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캐한 유황 냄새가 콧망울을 찔렀다.
붉은 비단 위에 금실로 정교하게 수놓인 오조룡(五爪龍). 소매 끝단에 묻은 거뭇한 그을음이 낯설었다. 한민우는 자신의 가슴팍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손끝에 걸리는 것은 거친 군용 작업복이 아닌, 겹겹이 둘러싸인 최고급 명주 비단이었다.
‘내가…… 조선의 선조라고?’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머릿속을 헤집던 의문은 무거운 현실로 내려앉았다.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수석 무기 개발 연구원이었던 한민우. 최첨단 미사일의 추진체와 화약 배합을 설계하던 그가 눈을 뜬 곳은 1582년, 임진왜란 발발을 정확히 10년 앞둔 조선의 한양이었다.
머릿속에서 역사 서적의 활자들이 피비린내를 풍기며 스쳐 지나갔다.
십만양병설의 좌절, 전 국토의 초토화, 한강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하던 나약한 군주. 그리고 길바닥에 버려져 왜군의 조총탄에 꿰뚫리던 무고한 백성들의 비명까지. 전생의 기억과 역사적 사실이 융합되는 순간, 그의 척추를 타고 극심한 오한이 뻗쳤다.
이대로 10년을 흘려보낸다면 자신 역시 그 치욕스러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될 터였다. 실패하면 가문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통째로 도륙 난다. 지독한 책임감과 선조 특유의 병적인 의심증이 뇌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완벽히 믿을 수 없다. 무기 공정과 권력의 고삐는 오직 자신만이 쥐고 흔들어야 했다.
"전하, 시사(試射)를 준비하였사옵니다. 부디 법도를 지키시어 가마 안에서 윤허해 주시옵소서."
군기시 제조(軍器寺 提調)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연—선조의 귀청을 때렸다.
선조는 대답 대신 가마의 주렴을 거칠게 걷어 올렸다. 사방을 둘러싼 호위 무사들과 대간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왕이 직접 흙바닥을 밟고 군기시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오자, 현장에 있던 야철장들과 하급 관리들이 일제히 머리를 땅에 박았다.
마당 중앙에는 명나라에서 들여온 조총을 모방하여 조선의 장인들이 가내수공업으로 벼려낸 신식 조총 세 자루가 거치되어 있었다.
"시작하라."
선조의 나지막한 명령에 사수 한 명이 마른침을 삼키며 화승에 불을 붙였다.
타들어 가는 화승의 불꽃이 약실로 빨려 들어간 그 순간이었다.
*쿠우웅—!*
맑은 폭음이 아니었다. 쇠가 찢어지고 찢겨 나간 파편이 공기를 가르는 기괴한 마찰음이 화약 연기와 함께 사방으로 비산했다.
"으아아악!"
사수의 처절한 비명이 마당을 가득 채웠다. 총열의 허리 부분이 완전히 박살 나며 튀어 나간 철편이 사수의 어깨와 뺨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붉은 피가 흙바닥을 적셨고, 화약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전하! 피하셔야 하옵니다!" "자객의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어가를 보존하소서!"
지평과 간관들이 혼비백산하여 선조의 앞을 가로막았다. 몇몇 신하들은 이미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자신을 막아서는 호위 대장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냈다.
"물러서라."
"전하, 위험하옵니다! 아직 화약의 잔불이……."
"내 물러서라 하였다."
서슬 퍼런 목소리에 장내의 소란이 일순간 가라앉았다. 선조는 붉은 룡포 자락이 흙먼지에 쓸리는 것조차 개의치 않고, 폭발이 일어난 거치대로 걸어갔다.
연기가 자욱한 땅바닥을 헤치고, 그는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총열의 파편을 맨손으로 주워 올렸다.
"전하! 손을 다치시옵니다!"
뒤따라온 우승지 류성룡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왕이 직접 폭발 사고의 잔해를 만지는 전대미문의 상황에 그의 머릿속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선조의 손가락 끝이 찢겨 나간 철편의 단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검게 그을린 단면에는 거친 입자들이 모래알처럼 박혀 있었다. 현대 무기공학자의 눈에는 너무나도 명백한 불량의 증거들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군기시 제조가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었다.
"전, 전하! 이는 필시 천한 야철장 놈들이 불을 다룸에 태만하여 생긴 일이옵니다! 당장 담당 장인들을 의금부로 압송하여 엄히 국문하겠사오니, 옥체를 상하게 하신 분노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꼬리를 자르고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전가하려는 전형적인 조정 관료의 행태였다.
