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반역자의 딸을 당장 법의 이름으로 사형 대위에 올려라!”

루벤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시뻘건 황제의 직인이 찍힌 체포 집행장이 허공에서 거칠게 펄럭였다. 사방을 포위한 황실 친위대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자, 서슬 퍼런 칼날들이 연회장의 화려한 마법 조명을 받아 번뜩였다. 살을 에는 듯한 살기가 연회장을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만들 기세였다.

하지만 그 칼끝의 중심에 선 실비아 드 라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걸친 칠흑빛 벨벳 드레스의 자락이 우아하게 쓸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드레스의 가슴팍을 장식한 촘촘한 사파이어 브로치가 기사들의 살기 어린 검빛을 반사하며 차갑게 빛났다.

실비아는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비즈니스 파트너를 대할 때나 지을 법한 매끄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머나, 전하. 흥분하셔서 목소리 톤이 지나치게 올라가셨네요. 성대결절이라도 오시면 제국의 큰 손실일 텐데 말이죠.”

“실비아 드 라벨! 지금 이 엄중한 상황에서도 그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반역죄의 증거가 황제 폐하의 직인과 함께 내 손에 들려 있거늘!”

루벤이 핏대를 세우며 집행장을 실비아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그 기세에 뒤에 서 있던 오라비 카셀이 겁에 질려 실비아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영지 공금을 날려 먹은 고기방패치고는 참으로 일관성 있는 나약함이었다.

실비아는 가볍게 카셀의 손을 떼어내고는, 품속에서 새하얀 실크 장갑을 꺼내 천천히 꼈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손가락 끝을 정돈하며 입을 열었다.

“황실 사법 규범 제4조 2항을 기억하십니까, 전하?”

“……무슨 헛소리냐!”

“황실의 직속 명령이라 할지라도, 작위를 가진 대귀족 가문을 반역죄로 즉각 처형하거나 구금하려 할 때, 피의자는 법적으로 보장된 ‘3단계 반론권’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수사 과정의 왜곡이나 황실의 독단을 방지하기 위해 초대 황제께서 제정하신 초법적 구제책이지요.”

실비아의 시선이 황태자의 뒤편에 서 있는 북부의 재정 보좌관, 펠릭스 에스토바에게 향했다. 펠릭스는 냉철한 회계사이자 절차주의자였다. 거짓과 비효율을 극도로 혐오하는 그가 이 순간 침묵할 리 없었다.

“펠릭스 경. 제 말이 틀렸습니까? 북부 대공가의 수석 보좌관으로서, 제국법에 명시된 이 정당한 절차를 황태자 전하께서 무시하도록 방관하실 건가요?”

펠릭스는 안경테를 소리 나지 않게 밀어 올렸다. 그의 예리한 눈동자가 실비아와 루벤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라벨 영애의 말이 맞습니다, 전하. 사법 규범 제4조 2항에 의거, 대공성 내에서 집행되는 모든 황명은 피의자가 3단계 반론을 완수하기 전까지 그 집행이 일시 유예됩니다. 이를 무시하고 검을 뽑는다면, 그것은 북부의 자치권을 침해하는 선전포고로 간주하겠습니다.”

“펠릭스! 감히 네놈이 대공을 믿고 내게 대적하겠다는 거냐!”

“저는 법과 숫자를 따를 뿐입니다.”

펠릭스의 단호한 선언에 황실 기사들의 검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루벤은 이를 갈며 실비아를 쏘아보았다.

“좋다! 하찮은 말장난으로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심산이구나. 해 보아라! 네까짓 년의 얄팍한 세 혀로 이 완벽한 혐의를 어찌 벗어날지 구경해 주지!”

실비아는 생긋 웃었다. 드디어 판이 깔렸다. 상대가 쳐놓은 거미줄을 통째로 뜯어내고, 그 거미줄로 상대의 목을 조를 완벽한 판돈이 그녀의 머릿속 시스템 창에서 실시간으로 계산되고 있었다.

[띠링! 퀘스트: ‘3단계 반론으로 황태자 루벤을 격파하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성공 보상: 황실 비자금 흐름도 추적 권한 해금, 은퇴 자금 세탁 안전도 +30%] [실패 패널티: 반역죄 적용으로 가문 몰락 및 단두대 처형 엔딩 강제 집행]

‘자, 그럼 첫 번째 카드부터 가 볼까.’

