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전랑(吏曹銓郞)의 임명권을 조정하지 않으시면, 백관들은 더는 출사할 명분을 찾지 못할 것이옵니다. 우의정 송익필 대감과 서인의 간관들이 대궐 문 밖에 엎드려 상소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부디 붕당의 치우침을 거두시고 조종조의 전례를 따르소서!"
도승지 유희서의 목소리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편전 바닥을 긁었다. 그의 이마는 차가운 전돌에 닿아 있었고, 등 가죽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선조 이연은 붓을 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백지에 먹물이 스며들어 정교한 철산 야철로의 송풍구 도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도면의 미세한 수치에 고정되어 있었으나, 머릿속은 이미 도성 바깥의 거대한 정치적 지형도를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사림의 영수 송익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서인 세력.
'근검령'이라는 도덕적 명분으로 가문들이 비축해 둔 유황과 초석의 줄줄이를 압수당하자, 저들은 즉시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이 바로 이조전랑의 인사권 볼모였다. 삼사의 간관들을 추천하고 조정의 중하급 관리들의 목줄을 쥔 이 자리를 자신들의 수하로 채우지 못한다면, 아예 조정의 모든 결재를 거부하여 국정을 마비시키겠다는 협박.
조선이라는 나라는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가득 찬 사대부들의 거대한 협동조합과 같았다. 왕이 아무리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흔들려 해도, 행정을 집행할 백관들이 출근을 거부하고 상소를 올리며 버티면 왕은 고립된 섬이 되고 만다.
"전하, 도성 내의 육조 관아들이 텅 비었사옵니다. 의금부조차 죄인을 심문하지 못하고, 호조의 세곡 운반 결재가 멈추어 한강나루에 세곡선들이 하염없이 대기하는 실정이옵니다. 부디 사직을 굽어살피소서!"
유희서가 울부짖듯 고개를 조아렸다.
선조는 천천히 붓을 내려놓았다. 먹물이 묻은 손가락 끝을 살피는 그의 눈동자에는 노여움이 아닌, 지독할 정도의 냉소와 통제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생의 한민우로서 역사책에서 보았던 선조는 신하들의 붕당 갈등에 휘둘리다 임진왜란이라는 참화를 자초한 유약한 군주였다. 하지만 지금 이 몸에 깃든 영혼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수십억 원짜리 예산안과 방산 비리, 군 수뇌부의 이권 다툼을 뼈저리게 겪어낸 무기 공학자였다.
정치란 결국 자원의 배분이며, 명분이란 그 자원을 독점하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조정이 멈추었다라……."
선조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편전 안의 공기를 얼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송 대감이 내민 사직서가 몇 장이나 되더냐?"
"우의정을 비롯하여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 등 서인 간관 서른여덟 명의 사직서가 접수되었사옵니다. 동인들 또한 이 틈을 타 서인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며 조정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사옵니다."
"좋다. 이조판서와 좌의정을 들라 하라. 내 친히 이 사태를 매듭지을 것이니."
선조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갔다. 그것은 파국을 앞둔 군주의 얼굴이 아니었다. 먹잇감을 완벽한 함정으로 몰아넣은 사냥꾼의 미소였다.
***
다음 날 아침, 사정전의 분위기는 바늘 하나 떨어져도 그 소리가 온 전각에 울릴 만큼 팽팽했다.
좌의정 유전과 동인의 영수 격인 이조판서, 그리고 서인 측의 대변자로 나선 호조판서 등이 일렬로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서로를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었으나, 감히 임금의 안색을 살피지는 못했다.
"과인이 부덕하여 조정의 현신들이 사직을 청하니,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
선조가 수척해진 안색으로 탄식하듯 말했다. 철저히 계산된 연출이었다. 신하들의 명분론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원하는 교만함을 채워주어야 했다.
"전하! 서인들이 이조전랑의 천거권을 독점하려 국정을 마비시키는 것은 조종조의 법도를 무너뜨리는 불충이옵니다! 부디 저들의 사직을 수리하시고 엄히 문책하소서!"
동인 측 이조판서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망발인가! 이조전랑의 자리는 조정의 맑고 깨끗한 여론을 대변하는 자리거늘, 동인들이 이를 사유화하려 하니 우의정 대감께서 온몸으로 막아서신 것이오! 전하, 사직서를 거두어 주시고 서인의 인재를 전랑에 임명해 주옵소서!"
