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구구구궁-!

대공성 전체가 거대하게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사악한 파열음이 연회장의 격자 유리창을 사정없이 두들겨 깨부수었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샹들리에의 촛불 빛을 받아 은빛 은하수처럼 허공에 비산했다.

실비아가 입고 있던 오프숄더 형태의 진홍빛 실크 드레스 자락이 매서운 후폭풍에 사정없이 펄럭였다. 드레스 가장자리를 장식한 은백색 레이스가 먼지바람에 흩날려 뺨을 거칠게 때렸다. 목에 단단히 감겨 있던 부드러운 검은 벨벳 초커가 가쁜 호흡을 따라 숨통을 조여왔다. 가슴팍에 달린 눈물 모양의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날카로운 빛을 반사했다.

눈앞에 새빨간 경고창이 망막을 찌를 듯이 솟구쳐 올랐다.

[!!!비상 상황 발생!!!] [북부의 핵심 동력인 ‘검은 빙벽 기둥’이 파괴되었습니다!] [마수들의 봉인이 해제되며, 전례 없는 마수 습격이 시작됩니다!] [대규모 마력 폭주로 인해 데온의 집착도가 급격히 요동칩니다!]

“이, 이게 무슨 소란이냐!” “빙벽이 무너졌다! 북부의 빙벽이!”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황태자 루벤이 퇴각하는 척하며 뒤로 누른 통신기의 불빛은 이미 꺼져 있었지만, 실비아의 매서운 눈동자는 그의 비열한 입꼬리에 걸린 조소를 놓치지 않았다. 루벤은 가증스럽게도 이 혼란을 틈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출구로 빠져나가려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딜 가십니까, 황태자 전하?”

실비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비명과 잔해 무너지는 소리를 뚫고 연회장을 얼려 붙였다.

“라벨 영애, 지금은 이 괴물들의 소굴에서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다. 황족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 무법천지에 내가 머무를 이유는 없지.” “탈출이라니요. 전하께서 손수 지르신 불인데, 구경만 하고 가시기엔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를!”

루벤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지만, 실비아는 이미 [호감도 트레이딩] 시스템창을 허공에 활짝 펼쳐 든 상태였다. 그녀의 손끝이 허공을 매끄럽게 훑었다.

“허무맹랑한지 아닌지는 이 장부가 증명하겠죠. 시스템 로그, 전송.”

팅-!

맑은 종소리와 함께, 대공성 연회장 허공에 거대한 마력 홀로그램이 반사판처럼 넓게 펼쳐졌다. 그것은 실비아가 지난 3화에서 가문 압류관들의 기밀 장부에서 통째로 해킹해 횡령해 두었던, 황실 비선 기구의 은밀한 장부 로그였다.

[장부 코드: RX-909 황실 비밀 세출 내역] [집행 목적: 라벨 공작가 파멸 유도용 위조 국채 발행 및 위조 인장 주조] [최종 승인자: 루벤 폰 바이마르]

“저, 저게 무엇이냐……?” “황실의 비선 인장? 그렇다면 우리가 들고 있던 라벨 가의 채권이 전부 황태자 전하가 위조한 가짜였단 말인가?”

연회장에 모여 있던 북부의 영주들과 채권 귀족들의 눈이 뒤집혔다. 실비아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제국의 황태자라는 분이 사적으로 위조 국채를 발행해 귀족의 영지를 강탈하려 한 것도 모자라, 북부의 비자금을 노리고 빙벽까지 폭파해 마수들을 불러들이다니요. 이 장부 로그의 원천은 황실 중앙 은행의 마도 기록입니다. 조작 불가능한 절대적 물증이죠.”

“실비아 드 라벨……! 네년이 감히 황실을 모독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루벤이 검을 뽑아 들려 했지만, 이미 주변을 에워싼 북부 기사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못해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진정한 반역자는 대공 하이드리히가 아니라, 사욕을 위해 북부의 대장벽을 무너뜨린 황태자 루벤 자신이었음을 만천하가 알게 된 순간이었다. 위조 국채의 음모가 완벽하게 폭로되며 루벤의 발목은 완전히 묶였다.

쿠구궁! 콰르릉!

그때, 성 외곽에서 다시 한번 고막을 찢는 듯한 이질적인 폭음이 울렸다. 검은 빙벽 한 귀퉁이가 완전히 무너지며, 그 틈새로 검붉은 오염 마력과 함께 서리가 낀 기괴한 형상의 마수들이 떼를 지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북부의 차가운 대기를 타고 흐르는 독소는 피난민들과 영지민들이 모여 있는 하성(下城)을 향해 급속도로 비산했다.