실비아는 우아하게 허리를 굽혀 품속에서 가죽으로 장정된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그녀가 회귀한 직후인 제3일, 황실 압류관들의 이면 장부를 해킹하고 대조 복사해 두었던 황실 비선 기구의 위조 국채 인장 원천 서류였다.

“1단계 반론, [물증 폭로]입니다.”

실비아는 서류철을 황태자의 발밑으로 툭 던졌다. 툭, 하는 무심한 소리와 함께 가죽 철이 열리며 화려한 황실 문양이 찍힌 위조 국채 견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하? 제 오라버니가 북부 영토를 침범하고 가문 공금을 날려 먹게 만든 그 매력적인 투자 사기극의 원천, 바로 황실 비선 기구에서 직접 발행한 국채입니다. 참 신기하죠?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발행했다는 국채의 일련번호와 인장의 미세한 마모도가, 전하의 비선 금고에서 관리하는 사적 인장의 마모도와 100% 일치하더군요.”

“이, 이건……!”

“여기 적힌 장부 로그를 보십시오. 3화에서 제가 압류관들의 가방에서 확보한 로그와 대조한 결과, 이 위조 국채는 제 오라버니가 사기를 당하기 정확히 사흘 전에 전하의 최측근인 재무관의 서명 하에 사적으로 인쇄되었습니다. 즉, 전하께서는 애초에 우리 라벨 가문을 반역죄로 엮어 전 재산을 압류하기 위해, 사적으로 가짜 돈을 제조해 덫을 놓으신 겁니다.”

연회장에 모인 북부 영주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황태자가 직접 위조 국채를 찍어 귀족 가문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황실의 신용은 바닥을 치는 수준이 아닌가!”

루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다급하게 비선 수행원을 바라보았으나, 수행원은 이미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음해다! 그딴 위조 서류 몇 장으로 나를 기소하려 들다니!”

“아직 놀라시긴 이릅니다.”

실비아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흔들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2단계 반론, [편익 대조]로 넘어가죠.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실비아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마치 연출된 것처럼, 보좌관 펠릭스가 들고 있던 대공가의 재정 장부가 빛을 발했다. 실비아가 미리 심어둔 시스템 마법의 연동이었다.

“라벨 가문이 파멸하여 황실에 압류당할 경우, 황실이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유동 자산은 약 15,000골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가문이 유지되면서 북부 하이델그라드와 연계해 창출하는 마력 광산의 순결한 세금 가치는 매년 최소 80,000골드에 달하죠. 펠릭스 경, 제 계산이 틀렸습니까?”

펠릭스는 서류를 훑어보더니,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확합니다. 라벨 가문의 파산은 오히려 제국 전체의 마력 자원 유통망을 마비시켜, 황실 재정에 연간 12%의 직접적인 세수 결손을 초래합니다. 한마디로, 황태자 전하의 이번 압류 시도는 제국의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 자기 주머니를 채우려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자해 공갈입니다.”

“자해 공갈이라니! 이 무례한 것들이 감히 황태자를 모욕하느냐!”

루벤이 칼을 뽑아 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연회장의 묵직한 오크 문이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문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것은 북부의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과, 그 바람보다 더 혹독한 피비린내였다.

“누가 내 성에서 칼을 함부로 놀리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연회장을 지배했다.

데온 폰 하이드리히.

그가 걸어 들어오는 순간, 그의 몸 주변으로 피처럼 붉고 어두운 검붉은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마력 폭주 1단계. 제어력을 잃어가는 괴물의 안광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 시선이 닿는 곳마다 기사들이 숨을 들이켜며 뒤로 물러섰다.

[경고! 정복 대상 ‘데온 폰 하이드리히’의 마력 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합니다.] [집착도: 52% -> 55%] [시스템 경고: 하이드리히 가문의 고대 혈인(血人) 계약 트리거가 작동하기 직전입니다. 데온의 폭주 에너지가 임계점을 넘을 경우, 강제 오버히트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실비아의 눈앞에 붉은 경고창이 어지럽게 명멸했다.

‘고대 혈인 계약의 약점…….’

실비아는 머릿속에 저장된 2화의 시스템 해금 정보를 빠르게 떠올렸다. 하이드리히 가문의 핏줄에 흐르는 괴물 같은 힘은, 계약자가 자신의 피를 매개로 상대의 생명력을 완벽히 구속하고 속박할 때만 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즉, 그가 폭주하는 이유는 자신을 온전히 구속해 줄 ‘주인’이자 ‘닻’이 없기 때문이었다.

