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목덜미에 닿은 서늘한 칼날이 살을 지그시 눌렀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한 줄기 뜨거운 핏방울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최창식의 거친 숨결이 태혁의 얼굴에 그대로 닿았다. 짐승의 그것과 다름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냥개의 살기였다.

하지만 태혁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눈앞의 칼날이 아니었다. 그의 망막 위에 붉은빛으로 점멸하는 리갈 레저의 실시간 장부창이었다.

[경고: 인과율 오차율 18% 돌입] [대상: 최창식의 파트너 황 형사를 살해한 도원회 소속 행동대장 '독사' 외 3명] [현재 위치: 서울 강남구 역삼동 823-4 지하 1층, 최창식의 임시 거처로 이동 개시]

태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오히려 목을 가볍게 뒤로 젖히며 최창식의 핏발 선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강남구 역삼동 823의 4, 지하 1층."

최창식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칼끝이 가죽 시트를 깊게 파고들었다.

"……뭐라풍?"

"당신이 기어 들어가려던 그 구석진 쪽방 말입니다. 지금 그곳으로 도원회의 사냥개들이 출발했습니다. 행동대장 '독사'를 포함해서 넷입니다. 도착 예정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이십오 분 뒤."

태혁은 시계를 흘낏 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내 목을 따는 건 자유지만, 그 순간 당신은 평생 파트너를 죽인 진짜 범인들의 얼굴조차 구경하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처박히게 될 겁니다. 선택하십시오. 나를 죽이고 삼십 분 뒤에 그놈들에게 개죽음을 당할지, 아니면 내 손을 잡고 그놈들의 목줄을 직접 쥘지."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지?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최 형사님. 아니, 최창식 씨. 일 분 일 초마다 당신의 복수 기회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중이란 뜻입니다."

태혁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떨림도 없었다. 도리어 칼을 쥔 최창식의 손에 땀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최창식은 태혁의 눈동자 속에서 기이한 확신을 읽었다. 저 미친 사법연수생의 눈에는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완벽하게 짜인 기계의 톱니바퀴 같은 냉혹함만이 들어차 있었다.

탁.

최창식이 허탈하게 손을 내렸다. 단도가 조수석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는 피가 섞인 침을 차창 밖으로 뱉어내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짜 정보기만 해봐. 네놈 대가리부터 쪼개버릴 테니까."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요. 살아남거든, 다시 연락하십시오. 내 제안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습니다."

태혁은 미련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밤공기가 목덜미의 핏자국을 서늘하게 식혔다. 그는 손수건으로 목에 흐른 피를 닦아내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최창식의 차량을 응시했다. 사냥개는 이미 덫에 발을 들여놓았다.

***

사흘 뒤, 사법연수원 대강당 본관 402호.

그곳은 평범한 강의실이 아니었다. 연수원 교무위원회가 주관하는 김종식 교수의 '면직 및 징계 공판' 심의장이었다. 법조계의 예비 엘리트들이 모이는 연수원 내부의 재판이나 다름없는 자리.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공판장 안은 이미 수십 명의 연수생과 교수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태혁, 진짜 괜찮은 거야? 저쪽 라인업 보통이 아니야."

자료를 한 아름 안은 민혜령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태혁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피고인석에는 김종식 교수와 함께 어깨가 떡 벌어진 중년의 사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국내 최대 규모이자 도원회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로펌, '법무법인 광평'의 대표 변호사 남궁현이었다. 그 뒤로는 세 명의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들이 철갑을 두른 듯 버티고 서 있었다. 연수생의 내부 징계 공판에 대형 로펌의 대표가 직접 등판한 것이다. 이것이 도원회가 보여주는 무언의 압박이자 권력이었다.

김종식은 이미 승기를 잡았다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징계위원회 위원장님."

남궁현 변호사가 수천만 원짜리 맞춤 정장의 단추를 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법정을 장악하는 베테랑 특유의 깊은 울림이 있었다.