“으아악! 마수다! 마수가 몰려온다!” “살려 줘! 아이가 아직 저 아래에 있어!”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칠흑 같은 오염 마력이 대지를 잠식해 들어가는 광경은 영지민들에게 종말의 공포를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비서실장 펠릭스 에스토바 경.” 실비아가 급박하게 흐르는 상황 속에서도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보좌관을 불렀다. 펠릭스는 잔뜩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라벨 영애.” “지금 당장 하성의 방어 보조 마도진을 가동하세요. 그리고 영지 창고에 잠자고 있는 고순도 마력 결정 3,000석을 전부 최전방 방벽으로 이송시킵니다.” “미쳤습니까? 그 결정들은 대공가의 가을 결산을 위한 핵심 자산입니다! 그걸 지금 다 써버리면 재정 적자가……!” “돈이 아깝습니까, 목숨이 아깝습니까? 영지민이 전부 죽어나가면 대공가의 세수는 누가 채워 넣을 건데요? 낭비되는 마력 소모율을 정확히 15% 이하로 통제할 테니, 제 계산대로 움직이세요!”

펠릭스는 실비아의 가차 없고도 정밀한 숫자의 명령에 순간 숨을 들이켰다. 평소 회계 사기꾼으로 의심했던 그녀의 눈동자에는 오직 자산의 가치와 생존을 위한 냉철한 광채만이 빛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영애의 계산을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요.” 펠릭스가 급히 영지 기사들을 이끌고 동력실로 달려갔다.

그 순간, 연회장 문을 박차고 거친 철갑 소리를 내며 뛰어 들어온 남자가 있었다. 실비아의 철부지 오빠, 카셀 드 라벨이었다. 그의 머리칼은 땀과 먼지로 엉망이었지만, 손에 쥔 검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실비아! 무사했구나!” “오라버니? 여긴 왜 들어온 거예요? 대피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대피하겠느냐! 네가 이 북부에서 피땀 흘려 모은 우리 가문의 은퇴 자금…… 아니, 가문의 영광과 네 목숨이 여기 걸려 있는데!”

카셀의 외침에 실비아는 이마를 짚었다. ‘내 5,000골드 비밀 세탁 자금을 지키겠다는 소리구나. 기특한 고기방패 같으니라고.’

“실비아, 널 위해 이 오라비가 난생처음으로 목숨을 걸어보련다! 가문의 이름으로, 저 괴물 놈들의 대가리를 전부 깨부수고 올 테니 넌 뒤에서 안전하게 장부나 정리하고 있거라!” “오라버니, 개죽음당하러 가겠다는 소리는 길게 하지 마세요.” “개죽음이라니! 이 카셀 드 라벨의 검술을 얕보지 마라! 무장 기동대, 나를 따르라! 동생의 은퇴 자금을…… 아니, 북부의 방어선을 수호한다!”

카셀이 고함을 지르며 무나무나 뛰어 나갔다. 놀랍게도 그의 허세 가득한 돌격은 북부의 하급 기사들과 피난민들에게 묘한 전염성을 발휘했다. 겁에 질려 있던 기사들이 카셀의 뒤를 따라 성벽의 무너진 틈새로 달려가 인간 방패를 자처하며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막아라! 대공비 전하와 우리 영지를 수호하는 거다!” “와아아아!”

영지민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치려던 황태자가 아닌, 목숨을 걸고 전방으로 뛰어드는 라벨 가문의 기사들과 냉철하게 전황을 지휘하는 실비아를 보며 진정한 수호자가 누구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까드득, 퍼버벅!

성벽 아래에서 마수들의 발톱이 기사들의 방패에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카셀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도 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마수의 목을 벴다. 겉보기엔 우스꽝스럽고 엉성했지만, 그의 헌신은 분명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실비아는 6화에서 펠릭스가 자신에게 건넸던 계약서를 떠올렸다. ‘펠릭스, 당신이 내가 북부의 재정을 갉아먹는 줄 알고 계약서 양도 조항에 심어둔 그 치명적인 재정 독소 파기권…….’ 그 독소 조항은 빙벽의 정화율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실비아가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한다는 조항이었다. 하지만 실비아의 머릿속 주판알은 이미 다른 계산을 끝마치고 있었다. ‘그 독소 조항마저도 결국 내 횡령 자금의 완벽한 거름이 될 거야. 이 빙벽을 단순한 얼음벽이 아니라 고순도 마력 정화 광산으로 변환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실비아는 [호감도 트레이딩]의 스캔 기능을 활성화해 무너져 내리는 검은 빙벽의 마력 파동을 추적했다.