실비아는 데온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살의와 함께, 자신을 멈춰 세워 달라는 지독한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

실비아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대치하는 공기 속에서, 그녀는 실크 장갑을 벗어 던지고 맨손으로 데온의 차가운 뺨을 쓸어내렸다.

“데온.”

그녀의 부드럽고도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실비아는 자신의 손가락끝을 살짝 깨물어 붉은 피 한 방울을 그의 입술에 문질렀다.

[트리거 발동: 고대 혈인(血人) 계약의 해제 및 재귀속 조건 충족.] [실비아 드 라벨의 피를 매개로 한 마력 동조화가 시작됩니다.] [데온의 폭주 상태가 진정됩니다. 집착도가 55%에서 58%로 상승합니다!]

순간, 데온의 몸을 뒤덮고 있던 광포한 검붉은 마력이 마치 주인을 찾은 맹수처럼 실비아의 손바닥 아래로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그의 숨소리가 한결 차분해졌고, 붉게 충혈되었던 눈동자에 맑은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데온은 자신의 뺨에 닿은 실비아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움켜쥐며, 입술에 묻은 그녀의 피를 느리게 핥아 올렸다. 그의 입꼬리가 기괴하리만치 아름답게 휘어졌다.

“나를 길들이는 법을 아주 잘 아는군, 나의 영리한 횡령범.”

“비즈니스를 하려면 이 정도 서비스는 기본이죠, 대공 전하.”

두 사람 사이의 은밀한 티키타카에 루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괴물이라 불리던 데온이 고작 여자 하나에게 완벽히 통제당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데온은 실비아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차가운 시선으로 루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피에 젖은 가죽 장부 하나를 꺼내 단상 위로 툭 던졌다.

가죽 장부가 바닥에 부딪히며 무거운 소리를 냈다.

“3단계 반론, [치명적 변칙]이다.”

데온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연회장 전체를 압도하는 무게감이 있었다.

“그 장부는 황태자 루벤, 네놈이 북부 하이드리히 가문을 말살하기 위해 국경 지대의 불법 용병단 ‘붉은 늑대’에게 직접 군사 자금을 결제한 극비 군사 결제 장부다. 그 용병들의 목을 베고 직접 회수해 왔지.”

“이, 이익……!”

“제국의 황태자가 사적으로 위조 국채를 발행해 귀족의 재산을 강탈하려 한 것도 모자라, 북부의 영토를 침범하기 위해 불법 용병단까지 매수했다라.”

데온이 루벤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루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렸다.

“이 사실이 제국 의회와 전 영주들에게 폭로된다면, 과연 황태자 전하의 그 고결한 왕관이 무사히 머리 위에 얹혀 있을 수 있을까?”

완벽한 체크메이트였다.

실비아의 정교한 논리와 숫자의 압박, 그리고 데온이 가져온 치명적인 물증이 결합하여 황태자 루벤이 쳐놓았던 덫을 완벽하게 부수어 버렸다.

루벤은 부르르 떨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터질 듯 솟아올랐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자신은 반역을 꾀한 황태자라는 오명을 쓰고 황위 계승권마저 박탈당할 위기였다.

“……내 패배다.”

루벤은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체포 명령을 거두겠다. 친위대, 철수한다!”

루벤은 패배를 시인하며 급히 몸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북부의 가신들과 영주들은 그 비굴한 뒷모습을 보며 야유 섞인 시선을 보냈다. 완벽한 사이다이자, 실비아의 지략이 빛을 발한 승리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루벤의 뒷모습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의 뱀 같은 눈동자에 서린 광기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고 음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 나가던 루벤이 손을 슬쩍 뒤로 뻗어, 품속에 숨겨둔 마법 통신기 단추를 누르는 모습이 실비아의 예리한 눈에 포착되었다.

그는 아주 미세한 입 모양으로 통신기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당장, 하이델그라드의 동력 빙벽 기둥을 폭파해라. 이 성의 괴물들과 함께 모두 얼어 죽여 버려라.’

쿠구구구궁-!

그 순간, 대공성 전체가 거대하게 진동하며 바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성 외곽에서부터 들려오는 기괴한 파열음이 연회장의 유리를 날카롭게 흔들었다.

실비아의 눈앞에 새빨간 경고창이 미친 듯이 솟구쳐 올랐다.

[!!!비상 상황 발생!!!] [북부의 핵심 동력인 ‘검은 빙벽 기둥’이 파괴되었습니다!] [마수들의 봉인이 해제되며, 전례 없는 마수 습격이 시작됩니다!] [대규모 마력 폭주로 인해 데온의 집착도가 급격히 요동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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