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심의장 뒷문의 무거운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끌려 나가던 김종식의 비명조차 그 소리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도준.

한성그룹의 후계자이자 도원회의 거대한 돈줄이 그곳에 서 있었다. 완벽하게 재단된 차콜 그레이 슈트 깃 위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듯, 그는 수갑을 찬 채 울부짖는 김종식을 스쳐 지나갔다. 오직 그의 검은 눈동자만이 강태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재밌네."

한도준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찍는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심의장을 채웠다.

"연수원 나부랭이들이 모여서 소꿉장난하는 줄 알았더니, 제법 피를 흘리게 만들 줄도 알고. 강태혁이라고 했나?"

태혁은 서류 가방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쇠붙이가 맞물리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일었다. 회귀 전, 자신을 사형대로 밀어 넣었던 설계자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사냥감을 마주한 포식자의 끓어오르는 갈증이었다.

"용건만 하십시다, 한도준 씨. 바쁜 사람 붙잡고 통성명이나 할 짬은 없어서 말입니다."

태혁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에 서 있던 연수생들의 숨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한성그룹의 황태자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대꾸할 수 있는 인간은 서초동을 통틀어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도준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가웠다.

"겁이 없는 건지, 대가리가 나쁜 건지 모르겠군. 김종식 같은 늙은 사냥개 하나 물어뜯었다고 네가 사냥꾼이라도 된 것 같아?"

도준이 태혁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고가의 스킨 향과 함께 묘한 피비린내가 섞여 풍기는 듯했다. 도준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태혁의 귀에 속삭였다.

"법이라는 건 말이야, 강태혁 군. 우리가 만든 울타리야. 그 안에서 네가 아무리 날뛰어 봐야 결국 우리 집 마당 안이라는 소리지. 착각하지 마. 넌 그냥 짖는 법을 조금 아는 개새끼에 불과해."

태혁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울타리가 너무 낡았더군요. 한도준 씨."

태혁의 손가락이 도준의 가슴팍을 가볍게 스쳤다.

"그 낡은 울타리, 내가 전부 부수고 그 자리에 무덤을 파 줄 생각입니다. 당신과, 당신 뒤에 숨은 도원회 늙은이들 전부가 들어갈 아주 깊은 무덤을 말이죠. 그러니까."

태혁이 도준의 어깨를 툭 치며 한 걸음 내딛었다.

"비키세요. 냄새납니다."

도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살기 어린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태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심의장 문을 열고 나갔다. 혜령이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등 뒤로 한도준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한 선전포고였다.

***

석 달 뒤, 서초동.

대법원 정문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법조타운의 화려한 유리 빌딩들 사이로 유난히 낡고 때가 탄 5층짜리 상가 건물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조차 없어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건물의 4층. 철제문에 조잡한 아크릴판으로 파여진 간판이 붙었다.

[법률사무소 무간(無間)]

사법연수원을 명예 수석으로 조기 수료한 강태혁의 첫 번째 행선지는 대형 로펌 ‘태평양’이나 ‘광장’이 아니었다. 연봉 수억 원의 보장된 탄탄대로를 걷어차고 그가 택한 곳은 서초동에서 가장 어둡고 좁은 이 사각지대였다.

사무실 안은 헵시바 향과 낡은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창밖으로 대법원의 웅장한 돔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태혁이 앉아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붉은 눈을 한 최창식과 가죽 재킷을 걸친 민혜령이 마주 앉아 있었다.

"미쳤냐?"

최창식이 담배를 입에 물려다 태혁의 눈치를 보고는 도로 집어넣으며 툴툴거렸다.

"연수원 수석이라는 놈이 이런 흉가 같은 구멍가게를 차려? 기껏 대기업 놈들 피해 도망쳐 온 곳이 여기라니, 내 목숨값 치고는 너무 저렴한데."

"목숨값은 앞으로 톡톡히 치르게 해 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최 형사님."

태혁이 서류 뭉치를 툭 던졌다.

"그리고 여긴 구멍가게가 아니라 전초기지입니다. 우리가 사법 카르텔의 목줄을 쥐고 흔들 유일한 무법지대죠."

민혜령은 책상 위에 놓인 고소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고소장 표지에는 ‘아진테크 기술 유출 및 특허 침해 고소 건’이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거…… 한성 SDI가 개입된 사건이야."

혜령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수사하던 사건이기도 해. 아진테크 대표가 자살하기 직전, 아버지에게 한성 측의 기술 탈취 설계 도면이 담긴 USB가 있다고 연락했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그 다음 날 의문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수사 기록은 전부 폐기됐지."

태혁이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도원회가 한성의 더러운 뒷수습을 해 주며 사법부를 통제하기 시작한 시발점이 바로 이 사건이죠. 아진테크의 하이브리드 배터리 원천 기술을 통째로 훔쳐 가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 감옥에 처넣은 사건."

