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군기시 앞마당을 채운 매캐한 질산염의 냄새가 콧등을 찔렀다.

부서진 조총의 놋쇠 파편을 움켜쥔 손바닥에서 끈적한 피가 흘러내려 흙바닥에 붉은 점을 찍었다. 선조, 아니 한민우는 제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통증보다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10년 뒤 이 강토를 피바다로 만들 전쟁의 공포였고, 그 공포보다 더 끔찍한 것은 지금 당장 제 목을 조여 오는 조정 사대부들의 위선이었다.

"송익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이름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류성룡은 임금의 안색을 살피며 숨을 죽였다. 서신을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림의 영수이자 우의정인 송익필이 보낸 탄핵 상소는 단순한 간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이 사사로이 화약을 소모하고 병기를 제조하여 조정의 예산을 낭비한다는, 사실상의 정치적 선전포고였다.

"전하, 대간들이 이미 지부상소(持斧上疏)의 형세를 취하고 도끼를 든 채 대궐 문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군기시의 화포 시험을 가리켜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사나운 무기를 만드는 패도(霸道)'라 규탄하고 있사옵니다. 이대로 조정을 비우시면 사태를 겉잡을 수 없게 되옵니다."

류성룡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진흙투성이가 된 가죽신을 신은 채, 선조는 부서진 총열 조각을 류성룡의 발치에 툭 던졌다. 쇳덩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파열음을 냈다.

"패도라."

선조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옥안에 떠오른 미소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저들이 말하는 왕도(王道)란 무엇이더냐, 류 참판?"

"전하, 사림이 말하는 왕도란 검소를 숭상하고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리며, 무력을 멀리하여 조종조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옵니다."

"검소라.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구나."

선조는 손바닥의 피를 용포 자락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붉은 혈흔이 비단 자락에 길게 번졌다.

"내 저들에게 참된 검소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마."

"전하? 무슨 방책을……."

"가자. 대신들이 내 검소함을 맹렬히 원하고 있으니, 내 기꺼이 그 뜻을 받들어 주어야지."

선조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류성룡은 그 뒤를 따르며 등줄기에 서늘한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왕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기계를 설계하는 공학자가 가장 효율적인 공정을 찾아냈을 때 짓는, 극도로 통제된 이성의 안광이었다.

***

다음 날 아침, 근정전은 사림의 쩌렁쩌렁한 곡소리로 가득 찼다.

"전하! 군기시의 무모한 무기 생산은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지름길이옵니다!"

"조종조 이래로 조선은 예의의 나라였거늘, 어찌 하루아침에 화포의 매캐한 연기로 대궐을 더럽히시옵니까!"

대간들의 탄핵 상소가 편전 바닥을 가득 메웠다. 송익필의 수하이자 서인의 돌격대장 격인 사간원 사간 이정립이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울부짖었다. 그들의 논리는 정연했고, 도덕적 명분은 단단했다. 요지는 하나였다. 군기시에 배정된 화약 제조 예산과 철 채굴 비용을 전면 삭감하고, 무기 제조를 담당하는 기술 관료들을 유배 보내라는 것.

선조는 용상에 앉아 그들의 통곡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선조가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깊은 한숨이 편전의 정적을 깨뜨렸다.

"경들의 말이 옳다."

의외의 답변에 이정립의 통곡이 뚝 끊겼다. 송익필의 뜻을 받들어 왕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던 대간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선조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자책의 빛이 가득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과인이 부덕하여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대부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사치와 향락에 물든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사림의 영수들이 이토록 검소와 예법을 부르짖는데, 과인이 어찌 귀를 닫겠는가."

"전하…… 참으로 성덕이시옵니다!"

이정립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넙죽 엎드렸다. 그러나 선조의 다음 말은 그들의 통념을 완전히 깨부수는 비수였다.

"하여, 내 오늘 이 자리에서 온 나라에 '궁중 근검령(謹儉令)'을 선포하노라."

선조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음성이 옥좌 뒤의 병풍을 울릴 정도로 웅장하게 뻗어 나갔다.

"나라의 재정이 궁핍한 것은 군기시 때문이 아니다! 사대부들의 가문에서 행해지는 무자비한 사치 때문이다! 내 오늘부로 쌀밥을 끊고 거친 보리밥과 나물만 먹을 것이며, 궐내의 모든 비단과 장식품을 치울 것이다. 아울러, 경국대전 사치 몰수 조항에 의거하여 도성 내의 모든 사치품 유통을 엄격히 금지하노라!"

대신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전하, 그것은 너무 과한……."

"과하다니!"

선조가 이정립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사림이 원하는 것이 바로 조종조의 법도와 검소가 아니었더냐! 내 솔선수범하여 궁중의 사치를 단속하겠다는데, 어찌 그것을 과하다 하느냐? 류 참판!"

"예, 전하. 대령하옵니다."

