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판이 아주 제대로 커졌습니다."

태혁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노트북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광이 그의 굳은 얼굴을 날카롭게 비추었다. 붉게 물든 시야 너머로, 머릿속에 각인된 '리갈 레저'의 경고창이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 [🚨 인과율 오차 경고 🚨] - 인과율 오차율: 15% ➔ 40% (급상승!) - 실시간 데이터 왜곡 노이즈 발생. ```

뇌리를 찌르는 이명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어금니를 악물자 턱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단순히 오차율 수치만 치솟은 것이 아니었다. 화면 하단에 새로 갱신된 상대 측 대표 변호인의 이름 석 자가 태혁의 눈동자에 날카롭게 박혔다.

[법무법인 가온 대표 백승현 (현 차기 법무부장관 임용 예정자)]

백승현.

전생에서 사법 카르텔 '도원회'의 실질적인 설계자이자, 한성그룹의 더러운 뒷배 노릇을 하며 대법관 자리까지 올랐던 괴물. 그가 마침내 전면에 등판했다. 차기 법무부장관 후보자라는 절대적인 권력의 후광을 등에 업은 채로.

"강태혁 변호사? 괜찮아요? 얼굴이 갑자기……."

민혜령이 태혁의 안색을 살피며 다가왔다. 그녀의 손끝이 태혁의 소맷자락에 닿으려다 멈칫했다.

태혁은 깊은 숨을 들이쉬며 시야를 가린 빨간 경고창을 지워냈다. 눈을 뜨자, 책상 위에 놓인 아진테크의 고소장과 최창식이 확보해 온 낡은 열쇠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상보다 쥐새끼들의 대장이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태혁이 서랍을 열어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미끄러졌다.

"백승현이 움직였다는 건, 저들이 이 재판을 단순한 기술 유출 소송이 아니라 정치적 매장 극으로 끌고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판을 흔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백승현 변호사라면 전관 중의 전관이에요. 대법관 출신에 장관 지명까지 앞둔 사람을 상대로 법리 싸움이 통할까요? 법원 전체가 그 사람 눈치를 볼 텐데요."

혜령의 목소리에 무게감이 실렸다. 고지식한 그녀조차 백승현이라는 이름이 가진 사법부 내의 위압감을 모를 리 없었다.

태혁은 대답 대신 리갈 레저를 다시 한번 구동했다.

스스스슥.