서인 측 호조판서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두 세력의 갈등은 이미 임계점에 달해 있었다. 서로가 이조전랑이라는 인사권의 대동맥을 움켜쥐기 위해 개처럼 물어뜯는 형국. 선조는 그들의 탐욕스러운 논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양측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소. 이조전랑의 권한이 너무도 막강하여, 붕당이 바뀔 때마다 이런 사단이 나니 과인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오."
선조가 천천히 상소문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하여, 과인이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하오. 이조전랑이 지닌 권한 중 가장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 하나를 떼어내어 조정의 마찰을 줄이는 것이 어떻겠소?"
사대부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송익필이 뒤에서 조종하는 서인 세력은 임금이 무슨 꾀를 내는지 간을 보기 시작했다.
"무슨 권한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이조전랑은 삼사의 간관뿐만 아니라, 백공(百工)과 야공(冶工), 그리고 군기시(軍器寺)의 기술직 잡직들의 임용권까지 쥐고 있지 않소? 사대부들의 고결한 학문과 정치를 논하는 전랑의 자리에서, 천하디천한 대장쟁이들과 쇠붙이를 만지는 잡인들의 인사까지 신경 쓰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 같소."
선조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어차피 군기시의 야공들이나 변방의 군수 관료들은 사대부들의 청요직(淸要職)과는 무관한 자들이 아니오? 그러니 이조전랑의 권한 중 '군기시 잡직 및 변방 야금 관료의 임용 및 추천권'을 왕 직속의 내탕금 관리 처소로 이관하도록 합시다. 그리하면 전랑의 이권이 줄어드니, 양당이 서로 싸울 명분도 덜해지지 않겠소?"
사정전 내에 일순간 침묵이 흐르고, 신하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사대부들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목숨을 거는 것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 언관직이다. 그것이 있어야 상대 붕당을 탄핵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군기시의 야공, 대장장이, 무기를 만드는 별제(別提) 따위의 자리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천직'으로 분류되어 거들떠보지도 않는 쓰레기 같은 보직이었다. 돈도 안 되고, 명예도 없으며, 오직 쇳가루와 화약 냄새만 가득한 사지(死地).
"전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동인 측 이조판서가 먼저 침을 삼켰다.
"군기시의 잡직 임용권 따위는 사대부의 예법과는 무관한 일이옵니다. 전하께서 친히 다스리시어 조정의 짐을 덜어주신다면, 저희 동인은 기꺼이 따르겠사옵니다."
서인 측 호조판서 역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임금이 겨우 대장장이들 임용권을 가져가는 것으로 타협을 보려 하는구나. 유황을 빼앗기더니 무기 만드는 일에 집착하는 모양인데, 그래 보았자 조정의 대권은 여전히 삼사를 쥔 우리에게 있다.'
그들은 송익필이 경고했던 임금의 독점욕을 과소평가했다. 16세기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공업'과 '기술'은 국가의 근간이 아니라, 그저 천민들이나 하는 잡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우의정 대감과 서인들도 이 타협안을 받아들인다면, 사직서를 거두고 즉시 조정을 정상화하겠다고 전하라."
선조가 못을 박듯 말했다.
신하들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방금 임금에게 건넨 것이 단순한 '대장장이 임용권'이 아니라, 조선 천지의 모든 철광석과 화약 무기 제조 라인을 왕이 독자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합법적 면허'라는 사실을 꿈에도 깨닫지 못했다. 사림의 명분론을 사림 스스로의 오만함으로 깨부순 순간이었다.
***
그날 밤, 군기시 깊숙한 밀실.
바깥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밀실 안에는 단 한 자루의 촛불만이 방 안을 어둡게 밝히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며칠 전 종6품 군기시 야철 별제로 파격 임명된 박진국이 엎드려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시커먼 숯가루와 철 가루로 뒤덮여 거칠었고, 신분 상승의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진국아."
선조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그의 앞에 섰다. 임금의 곤룡포 자락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예, 전하. 신 박진국, 대령하였사옵니다."
"네가 천민의 신분으로 군기시의 야공으로 썩어가던 시절을 기억하느냐."