선조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철편을 군기시 제조의 발밑으로 툭 던졌다. 쇳조각이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장인의 태만이라?"
"예, 예! 쇳물을 다루는 놈들이 정성을 다하지 않아……."
"닥쳐라."
벼락같은 일갈에 군기시 제조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선조가 단면을 가리키며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조정 신료들이 감히 끼어들 틈도 없는 압도적인 전문성이 실려 있었다.
"이 파면(破面)을 똑똑히 보아라. 입자가 강물에 뒹구는 모래알처럼 거칠고 푸석하지 않느냐. 이것은 선철(銑鐵) 속에 포함된 탄소, 즉 숯기운을 제대로 뽑아내지 못해 쇠가 유리처럼 취성(脆性)을 띠고 깨진 것이다. 철의 성질조차 구분하지 못하면서 어찌 장인의 태만을 탓하느냐?"
"탄, 탄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소신들은……."
"두 번째로, 이 합봉선(合봉선)을 보아라. 조총의 총열은 철판을 달구어 둥글게 말아 말아붙이는 법. 접합부의 온도가 충분히 올라가지 않은 상태에서 두들겼으니, 겉만 붙고 속은 벌어진 냉간 접합 불량이 일어난 것이 아니더냐! 화약이 터지는 압력을 이 틈새가 견디지 못하고 터진 것을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가!"
조정 신료들과 군기시의 관리들은 숨을 죽였다. 평생 유교 경전만을 읽어온 사대부들의 머리로는 왕이 쏟아내는 '취성'이니 '냉간 접합'이니 하는 기괴한 단어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단어들이 품고 있는 엄밀하고도 서슬 퍼런 논리만큼은 뼛속까지 전달되었다.
오직 류성룡만이 눈을 크게 뜨고 왕의 손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실무에 밝고 합리적인 그의 머릿속에 왕의 기이할 정도의 식견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까닭이다.
선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박살 난 약실 근처의 그을음을 손가락으로 찍어 혀끝에 살짝 대었다가 뱉어냈다.
"그리고 화약의 비율 또한 엉망이구나. 염초(염화칼륨)의 순도가 떨어지니 연소 속도를 맞추기 위해 유황의 양을 무작정 늘렸지? 유황이 많아지면 연소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가스 발생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연철로 만든 이 조잡한 총열이 그 비정상적인 강압(腔壓)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이것은 무기가 아니라 아군을 죽이는 흉기다!"
군기시 마당에는 오직 바람 소리만이 쓸쓸하게 맴돌았다.
감히 그 누구도 대꾸하지 못했다. 조총을 장난감 취급하며 무시하려던 사대부들도, 기술적 한계를 적당히 얼버무리려던 기술 관료들도 왕의 완벽한 기술적 해부 앞에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선조는 품바지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그을음을 닦아내며 류성룡을 응시했다.
"류 참판."
"예, 전하. 신 류성룡, 대기하고 있사옵니다."
"과인이 보기엔 조선의 모든 야철 공정이 이와 같다. 장인들이 눈대중과 경험으로만 쇠를 두들기니, 백 자루를 만들면 백 자루가 모두 규격이 다르고 성능이 제각각이다. 이래서야 어찌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를 막아내겠는가?"
"전하의 혜안이 참으로 깊으시옵니다. 하오나 조정의 재정이 궁핍하고, 철을 정련하는 기술은 하루아침에 물리(物理)를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류성룡의 지적은 정확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고, 기술자들은 천시받았다. 수치화된 매뉴얼도, 규격화된 도량형도 없는 가내수공업 체제하에서 왕이 원하는 수준의 강철을 대량 양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선조에게는 현대 무기공학의 정수가 고스란히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16세기의 인프라로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하위 호환 공정.
탄소 함량을 정밀한 계측기 대신 '쇳물이 식을 때 뿜어내는 수증기의 소리와 불꽃의 붉은 점도'로 판별하는 매뉴얼을 만들면 된다. 도량형의 오차는 조정이 공인한 엽전의 지름을 기준으로 삼아 고정하면 될 일이었다.
"물리를 깨우치지 못했다면, 과인이 친히 그 법식을 만들어 내릴 것이다."
선조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쇠를 달굴 때 뿜어내는 불꽃의 빛깔이 진한 황색에서 맑은 백색으로 넘어가는 찰나, 그때가 바로 숯기운이 가장 알맞게 빠져나간 때이다. 또한, 담금질할 때 쇳물이 내뿜는 소리가 거위의 울음소리와 같아야 비로소 강인함을 얻는 법. 과인이 이 모든 공정을 알기 쉬운 그림과 구결(口訣)로 정리하여 군기시에 내릴 터이니, 즉시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제철법을 시험하라."