사전에 약속된 대로 류성룡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경국대전에 이르기를, 국상이나 국가의 재난 시 민간의 사치스러운 제의(祭儀)와 사가(私家)의 호사스러운 물품 유통을 금하고, 이를 어길 시 전량 몰수하여 국고에 귀속한다 하였습니다. 특히, 양반가 부녀자들이 화장용으로 쓰는 분공(粉貢)과 연지, 그리고 사가에서 습기를 제거하거나 화재 예방용으로 쌓아두는 유황(硫黃)과 초석(硝石)은 모두 국가가 통제하는 금지 품목에 해당하옵니다."

순간, 송익필 계열의 사대부들이 앉은 자리에서 들썩였다.

유황과 초석.

그것은 화약을 만드는 핵심 원료였다. 동시에 사대부 가문에서는 약재로 쓰거나, 호사스러운 화장품을 만드는 용도로, 혹은 개인 서고의 방습을 위해 엄청난 양을 사적으로 비축해 두고 있었다.

"도성 내의 모든 양반가를 가택 수색하여, 규정 이상의 비단과 호사품, 그리고 사가에 비축된 유황과 초석을 단 한 푼도 남김없이 국고로 회수하라! 사림의 뜻을 받들어 이 나라의 도덕을 바로세우기 위함이니, 만약 이를 숨기거나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성리학의 검소함을 부정하는 역적(逆賊)으로 다스릴 것이다!"

선조의 선언은 명분이라는 무기로 사림의 목을 베어버리는 완벽한 단두대였다.

"검소를 주장하던 경들이니, 솔선수범하여 가문의 창고를 열어 유황과 초석을 바치겠지? 만약 단 한 줌이라도 숨겨둔 것이 적발된다면, 그것은 군기시의 화약보다 더 사악한 사치품이 될 것이다."

편전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림의 대간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감히 반박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신들이 내세운 '검소와 예법'이라는 명분에 스스로 발목이 잡힌 꼴이었다.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 그들은 위선자로 낙인찍혀 조정에서 매장당할 판이었다.

대치 구도는 완벽하게 붕괴되었다.

사림의 도발을 도리어 그들의 명분으로 되받아쳐, 화약의 원료를 합법적으로 '갈취'하는 선조의 지략 앞에 대신들은 눈물로 헌납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

그날 밤, 편전 뒤편의 밀실.

촛불 하나만이 방 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류성룡은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으며 선조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의 심장은 아직도 거세게 뛰고 있었다.

"전하…… 참으로 신묘한 책략이시옵니다. 사림이 스스로 판 함정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며, 신은 전하의 깊은 지혜에 경외감을 금할 길이 없었나이다."

류성룡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아첨이 아닌, 깊은 오한이 서려 있었다.

선조는 묵묵히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가 적는 것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다. 16세기 조선의 가내수공업 인프라를 현대적 공정으로 바꾸기 위한 하위 호환 매뉴얼이었다.

"경외할 시간은 없다, 류 참판."

선조가 붓을 놓으며 류성룡을 바라보았다.

"사림의 창고에서 털어낸 유황과 초석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이것들이 군기시라는 썩어빠진 관료 조직 안으로 들어가면 또다시 낭비되고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옵니까?"

"군기시 내부의 공정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 글을 모르는 장인들에게 아무리 정밀한 도면을 쥐여줘 봐야 헛일이다. 불량품이 나오면 장인들의 목을 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수할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야지."

선조는 품 안에서 붉은 비단으로 감싸인 작은 목각 도구를 꺼내놓았다.

그것은 정확히 1치 2푼의 규격이 새겨진 '눈금 전 조각'이었다.

"이것을 평안도 철산의 야철지로 보내라. 장인들이 자 대신 이 나무 조각을 대고 철을 깎게 하면, 문맹인 장인들도 오차 없는 소총의 총열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을 전담할 자가 필요하다."

"누구를 염두에 두고 계시옵니까?"

"군기시의 하급 장인 중에 박진국(朴振國)이라는 자가 있다. 과묵하고 고집이 세어 다른 관료들에게 미움을 받는 자이나, 쇠를 다루는 솜씨만큼은 일류다. 그를 군기시 별제(別提)로 임명하여 철산으로 보내라."

류성룡은 침을 삼켰다. 박진국은 천민 출신의 장인이었다. 그런 자를 종6품의 관직인 별제에 임명한다는 것은 조정의 거센 반발을 불러올 것이 뻔했다.

"전하, 신분 질서를 중시하는 사림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래서 내가 근검령을 내린 것이다."

선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가문 구석구석을 털려 뼈아픈 사대부들이 천민 장인의 임명을 두고 왈가왈부할 여유가 있겠느냐? 지금 저들은 제 가문의 유황을 숨기기에 급급할 터다."