"본 피고인, 김종식 교수에 대한 징계 청구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와 일부 연수생들의 악의적인 모함에 기반한 것입니다. 특히 징계 청구인 측의 주동자인 강태혁 연수생은 피해 당사자도 아닐뿐더러, 학칙 및 변호사법상 타인의 징계 절차에 정식 대리인이나 소송 당사자로 참여할 자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 연수원 규정 제14조에 의거하여, 강태혁 연수생의 변론 자격을 박탈하고 이번 심의를 즉각 기각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웅성거림이 심의장을 가득 채웠다. 민혜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 자격 시비로 나오는구나……. 우리가 직접 소송을 제기한 게 아니라 징계위원회에 고발한 형태라, 대리 법률단이 쳐내면 법적으로 버틸 수가 없어."

혜령이 다급하게 속삭였지만, 태혁은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그는 서류 가방에서 노란색 재생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2화에서 김종식의 연구실을 이 잡듯 뒤져 확보했던, 한성그룹 비자금 세탁용 유령회사 '진안정밀'의 거래 흔적이 담긴 비밀 메모였다.

태혁이 천천히 교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구두 굽 소리가 사방에 무겁게 울렸다.

"남궁현 변호사님. 법무법인 광평이 피고인 김종식을 변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단순한 수임 계약에 따른 것입니까, 아니면 공범으로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함입니까?"

"뭐라고?"

남궁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말을 삼가시오, 강태혁 연수생! 우리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피고인의 방어권을 대리할 뿐이오."

"적법한 절차라."

태혁이 노란 메모지를 허공에 들어 보였다.

"여기 제가 들고 있는 서류는 지난 3년간 한성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한성물산이 유령회사 '진안정밀'을 통해 세탁한 비자금의 흐름도입니다. 그리고 이 장부의 우측 하단, 매 분기 정기적으로 이체된 '법률 컨설팅 비용'의 수신처를 보시죠."

태혁은 메모지를 교무위원장과 남궁현의 책상 위에 동시에 턱 하니 내려놓았다.

"수신처는 법무법인 광평. 계좌번호 국민은행 402-XXXX. 예금주, 남궁현."

순간 남궁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들이 일제히 동요하며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이, 이건 단순한 자문료일 뿐이오! 법무법인이 기업으로부터 자문료를 받는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이오?"

남궁현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태혁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압도적인 높이에서 내리누르는 포식자의 시선이었다.

"단순 자문료인데, 하필이면 기획재정부에 신고되지 않은 페이퍼 컴퍼니 '진안정밀'의 차명 계좌에서 송금되었습니까? 게다가 송금 일자는 한성그룹 한도준 부회장이 비자금을 조성해 도원회 소속 판·검사들에게 인사 청탁을 넣은 날짜와 정확히 일치하는군요."

태혁은 징계위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목소리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법정을 울렸다.

<center>변호사법 제34조(변호사 아닌 자와의 동업 금지 등)<br>법무법인의 구성원 또는 변호사는 동업을 통해 취득한 범죄 수익을 은닉하거나 세탁하는 행위에 관여해서는 아니 되며, 이를 위반할 시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center>

<center>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3조(알선수재)<br>공무원의 직무에 속하는 사항의 알선에 관하여 금품이나 이익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한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center>

"법무법인 광평은 피고인 김종식을 대리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피고인과 함께 대기업의 비자금을 세탁하고 사법부를 오염시킨 '공범'이자 수사 대상일 뿐입니다. 변호사법 제34조 및 특경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당장 긴급체포되어야 할 자들이, 감히 사법의 신성한 징계 법정에서 대리인 자격을 운운합니까?"

태혁의 벼락같은 일갈에 심의장은 얼어붙었다.

