, 전하."

"철산의 모든 공정을 표준 규격대로 차질 없이 진행하라. 내 한양의 사대부 놈들에게 진정한 '법의 칼날'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올 터이니."

이연의 눈빛에 어려 있던 통제의 광기가 마침내 한양을 향해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경국대전》의 수많은 독소 조항 중, 오히려 사대부들의 가문을 통째로 멸문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법리적 맹점을 복기하고 있었다.

***

**《선조실록(宣祖實록)》 임오(壬午)년 겨울 기록 요약**

왕께서 철산의 야공들에게 친히 하사하신 '눈금 전 조각'의 척도를 대조하시어, 간교한 무리들이 가죽 자의 치수를 늘여 조총의 폭발을 획책한 사보타주를 적발해 내시니 백성들이 왕의 신묘한 명찰(明察)에 엎드려 울었도다.

또한, 이에 연루된 명나라의 세작들을 함부로 베지 아니하시고 대국의 법도와 비리 장부로 요동의 장수들을 엄히 꾸짖어 외교적 굴종 없이 국경의 안위를 지키시니, 이 어찌 하늘이 내린 성군이 아니시리오.

그러나 동년 동월, 한양 조정에서는 서인 송익필 일파가 우의정 류성룡이 영변의 사금과 탄세를 횡령하였다는 혐의로 탄핵 정국을 일으켜 류성룡을 의금부에 가두니, 나라의 보이지 않는 전선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