머릿속 장부의 페이지가 강제로 넘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전과 달랐다. 글자들이 찌그러지고, 문장 사이사이에 붉은색 노이즈가 끼어들었다.

``` [⚠️ 데이터 왜곡 발생] - 배심원 후보군 분석: 임종식 (한성그룹 협력업체 대표) ➔ [증거 번호: ERROR-999] - 매수 정황 포착: 법무법인 가온 송무 사무장이 임종식에게 접촉하여 5억 원의…… [데이터 판독 불가] ```

태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차율 40%의 부작용이었다. 실시간으로 미래 정보가 뒤틀리고 가짜 데이터 노이즈가 임의로 기입되고 있었다. 장부의 100% 신뢰성은 깨졌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자신의 감각과 법정에서의 실시간 대응력으로 승부를 보아야 했다.

하지만 깨진 글자 틈새로 흘러나온 정보만으로도 충분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신청해 둔 배심원단 예비 명단, 거기서 이미 물밑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태혁이 인쇄기에서 갓 뽑아낸 서류 한 장을 혜령에게 던지듯 건넸다.

"이게 뭐죠?"

"배심원 후보 3번 임종식에 대한 은밀한 매수 및 뇌물공여 의사표시죄 고소장입니다. 피고발인은 법무법인 가온의 송무 담당 사무장, 그리고 임종식 본인."

혜령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직 배심원 선정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고소를 고발하겠다고요? 증거는요?"

"최 형사님이 움직여 줄 겁니다. 가온의 사무장이 임종식을 만난 룸살롱의 결제 내역과 차량 블랙박스 영상은 이미 확보할 경로를 봐 뒀으니까요. 민 변호사, 지금 즉시 이 고소장을 서울중앙지검에 접수하세요. 백승현이 법정에 서기도 전에 발목을 진흙탕에 처박아 버려야 합니다."

태혁의 명령등등한 목소리에 혜령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서류를 챙겨 서둘러 무간 사무실을 나섰다.

* * *

그날 밤.

서초동의 가로등 불빛이 허름한 법률사무소 무간의 깨진 유리창 너머로 길게 스며들었다.

사무실 안쪽, 낡은 가죽 소파에 걸터앉은 최창식이 어깨의 붕대를 고쳐 매며 헛기침을 했다. 그의 손에는 편의점에서 사 온 싸구려 소주병과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탁.

최창식이 먼지 쌓인 테이블 위에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어이, 강 변호사. 일도 좋지만 뼈 부러진 놈 앞에서 그렇게 펜대만 굴리면 서운하지."

태혁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몸이 불편하시면 들어가서 쉬시지 왜 아직 여기 있습니까."

"쉬긴 뭘 쉬어. 도원회 그 개자식들 목덜미를 따기 전엔 잠도 안 와."

최창식이 뚜껑을 따고 투명한 액체를 종이컵에 들이부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에 울렸다. 그는 잔 하나를 태혁의 서류 더미 옆에 툭 밀어 놓았다.

"이 잔 말이야. 옛날에 내 파트너 녀석이랑 잠복근무 돌 때 매일 쓰던 놈이다. 그 자식도 너처럼 지독한 독종이었지. 한 번 물면 자기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안 놓아줬어."

최창식의 거친 손가락이 소주잔 가장자리를 쓸었다. 그의 눈에 서린 염세적인 빛 뒤로 묵직한 살기가 감돌았다.

"대기업 변호사 놈들 매수 공작 현장, 깔끔하게 따왔다. 네 말대로 가온 사무장 놈이 임종식이한테 돈 가방 던져주는 그림 아주 예쁘게 찍혔어. 검찰청에 찔러 넣으면 백승현 그 늙은이도 제법 머리 아플 거다."

태혁이 서류를 덮고 소주잔을 바라보았다. 그는 잔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철저한 계산과 이익으로만 움직이는 그에게, 이러한 감상적인 교류는 불필요한 사치였다.

"최 형사님. 전 정의를 실현하려고 이 짓을 하는 게 아닙니다."

"알아, 이 자식아. 네 눈깔을 보면 안다. 넌 그냥 그 새끼들을 씹어 삼키고 싶어 하는 미친놈이지."

최창식이 씩 웃으며 자신의 잔을 들이켰다.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그래서 맘에 든다는 거야. 착한 척 위선 떠는 검사 놈들보다, 너처럼 대놓고 법이라는 칼로 칼부림하려는 놈이 훨씬 믿을 만하지. 끝까지 간다, 강태혁. 내 몫의 돈값은 확실히 할 테니까."

태혁은 가만히 최창식이 내려놓은 도원회 전용 지하실 비밀 금고의 열쇠를 손끝으로 골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졌다.

"기대하겠습니다."

태혁의 건조한 대답과 함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 * *

다음 날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1형사부 법정.

무거운 침묵이 법정 내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방청객석은 이미 기자들과 법조계 관계자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피고인석에 앉은 한성그룹의 하청업체 기술 침탈 관련 피고인들 뒤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은발이 세련되게 섞인 머리칼, 빈틈없이 재단된 다크 네이비 수트. 그의 등장은 법정 안의 공기를 단숨에 바꾸어 놓았다. 전 대법관이자 차기 법무부장관 후보자, 백승현이었다.

백승현은 가볍게 재판부 석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 변호인석에 앉아 있던 태혁을 흘긋 바라보았다.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노회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하룻강아지를 바라보는 맹수의 여유였다.

"재판장님."

백승현이 단상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해 마이크를 쓰지 않아도 법정 구석구석까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본 변호인은 어제 자로 이 사건의 대리인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본 사건은 기술 특허 및 경영권 분쟁이 얽힌 극도로 방대하고 복잡한 사안입니다. 피고인의 헌법상 보장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충분한 방어권 행사'를 위해, 첫 공판기일을 최소 3주간 연기해 주실 것을 정중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예상했던 전관예우 식 시간 끌기였다.

재판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법관 출신이자 곧 자신들의 인사권을 쥘지도 모르는 미래의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음, 피고인 측 변호인의 주장이 타당한 면이 있군요. 검찰 측과 원고 대리인 측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재판장이 태혁을 바라보았다.

태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판례집과 서류 몇 장이 들려 있었다.

"강력히 반대합니다."

태혁의 목소리가 법정의 정적을 깨뜨렸다.

"원고 측은 이미 모든 증거와 변론 준비를 마쳤습니다. 피고인 측은 대형 로펌 가온의 수십 명의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들을 동원해 하룻밤 사이에도 서류 검토를 마칠 능력이 있는 집단입니다. 그럼에도 기일 연기를 신청하는 것은 오직 사법 절차를 의도적으로 지연시켜 피해 기업을 고사시키려는 대기업 특유의 횡포에 불과합니다."

백승현이 낮게 실소를 터뜨리며 태혁을 돌아보았다.

"강 변호사. 열정은 가상하나 사법 절차의 기본을 망각한 발언이군요. 피고인에게 방어권을 준비할 물리적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재판을 속행하자는 것은, 공판중심주의와 적법절차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초법적 발상입니다.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하는 법이지요."

백승현의 훈계 섞인 반박에 방청석에서 나직한 수군거림이 일었다. 역시 백승현이라는 찬탄의 눈빛들이 그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태혁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렸다.

"적법절차 원칙을 말씀하셨습니까, 백승현 변호사님?"

태혁이 서류 한 장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이 판결문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태혁은 백승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낭독하기 시작했다.