"전하…… 정녕 그것이 가능하옵니까?"
류성룡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왕이 직접 제철 공정의 상세한 매뉴얼을 구상하고 있었다니. 이것은 조종조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사대부의 관점에서는 패도(覇道)의 조짐으로 보일 수도 있었으나, 실무를 아는 류성룡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국방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거대한 혁명의 시작으로 느껴졌다.
"불가능이란 없다. 나라의 안위가 풍전등화이거늘, 법도 타령만 하며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선조는 속으로 다짐했다. 평안도 철산과 영변의 풍부한 사철과 숯을 이용해 비밀리에 제철 및 군수 복합단지를 구축해야 한다. 한양의 간관들과 명나라 세작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보안과 제도적 위장이 필요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이 군기시를 완벽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군기시 제조는 들으라."
"예, 전하! 명을 내리시옵소서!"
"오늘부로 군기시 내에 비밀 공정을 전담할 별설 처소를 두고, 과인이 직접 천거하는 장인들을 배치할 것이다. 예산과 원자재는 전적으로 군기시가 독점하여 관리하도록 하라."
"하오나 전하, 의정부와 삼사의 동의 없이 예산을 독점하는 것은 조종조의 전례에 어긋나며, 사림의 반발이……."
군기시 제조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선조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의 말을 잘랐다.
"사림의 반발이라 하였느냐? 내 나라의 군대를 무장시키고 백성을 구하겠다는데, 어느 신하가 감히 예산을 빌미로 가로막는단 말이냐? 그들이 진정 나라의 안위보다 성리학적 예법이 더 중하다 여긴다면, 내 친히 그들의 목을 쳐서 성리학의 도리가 무엇인지 물을 것이다."
살기가 서린 선조의 경고에 마당에 서 있던 모든 관리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완벽한 기망과 심리 조종, 그리고 자원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을 불사하겠다는 왕의 극단적인 통제 집착증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참화를 막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전하! 급보이옵니다!"
군기시 마당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한 명의 전령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허겁지겁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서신이 들려 있었다.
류성룡이 서신을 받아 신속히 밀랍을 제거하고 내용을 확인했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썹이 찌푸려지더니, 이내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무슨 일이냐, 류 참판?"
선조가 나지막이 물었다.
류성룡은 사방의 눈치를 살핀 뒤, 선조에게 바짝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 사림의 영수이자 우의정 송익필 대감이 삼사의 간관들을 대동하고 상소를 올렸사옵니다."
"상소의 내용이 무엇이더냐?"
"군기시가 무모하게 화약을 낭비하고 사사로이 군비를 증강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있으니, 군기시의 모든 화포 시험을 무기한 중단하고 관련 책임자들을 전원 탄핵하라는 내용이옵니다. 이미 대간들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 통곡할 준비를 마쳤다 하옵니다."
선조의 눈이 가늘어졌다.
송익필. 음지에서 서인을 조종하며 왕권의 팽창을 철저히 견제하려는 사림의 거두. 그가 마침내 조선의 무기 국산화 움직임을 감지하고 꼬투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상소가 아니었다. 왕의 군사적 통제권을 원천 봉쇄하려는 사림 세력의 조직적인 선전포고였다.
매캐한 화약 연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군기시 앞마당 위로, 조선 조정을 피바람으로 몰고 갈 거대한 정치적 폭풍우의 서막이 내리고 있었다.
선조는 손에 쥔 차가운 철편을 더욱 꽉 쥐었다. 날카로운 파편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 채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송익필…… 네놈이 감히 내 길을 가로막겠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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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宣祖實錄)》 기축(己丑)년 기록 요약**
왕이 친히 군기시(軍器寺)에 거둥하여 신식 화기의 시사(試射)를 참관하셨다. 이때 장인의 미숙함으로 총열이 파열되어 사수가 다치는 변고가 발생하였다. 조정의 여러 신료들이 놀라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께서는 옥체를 돌보지 않으시고 몸소 파편을 만지시며 쇠의 단면이 거칠고 탄소(炭素)의 조절이 실패하였음을 엄히 꾸짖으시니, 그 식견이 유달리 깊어 야철장들과 하급 관리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동일에 우의정 송익필(宋翼弼) 등이 상소를 올려, 군기시가 화약을 허비하고 조종조의 전례를 어기며 사사로이 병기를 만드니 나라의 근간이 흔들린다 하여 탄핵을 청하였다. 이에 조정의 논의가 크게 분열되니, 성세(盛世)의 이면에 거대한 정쟁의 불씨가 잉태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