김종식은 사들인 은신처가 무너지는 것을 보듯 입을 벌린 채 부르르 떨었다. 남궁현의 손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태혁이 제시한 메모에 적힌 계좌번호와 송금 내역은 광평 내부에서도 극비 중의 극비로 취급되던 기밀이었다. 회귀 전, 해결사 변호사로 일하며 도원회의 자금 세탁 구조를 뼛속까지 파악하고 있던 태혁이었기에 가능한 일격이었다.

"이…… 이 자식이 감히……!"

남궁현이 이를 갈았지만, 태혁의 공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남궁 변호사님. 지금 이 심의장 밖에는 제가 미리 연락해 둔 서부지검 특수부 검사들이 대기 중입니다. 계속해서 김종식의 대리인 자격을 주장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광평 본사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집행에 즉각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완벽한 외통수였다.

여기서 버티다가는 법무법인 광평 전체가 공중분해 될 판이었다. 남궁현은 뒤에 선 부하 변호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이미 공포가 서려 있었다.

"……수임 철회하겠다."

남궁현이 피가 솟구치는 목소리로 간신히 뱉어냈다.

"뭐, 뭐라고요? 남궁 변호사! 이봐요!"

김종식이 비명을 지르며 남궁현의 소매를 붙잡았으나, 남궁현은 거칠게 그 손을 뿌리쳤다.

"우리 법무법인은 본 사건의 대리인 자리에서 자진 사임합니다. 위원장님, 퇴정을 허가해 주십시오."

남궁현은 태혁을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본 뒤, 서류 가방을 챙겨 허겁지겁 심의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들의 발걸음은 도망치는 패잔병과 다름없었다.

막대한 자금력과 전관예우의 방패를 앞세워 공판을 무력화하려던 도원회의 첫 번째 카드가 완전히 찢겨 나간 순간이었다.

민혜령은 멍하니 태혁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적의 부패를 드러내기 위해 똑같이 불법에 가까운 사적 정보와 비자금 내역을 무기로 흔드는 태혁의 방식. 그것은 그녀가 평생 배워온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독할 정도로 사악하고, 소름 끼치도록 효율적인 이독제독(以毒制毒)의 기술.

하지만 그 무자비함이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는 혜령의 심장을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법의 한계를 비웃는 거대 악을, 더 잔인한 법의 칼날로 도륙하는 태혁의 모습에 그녀는 본능적인 경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강태혁…… 너는 진짜 악마구나."

혜령의 나직한 혼잣말에 태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교무위원장을 향해 차갑게 선언했다.

"방어권 대리인이 사라졌으니, 피고인 김종식에 대한 파면 및 형사 고발 건의 표결을 즉시 진행해 주십시오."

표결은 순식간에 끝났다. 결과는 만장일치 파면.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에 의해 김종식의 손목에 쇠붙이가 채워졌다.

"이놈들! 감히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한성그룹이, 도원회가 너희를 가만둘 것 같으냐!"

김종식이 수갑을 찬 채 광분하여 절규했다. 교단 바닥을 긁으며 끌려 나가는 그의 모습은 추하기 짝이 없었다.

태혁은 그 모습을 냉정하게 지켜보며 서류를 정리했다. 첫 번째 사냥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기쁨은 없었다. 이것은 거대한 전쟁의 서막일 뿐이니까.

철컥.

심의장의 웅장한 뒷문이 천천히 열렸다.

끌려 나가던 김종식의 비명이 순간 뚝 끊겼다. 가쁜 호흡을 몰아쉬던 연수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가로 향했다.

그곳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단된 차콜 그레이 슈트. 그리고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마치 흥미로운 연극을 관람하러 온 관객처럼 여유로운 태도.

한성그룹의 유력한 후계자이자, 도원회의 실질적인 자금줄.

한도준이었다.

그는 끌려 나가는 김종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잔인하리만치 차가운 눈동자는 오직 단 한 사람, 교단 앞에 선 강태혁만을 꿰뚫고 있었다.

도준의 입꼬리가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것은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핏빛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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