박진국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찌 잊겠사옵니까. 양반들의 가마가 지나갈 때마다 진흙바닥에 대가리를 박아야 했고, 밤새 철을 두들겨 손가락이 굽어도 천것이라는 멸시 속에 매질을 당하기 일쑤였사옵니다."
"이제 너는 종6품의 조정 관원이다. 하지만 내 너에게 줄 직첩은 그저 허울 좋은 관직이 아니다."
선조가 품 속에서 붉은 비단에 싸인 교지와 함께, 손수 그린 정밀한 설계도 한 장을 꺼내 박진국의 앞에 내려놓았다. 설계도에는 수력 물레방아의 회전력을 이용해 거대한 풀무를 작동시키고, 용광로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수력 야철로'의 구조가 그려져 있었다. 현대식 고로(高爐)의 메커니즘을 16세기 조선의 기술 수준에 맞춰 역설계한 극비 도면이었다.
"이것은 평안도 철산과 영변에 세워질 비밀 야철지의 도면이다. 내 오늘부로 너를 '평안도 극비 외방 야철 총괄 사령관'으로 임명하노라."
박진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령관이라니. 무관의 수장에게나 붙는 칭호를 천민 출신인 자신에게 내리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전하, 이 소신은 글자 한 자도 모르는 무식한 천것이옵니다. 어찌 이리 과분한 직첩을 감당하겠사옵니까?"
"글을 모르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
선조가 박진국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임금의 손아귀 힘에 박진국의 몸이 굳었다. 선조의 눈 속에는 굶주린 야수와 같은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너는 쇳물이 식을 때 뿜어내는 불꽃의 빛깔만 보고도 탄소의 함량을 읽어내는 눈을 가졌다. 쇠가 식으며 내는 소리만으로도 연철과 강철을 구별해 내는 귀를 가졌다. 이 나라 조정의 사대부 삼천 명이 모여도 네 손가락 하나가 가진 기술을 따라가지 못한다!"
선조의 목소리가 밀실을 흔들었다.
"내가 믿는 것은 공맹의 도리를 읊조리는 사대부들의 주둥이가 아니다. 오직 네 손끝에서 나올 견고한 철강과 화포뿐이다. 내 너에게 조선의 모든 철광석과 장인들을 통제할 전권을 주마. 가겠느냐?"
박진국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평생을 천민으로 살며 받아온 설움, 기술을 가졌음에도 개처럼 부려지던 전생의 모든 한(恨)이 임금의 손길 한 번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자신을 도구가 아닌 한 명의 '인간'이자 '장인'으로 인정해 준 유일한 군주.
"전하……!"
박진국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전돌이 깨질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바닥의 먼지를 적셨다.
"이 미천한 놈의 목숨은 이미 전하의 것이옵니다! 평안도의 추위가 뼈를 깎고 명나라의 세작들이 목을 노릴지라도, 전하께서 주신 도면대로 세계 최고의 철포를 만들어 바치겠나이다! 만약 불량품이 나오거나 기한을 맞추지 못한다면, 소신이 먼저 용광로의 불꽃 속에 몸을 던져 쇳물이 되겠사옵니다!"
통곡에 가까운 맹세였다. 선조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완벽한 충성심을 확보했다. 통제 집착증을 가진 그에게 있어, 이보다 확실한 보증 수표는 없었다.
***
"하지만 큰 문제가 있사옵니다, 전하."
박진국이 눈물을 닦으며 도면을 가리켰다.
"평안도 철산이나 영변의 야공들은 대부분 글을 모르는 문맹이옵니다. 게다가 장인들마다 사용하는 자(尺)의 길이가 미세하게 다릅니다. 함경도 장인의 1치는 도성의 1치보다 길고, 전라도 장인의 1푼은 또 다릅니다. 이리되면 총열의 구경이 제각각이 되어, 화약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총열이 터지거나 탄환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옵니다."
표준화의 부재. 그것이 가내수공업에 머물러 있는 조선 공업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도면을 주어도 현장의 장인들이 제멋대로 해석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선조는 이미 그 해결책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는 품 안에서 단단한 대추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조각 하나를 꺼냈다. 조각의 표면에는 정교하게 홈이 파여 있었고, 쇠로 된 얇은 깃이 덧대어져 있었다.