"이걸 우리가 다시 들추겠다고?"

최창식이 턱을 괴며 물었다.

"상대는 대형 로펌 '율촌'의 전관 변호사들이 떼거지로 붙을 거야. 법원에선 영장조차 기각시킬 텐데, 무슨 수로 증거를 잡냐? 핵심 설계 파일이 담긴 오리지널 서버는 이미 백업본까지 전부 인멸됐다고 소문났어."

태혁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장부가 펼쳐졌다.

영혼에 각인된 미래 판례 조회 장부, **리갈 레저(Legal Ledger)**.

장부의 페이지가 빠른 속도로 넘겨지며 푸른빛의 텍스트가 태혁의 망막 위에 떠올랐다.

``` [자산(Asset): 아진테크 기술 침탈 사건의 실체적 진실] - 유출 설계 파일 원본 위치: 중국 선전(Shenzhen) 우회 서버가 아닌, 한성 SDI 본사 지하 3층 보안 서버실 내 비공개 백업 드라이브. - 내부 IP 주소: 10.211.55.104 (포트 8080) - 핵심 내부 공모자: 한성 SDI 기술기획본부장 송민우의 개인 노트북 내 암호화 폴더.

[부채(Liability): 인과율 오차율] - 현재 오차율: 15% (경고: 미래 판결 변동성 누적 시 급상승) ```

태혁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들이 아무리 완벽하게 지웠다고 주장해도, 미래의 법정이 결국 찾아냈던 진실의 흔적은 장부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백업 서버는 가짜입니다."

태혁이 눈을 뜨며 말했다.

"진짜 원본 설계 파일은 한성 SDI 본사 지하 3층 보안 서버실에 그대로 있습니다. IP 주소는 10.211.55.104. 송민우 본부장의 개인 노트북에도 동일한 복사본이 존재하죠."

민혜령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한성 내부 기밀 중에서도 최상위 보안 등급일 텐데."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이걸 법적으로 어떻게 터뜨리느냐죠."

태혁이 펜을 가볍게 돌렸다.

"우선, 부정경쟁방지법 제18조를 적용해 법원에 증거보전신청을 넣을 겁니다."

```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18조 (벌칙)] ① 영업비밀을 외국에서 사용하거나 외국에서 사용될 것임을 알면서도 취득·사용 또는 누설한 자는 1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

"증거보전신청?"

혜령이 고개를 저었다.

"한성 측이 미리 눈치채고 서버를 포맷해 버리면 끝이야. 게다가 법원이 한성 본사에 대한 증거보전신청을 쉽게 받아줄 리가 없잖아."

"받아주게 만들어야죠."

태혁의 눈이 번뜩였다.

"최 형사님, 준비해 둔 물건은 있습니까?"

최창식이 품 안에서 낡은 열쇠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던졌다. 쇳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네가 말한 부패 경찰 새끼들 캐비닛에서 털어온 거다. 도원회 전용 지하실 비밀 금고 열쇠라며? 진짜 이게 쓸모가 있긴 한 거냐?"

"이게 바로 법원의 영장 발부를 강제할 치트키입니다."

태혁이 열쇠를 손에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전생의 복수극이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실감 나게 했다.

바로 그때였다.

쿵! 쿵! 쿵!

사무실 문바깥에서 거친 발소리와 함께 거친 두드림이 울렸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철제 문이 거칠게 열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대여섯 명이 무단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품 안에는 사설 경비업체의 표식이 보였지만, 풍기는 기색은 영락없는 조폭 해결사들이었다. 맨 앞에 선 덩치 큰 사내가 품증을 대충 흔들어 보이며 윽박질렀다.

"강태혁 변호사? 서울중앙지검 협조 요청으로 나왔습니다. 최근 발생한 기밀 유출 사건과 관련해서 이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및 현장 검증을 실시합니다."

사내들이 거침없이 사무실 집기를 뒤지려 손을 뻗었다.

"어이, 깡패 새끼들이 어디서 약을 팔아?"

최창식이 벌떡 일어나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태혁이 그의 팔을 제지했다. 태혁은 아주 여유로운 태도로 책상 서랍에서 소형 녹음기와 카메라를 꺼내 켰다.

"압수수색이라."

태혁이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뱀처럼 집요했다.

"영장 제시하십시오."

"검찰 협조 공문이……."

"형사소송법 제122조에 따르면 압수수색 영장은 처분을 받는 자에게 반드시 '제시'하여야 합니다. 공문 따위로 퉁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영장 번호와 발부 판사 이름, 압수할 물건의 범위가 명시된 붉은 직인이 찍힌 진짜 영장 말입니다."

태혁의 속사포 같은 법조문 난사에 맨 앞의 사내가 주춤했다.

"우린 위에서 시키는 대로……."

"그리고 당신들 신분증 보여주십시오. 검찰 수사관이 맞습니까? 아니면 한성에서 보낸 사설 경비업체 소속입니까?"