선조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또 하나의 가죽 장부를 꺼내 류성룡의 앞에 던졌다.

"이것을 보아라."

류성룡이 조심스럽게 장부를 펼쳤다. 장부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이, 이것은……."

"혜민서(惠民署)와 민간 약방을 통해 유출된 유황의 흐름이다. 사대부 가문들이 약재와 화장품 원료라는 명목으로 사들인 유황 중 상당수가 국경을 넘어 왜구와 여진족에게 밀매되고 있었다."

장부에는 서인의 핵심 인물들과 사림 영수들의 가문 이름이 붉은 먹선으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송익필의 서인 세력이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낼 때, 이 장부는 저들의 목을 치는 단두대의 칼날이 될 것이다. 류 참판, 이 장부에 적힌 유황의 흐름을 추적하여 단 한 톨의 유황도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확보된 모든 원료는 박진국을 통해 평안도 영변과 철산의 비밀 공정지로 즉시 이송하라."

선조의 통제 집착증은 병적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눈앞의 류성룡조차 완벽하게 믿지 않았다. 모든 정보와 원자재의 흐름은 오직 임금 자신의 손끝을 거쳐야만 직성이 풀렸다.

"신 류성룡, 목숨을 바쳐 전하의 명을 수행하겠나이다."

류성룡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깨달았다. 용상에 앉아 있는 이 젊은 임금은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조종조의 법도뿐만 아니라 성리학의 명분 자체를 불살라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괴물이라는 것을.

***

사흘 뒤, 평안도 철산의 깊은 계곡.

우렁찬 폭포 소리와 함께 거대한 수력 야철로가 붉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낙차를 이용한 물레바퀴가 돌며 거대한 망치를 움직였고, 쇠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의 박진국이 선조가 보낸 '눈금 전 조각'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경외감과 집념이 교차했다.

"임금님께서 직접 그리신 그림과 이 나무 자라니……."

박진국은 투박한 손가락으로 목각의 정밀한 눈금을 쓸어내렸다. 글을 모르는 그에게 복잡한 한문 서책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이 직관적인 나무 조각과 선조가 손수 그려 보낸 구체적인 손그림 매뉴얼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이것만 있으면…… 쇠의 두께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출 수 있다. 쇠가 식을 때 내는 소리와 불꽃의 붉은 점도만 맞추면, 폭발하지 않는 질긴 철을 뽑아낼 수 있어."

박진국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조총을 대량으로 만들어 바치겠나이다."

철산의 비밀 기지는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성에서 몰수된 유황과 초석이 극비리에 이송되어 마당에 가득 쌓였고, 장인들은 임금이 내린 규격에 맞춰 조총의 신을 깎아 나갔다. 조선의 군사 혁명은 소리 없이, 그러나 거대한 해일처럼 아래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

그러나 도성의 정국은 선조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편전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도승지 유희서가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전하! 큰일이옵니다!"

선조는 붓을 멈추지 않은 채 차갑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우의정 송익필 대감과 서인 세력이…… 이조전랑(吏曹銓郞)의 임명권을 문제 삼아, 조정의 모든 인사 결재를 거부하고 사직서를 제출하였사옵니다!"

선조의 손끝이 멈추었다.

이조전랑. 삼사의 간관들을 추천하고 조정의 중하급 관리들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조선 권력의 핵심 보직. 송익필은 근검령으로 명분을 잃고 구석에 몰리자, 인사권을 볼모로 잡아 조정의 행정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극단적인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조정의 백관들이 출근을 거부하여 의정부와 육조의 정무가 올스톱되었사옵니다! 전하, 이대로 가면 나라의 행정이 완전히 마비되옵니다!"

유희서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선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 촛불의 불꽃이 차갑게 일렁였다.

"송익필…… 결국 이리 나오는구나."

조선을 손에 쥐고 흔들려는 사림의 거두와, 미래의 화력 제국을 건설하려는 임금의 숨 막히는 권력 투쟁이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

**《선조실록(宣祖實錄)》 임오(壬午)년 기록 요약**

왕이 온 나라에 궁중 근검령(謹儉令)을 선포하시고 스스로 거친 음식을 먹으며 솔선수범하시니, 도성 내의 사치 풍조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또한 법전의 조항을 엄히 대어 사가(私家)에 비축된 유황과 초석을 몰수하여 국고에 귀속시키니, 간관들이 제 입으로 검소를 주장하다가 도리어 가문의 재물을 잃고 겉으로는 찬양하되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렸다.

이에 우의정 송익필 등이 크게 반발하여 이조전랑(吏曹銓郞)의 천거권을 빌미로 조정을 마비시키니,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 극에 달하여 도성의 정국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밤새 밀실에서 쇳가루 묻은 도면을 살피시며 북방의 방비를 구상하시니, 그 뜻의 깊음과 엄혹함은 감히 신료들이 헤아릴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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