"이것을 보아라."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이것은 '눈금 전 조각'이라 부르는 도구다."
선조가 나무 조각을 박진국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조각의 길이는 정확히 1치 2푼(약 3.6cm)이다. 엽전(葉錢) 다섯 닢을 나란히 포개어 놓은 두께와 정확히 일치하지. 글을 모르는 야공들에게 자를 읽으라 하지 마라. 오직 이 '눈금 전 조각'을 총열의 두께와 구경에 대어보게 하라."
박진국이 눈금 전 조각을 만져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이 조각의 홈에 딱 맞물려 들어가는 총열만을 합격으로 치면 되는 것이군요!"
"그렇다. 이 조각보다 얇으면 쇠가 터질 것이요, 이보다 두꺼우면 총이 무거워 쓸 수 없다. 철산의 공방에 이 눈금 전 조각을 수천 개 제작하여 배포하라. 그리고 야공들에게 명하라. 이 규격에 맞추지 못해 불량품을 내는 자는 경국대전의 장형(杖刑)에 처할 것이나, 하루에 세 개 이상의 규격 총열을 깎아내는 자는 신분을 불문하고 면천(免賤)하고 토지 삼 마지기를 하사할 것이다."
채찍과 당근, 그리고 완벽한 물리적 표준화 기구의 결합.
"이 눈금 전 조각은 군기시의 극비 사항이다. 만약 이 규격 도구를 외부로 유출하거나 가짜를 만들어 섞는 자가 있다면, 삼족을 멸할 것이니 그리 알라."
선조의 엄혹한 목소리에 박진국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소신이 목숨을 걸고 이 규격을 수호하겠나이다."
조선의 군사 혁명을 지탱할 가장 기초적인 '표준 도량형'이, 사대부들의 눈을 피해 어두운 밀실에서 그렇게 탄생하고 있었다.
***
한 달 뒤, 깊은 밤.
강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마포나루터의 어둠 속에서 세 명의 사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갓을 깊게 눌러쓰고 있었으며, 강가에 정박한 작은 나룻배 한 척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룻배의 사공이 세 번의 짧은 휘파람 소리를 내자, 뭍에 있던 사내들이 신속하게 배로 접근했다.
배의 멍석을 걷어내자, 그 안에는 짚단으로 꽁꽁 싸맨 길쭉한 물건 수십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짚단을 풀어내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는 쇠막대기가 나타났다.
그것은 평안도 영변의 수력 야철지에서 박진국과 그가 거느린 장인들이 밤낮으로 철을 두들겨 만들어낸 신형 조총의 총열 샘플이었다. 이음새가 전혀 없이 미끈하게 잘 빠진 총열의 표면에는, 균일한 두께를 증명하듯 1치 2푼의 정밀한 규격이 완벽하게 박혀 있었다.
"이것이 진정 천민들이 만든 철포의 신(身)이란 말인가……."
밀사 중 한 명이 떨리는 손으로 총열을 어루만졌다. 그 견고함과 정밀함은 명나라에서 수입해 오는 조총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나룻배 뒤편의 갈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밀사가 검자루를 쥐며 소리쳤으나,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림자는 그들의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
**《선조실록(宣祖實錄)》 임오(壬午)년 겨울 기록 요약**
왕이 이조전랑의 다툼을 엄히 꾸짖으시며, 사대부들이 천히 여기는 군기시(軍器寺)의 잡직 임용권을 친히 거두어 내탕고에 귀속시켰다. 신료들은 그 자리가 쇳가루 날리는 사지라 여겨 기꺼이 왕께 헌제하였으나, 이는 왕께서 군기시를 독자적으로 장악하시려는 깊은 책략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또한 평안도 야철지에 천민 박진국을 보내어 쇳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눈금 전 조각'이라는 법도(法度)를 내려 장인들이 글을 몰라도 규격을 어기지 못하게 하셨다. 이로써 나라의 무기 제조가 비로소 일정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으니, 장인들이 밤낮으로 철을 두들기는 소리가 평안도 산천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도성 안팎에는 의문의 밀탐들이 횡행하여 왕의 군수(軍需)를 엿보려 하니, 정국에 다시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