파자작, 키이이잉-!

시야에 가득 찬 푸른빛의 수치들이 어지럽게 회전했다. 빙벽에 누적된 고대 마력 파동을 조사하던 실비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건…….”

[경고: 시스템 상세 정보 해금] [하이드리히 가문의 고대 혈인(血人) 계약 정보] [트리거명: ‘빙벽의 혈류 핵’] [설명: 검은 빙벽의 핵심 동력원은 하이드리히 가주의 심장과 마력으로 동기화되어 있습니다. 빙벽이 파괴되거나 오염될 경우, 가주의 혈관 속에 흐르는 마력이 역류하여 육체를 안에서부터 파괴합니다.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가주가 자신의 피를 직접 빙벽의 핵에 바쳐 수명을 깎아내는 ‘혈인 개방’을 단행해야 합니다.]

실비아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2화에서 시스템창을 통해 훔쳐보았던 그 비밀 정보의 진실이 바로 이것이었다. 데온이 왜 그토록 이성을 잃고 미친 괴물처럼 폭주하는지, 왜 북부의 빙벽이 무너질 때마다 피비린내를 풍기며 전장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잔혹한 해답.

“미친 고대인 놈들…….” 실비아가 나직하게 욕설을 뱉었다. “감히 내 가장 가치 있는 유동 자산의 몸뚱이에 이딴 비효율적인 자학적 노예 계약을 걸어두다니.”

쿠오오오오-!

연회장 중앙에서 폭풍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데온 폰 하이드리히였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마력은 이미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의 눈동자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드러난 핏줄이 살갗 위로 검게 도드라져 있었다.

“데온!” 실비아가 그를 불렀지만, 데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본능적인 살의와 수호의 의무만을 남겨둔 채, 마수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무너진 빙벽의 심장부를 향해 홀로 몸을 날렸다.

“실비아.” 그가 멀어지기 직전, 아주 찰나의 순간 뒤를 돌아보며 낮게 속삭였다. 피비린내 섞인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도망쳐. 내가 이곳을 전부 쓸어버릴 때까지…… 날 보지 마.”

쉬이이익-!

검은 그림자가 폭풍처럼 대공성 광장을 가로질렀다. 데온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수들의 육편이 사방으로 튀며 검은 피가 눈밭을 적셨다. 그것은 전투라기보다는 처절한 피의 광무(狂舞)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몸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혈인 계약의 트리거가 작동하여 심장이 안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한계 마력을 폭증시켜 마수들을 산산조각 냈다.

“대공 전하께서 홀로 싸우고 계신다!” “우리가 대공가를 지켜야 한다!”

광장에 모인 영지민들과 기사들은 데온의 처절한 투쟁을 보며 함성을 질렀다. 황실의 억압 속에서 자신들을 지켜준 유일한 군주가 누구인지, 그들의 역동적인 믿음이 광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실비아는 그 장엄하고도 끔찍한 광경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데온의 검붉은 마력이 빙벽의 무너진 핵과 공명하며 푸른 스파크를 일으킬 때마다, 그녀의 시스템창에 표시되는 호감도와 집착 수치가 미친 듯한 속도로 폭등하기 시작했다.

[데온 폰 하이드리히의 집착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85%…… 89%…… 93%……!]

“데온, 제발 적당히 해……!” 실비아가 성벽 난간을 붙잡고 소리쳤다. 하지만 살육의 소용돌이에 갇힌 괴물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의 검이 마지막 마수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 데온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한 움큼 울컥 쏟아져 나왔다.

털썩.

데온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주변에는 도륙당한 마수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팍에서 피어오르는 검붉은 마력 불꽃은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 직전의 위험한 진동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실비아의 시야 전체가 피보다 붉은 경고등으로 가득 찼다.

[!!!경고!!!] [데온 폰 하이드리히의 집착도가 임계점(100%)에 육박했습니다!] [현재 집착도: 99%] [오버히트 진정 퀘스트가 강제 발동합니다!] [제한 시간 내에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마력을 정화하지 못할 경우, 시스템 과부하로 인해 두 사람은 영혼째 동반 소멸합니다.]

[동반 소멸까지 남은 시간: 10초] [9……] [8……]

숨이 멎을 듯한 카운트다운이 실비아의 망막 위에서 잔인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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