태혁이 사내의 가슴팍에 달린 배지를 낚아채듯 낚아 올렸다.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공무원자격사칭죄, 형법 제118조. 공무원의 자격을 사칭하여 그 직권을 행사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게다가 영장 없이 타인의 사무실에 무단으로 침입해 수색을 시도했으니, 공동주거침입 및 수색죄도 추가되는군요. 형법 제321조에 의거, 이는 벌금형 없이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중죄입니다."

태혁이 최창식을 돌아보며 차갑게 명령했다.

"최 형사님. 현행범 체포하십시오. 증거는 이 카메라와 녹음기에 완벽하게 남았습니다."

"오케이, 기다리던 시간이다."

최창식이 이가 갈리는 미소를 지으며 뒷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냈다.

"야, 이 새끼들이 미쳤나!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덩치 큰 사내가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전직 강력계 에이스 형사였던 최창식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최창식은 순식간에 사내의 손목을 꺾어 바닥에 메치고는 차가운 쇠붙이를 채웠다.

철컥!

"으아악!"

"한성에서 돈 몇 푼 쥐여 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서초동 바닥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영장도 없이 털려고 들어? 배짱 하나는 두둑해서 아주 마음에 든다, 씹새끼들아."

최창식이 남은 사내들의 다리를 걷어차며 순식간에 세 명을 바닥에 꿇렸다. 민혜령 역시 신속하게 문을 잠그고 112에 신고 전화를 걸었다.

"예, 서초동 법률사무소 무간입니다. 현재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검찰 수사관을 사칭하며 무단 침입 및 불법 수색을 시도하여 현행범으로 체포 구금 중입니다. 즉시 출동 바랍니다."

바닥에 처박힌 해결사 두목이 이를 갈며 태혁을 노려보았다.

"강태혁…… 네놈이 감히 한성그룹을 상대로 무사할 것 같냐? 한도준 상무님이 너 같은 기생충 하나 밟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태혁은 바닥에 엎어진 사내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가서 전해라."

태혁의 눈에 핏빛 살기가 서렸다.

"쥐새끼들을 보낼 거면 좀 더 쓸 만한 놈들로 보내라고. 이딴 어설픈 장난질에 놀아나 줄 만큼 한가하지 않으니까."

불과 5분 뒤, 사이렌 소리와 함께 관할 파출소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한성 측이 보낸 해결사들은 꼼짝없이 사설 수색 및 공무원자격사칭 현행범으로 연행되었다. 대기업의 비열한 위장 압수수색 시도가 시작되기도 전에 완벽하게 진압당한 순간이었다.

***

경찰들이 해결사들을 끌고 가고,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민혜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정말 미친 짓이었어. 만약 저들이 진짜 무력을 썼다면……."

"저들은 사냥개일 뿐입니다. 진짜 주인의 목줄을 죄어야죠."

태혁이 책상 앞으로 걸어가 노트북을 켰다. 아진테크의 고소장과 최창식이 가져온 비밀 열쇠를 나란히 놓았다.

바로 그 순간.

삐이이이-!

태혁의 귓가에 이명이 울리며, 눈앞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머릿속에 각인된 '리갈 레저'가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 [🚨 인과율 오차 경고 🚨] - 감지된 나비효과: 아진테크 기술 침탈 사건의 증거보전신청 노출 및 사설 해결사 역공으로 인한 미래 판결선 변동. - 인과율 오차율: 15% ➔ 40% (급상승!) - 실시간 데이터 왜곡 노이즈 발생. ```

태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차율이 순식간에 40%까지 치솟았다. 100%에 도달하면 그의 변호사 자격은 영구 박탈되고 사법적으로 파멸한다. 미래를 너무 급격하게 뒤흔든 대가였다.

하지만 더 끔찍한 변화는 그 뒤에 나타난 메시지였다.

``` [⚠️ 피고인(한성그룹) 측 변호인단 실시간 변경 정보] - 기존 대표 변호사: 로펌 율촌 시니어 파트너 김태영 (승소율 78%) - 변경된 대표 변호사: 법무법인 가온 대표 백승현 (현 차기 법무부장관 임용 예정자 / 승소율 99.2%) ```

백승현.

전생에서 도원회의 핵심 브레인이자, 사법부를 한성의 사유물로 만들었던 괴물. 그가 한성 측의 대리인으로 정식 등판했다는 경고였다. 그것도 차기 법무부장관 임용이라는 무시무시한 권력을 등에 업은 채로.

"강태혁, 왜 그래? 얼굴색이 안 좋아."

혜령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태혁의 어깨를 잡았다.

태혁은 붉게 물든 망막 너머로 떠오른 백승현의 이름을 노려보았다.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아주 거물급 사냥감이 걸려들었네요."

태혁이 눈을 번뜩이며 고소장을 움켜쥐었다.

"판이 아주 제대로 커졌습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