``` [대법원 2012. 4. 12. 선고 2011도10432 판결] "피고인의 변호인 변경 등을 이유로 한 기일 연기 신청이 소송 절차의 고의적인 지연을 목적으로 함이 명백하거나, 사법 정의 실현을 현저히 저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법원은 신속한 재판의 원칙에 따라 기일 연기 신청을 기각하고 공판을 속행함이 상당하다." ```

법정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태혁은 낭독을 마친 뒤, 백승현을 향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 판결문, 기억하십니까? 바로 12년 전, 백승현 변호사님이 대법관 시절에 주심 대법관으로서 직접 작성하고 선고하신 전원합의체 판결문입니다."

"……!"

백승현의 주름진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늘 여유롭던 그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당혹감과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태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몰아붙였다.

"본인이 대법관 시절에는 '고의적 지연을 목적으로 한 기일 연기는 사법 정의를 저해한다'며 기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엄히 판결해 놓고, 이제 와서 대기업의 돈을 받고 대리인이 되자마자 똑같은 수법으로 기일 연기를 신청하십니까? 대법관 백승현의 사법 정의와, 변호사 백승현의 사법 정의는 법조문 자체가 다르게 적용되는 것입니까!"

"강태혁 변호사! 말을 삼가시오!"

가온 측의 보조 변호사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화살은 과녁을 관통한 뒤였다.

방청석은 물론, 재판부석의 판사들조차 서로 야릇한 시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내린 판례에 스스로 발목이 잡힌 전직 대법관. 이보다 더 완벽한 모순은 없었다.

민혜령은 옆자리에서 태혁의 신들린 듯한 반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백승현의 과거 판결문까지 완벽하게 분석해 법정에서 무기로 활용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재판장이 헛기침을 하며 마이크를 잡았다.

"어음…… 피고인 측 대리인이 과거 내린 판결의 취지와 본 사건의 신속한 해결 필요성을 고려할 때, 원고 측의 주장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피고인 측의 기일 연기 신청은 기각합니다. 첫 변론 기일을 예정대로 속행하겠습니다."

땅! 땅! 땅!

의사봉 소리가 법정 안에 울려 퍼졌다.

백승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천천히 태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겉으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당장이라도 태혁의 목을 움켜쥘 듯이 번뜩이고 있었다.

태혁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속으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제 시작이다, 백승현.'

* * *

오후 6시.

재판을 통쾌하게 마치고 서초동 무간 사무실로 돌아온 태혁과 혜령은 승리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었다.

혜령이 흥분된 목소리로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정말 대단했어요, 강 변호사님. 백승현 변호사의 얼굴이 그렇게 굳어지는 건 법조계 역사상 처음일 거예요. 이제 기일 연기도 막았으니, 다음 주 재판에서 아진테크의 기술 시연만 성공하면 완전히 승기를 잡는 거죠?"

태혁은 책상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려다, 사무실 금연이라는 혜령의 매서운 눈빛에 가만히 담배를 내려놓았다.

"방심하긴 이릅니다. 백승현은 그런 수모를 당하고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

탁-! 지지직!

그 순간, 사무실 구석에 놓인 구형 팩스기가 미친 듯이 작동하며 종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태혁의 머릿속에서 강한 두통과 함께 리갈 레저의 경고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삐이이이-!

``` [🚨 인과율 오차 경고 🚨] - 인과율 오차율: 40% ➔ 45% (상승) - 미래 소송 절차의 급격한 변동 감지. - 법원 직권에 의한 변론기일 지정 통지서 발송됨. ```

태혁이 급히 팩스기로 걸어가 토해내진 서류를 낚아챘다.

종이 위에 찍힌 법원의 직인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 채 붉게 빛나고 있었다. 서류의 내용을 확인한 태혁의 눈빛이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이게…… 무슨……."

서류를 옆에서 훔쳐본 민혜령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말도 안 돼…… 내일 아침 10시라고요?"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1형사부 - 기일지정결정 통지서] - 피고인: 한성그룹 외 3인 - 다음 변론 기일: 금일로부터 단 20시간 뒤인 내일 오전 10시.

백승현이 재판이 끝나자마자 법원장과의 내밀한 독대를 통해, 준비 시간을 완전히 박탈해 버리는 변칙적인 기습을 가한 것이었다. 단 20시간 뒤에 최종 변론을 하라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통지였다.

태혁의 손 안에서 팩스 용지가 거칠게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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