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마력 결정 연성의 소문이 막 정가에 퍼지기도 전에, 황태자 루벤이 이끄는 황실 친위 사정단이 하이델그라드 관문에 비상 도착했다는 경보음이 성곽을 거세게 흔드는 순간.

실비아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옭아매듯 안고 있던 데온의 단단한 팔에서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녀가 입고 있던 깊은 청색의 벨벳 드레스가 서늘한 북부의 밤공기 속에서 스치며 사각사각, 기분 좋은 마찰음을 냈다. 칼라를 촘촘히 장식한 은빛 은여우 모피와 소맷단에 덧대어진 빳빳한 프랑스식 실크 레이스가 그녀의 차분한 움직임에 따라 파르르 흔들렸다.

“황태자라니, 참 부지런하기도 하셔라. 남의 집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라도 듣고 헐레벌떡 뛰어오신 걸까요?”

실비아는 소맷자락을 털며 입술을 삐죽였다. 머릿속의 장부 계산기는 이미 바쁘게 굴러가고 있었다. 황태자의 등장은 변수였지만, 변수는 곧 새로운 이윤 창출의 기회이기도 했다.

데온은 품 안이 허전해진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실비아의 잘록한 허리춤을 스쳤던 손가락을 느리게 쥐었다 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서린 열기가 아직 채 식지 않은 상태였다.

“내 영지에 쥐새끼들이 너무 자주 들이치는군. 싹 다 얼려서 빙벽의 밑거름으로 써 버릴까 하는데, 영애의 생각은 어떤가?”

“안 돼요, 전하. 쥐새끼도 잘만 말리면 훌륭한 가죽 공급원이 된답니다. 공짜로 굴러들어 온 자산인데 왜 그냥 버려요?”

실비아는 생긋 웃으며 데온의 가슴을 깃털처럼 가볍게 밀어냈다. 그리고는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집무실 문을 열고 나섰다.

* * *

대공성의 중앙 연회장은 순식간에 차가운 살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웅장한 대리석 기둥 사이로 황실 친위대의 금빛 갑옷들이 번쩍였다. 그 중심에는 금실이 사슬처럼 촘촘히 박힌 진홍색 브로케이드 코트를 걸친 사내, 황태자 루벤 폰 바이마르가 서 있었다. 백금발을 우아하게 뒤로 넘긴 그의 얼굴에는 가학적인 흥분과 오만함이 가득 차 있었다.

“북부 대공이 황실의 눈을 피해 반역자의 핏줄을 숨겨두고 있었다니, 참으로 눈물겨운 은닉극이로군.”

루벤은 연회장 한가운데에 서서 가죽 장갑을 낀 손을 가볍게 까딱였다. 그의 뒤에 선 사법 사정관이 기다렸다는 듯 두꺼운 양장 가죽으로 제본된 법령 조항을 촤르륵 펼치며 낭독하기 시작했다.

“제국 형법 제104조 및 황실 재정 특별법에 의거! 라벨 공작가는 황실 보조금을 조직적으로 탈루하고, 위조 국채를 발행하여 제국의 재정 근간을 흔들었으며, 나아가 북부 하이델그라드 대공가와 결탁하여 이적 행위를 도모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사정단은 즉각적인 가산 압류 및 용의자 체포를 명령하는바……!”

사정관의 목소리가 연회장의 높은 천장을 때리며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연회장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사내 하나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앞으로 나섰다. 실비아의 오라비이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지갑이자 방패막이인 카셀 드 라벨이었다.

“이, 이게 무슨 무엄한 짓인가! 나는 라벨 공작가의 후계자다! 위조 국채라니, 나는 그저 건전한 투자처를 소개받아 가문의 자금을 조금 굴렸을 뿐…… 윽!”

친위대 기사 하나가 카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누르며 바닥으로 밀쳐 버렸다. 카셀이 입고 있던 화려하지만 다소 헐렁한 실크 셔츠가 찍 찢어지며 볼품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악! 내 맞춤 셔츠가! 실비아! 실비아, 나 좀 살려다오!”

카셀은 꼴사납게 바닥을 기며 문가에 나타난 실비아를 향해 처절하게 손을 뻗었다.

실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보통의 누이라며 오라비의 비참한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며 눈물을 흘렸겠지만, 실비아의 뇌리에는 오직 한 줄기 빛나는 공식만이 스쳐 지나갔다.

‘고기방패 1호기 작동 개시. 감성 마케팅을 위한 가성비 최고의 소모품이 제 발로 굴러들어 왔네.’

실비아는 짐짓 세상에서 가장 비통하고도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사뿐사뿐, 그러나 단호한 발걸음으로 카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리고는 바닥에 쓰러진 카셀의 손을 꼭 쥐었다.

“오라버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요! 제국의 법과 질서를 수호해야 할 황실 친위대가, 아직 정식 재판도 청구되지 않은 귀족에게 이토록 야만적인 물리력을 행사하다니요!”

실비아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연회장을 찌르릉 울렸다. 그녀는 루벤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제국 형법 제34조 제2항에 따르면, 황실 사정단이라 할지라도 확정판결 전의 귀족을 신체적으로 구속하거나 모욕하는 것은 명백한 직권남용이자 황실의 권리 침해입니다. 우리 오라버니가 비록 귀가 얇고 사기는 좀 잘 당할지언정, 황실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순도 백 퍼센트의 순금과 같거늘! 어찌 이리 무도하게 다루시는 겁니까?”

“실비아……! 역시 나를 알아주는 건 너뿐이구나!”

카셀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실비아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실비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오라버니, 감동은 나중에 하시고 일단 불쌍한 척이나 더 하세요. 그래야 여론이 우리한테 유리하게 돌아가니까.’

루벤은 실비아의 당당한 태도에 눈썹을 실룩였다. 그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가소롭구나, 실비아 드 라벨. 천한 횡령꾼의 가시내 주제에 감히 내 앞에서 법을 논하는가? 네 오라비가 날려 먹은 15,000골드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줄 알았더냐? 라벨 가문은 이미 파산이다. 너 역시 반역자의 공범으로 이 자리에서 쇠고랑을 차게 될 것이다.”

루벤이 손짓하자 친위대 기사들이 실비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연회장 전체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콰르릉-!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암흑의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연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은식기들과 크리스탈 유리잔들을 순식간에 쩍쩍 소리를 내며 동결시켰다. 차가운 서리가 사방으로 튀며 기사들의 갑옷 표면을 하얗게 얼려 버렸다.

“내 성에서.”

나른하면서도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온 폰 하이드리히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우아하고도 위협적이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기 직전의 흉포한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때 실비아의 눈앞에 붉은색 경고창이 요란하게 깜빡였다.

[경고!] [대상 ‘데온 폰 하이드리히’의 마력 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합니다!] [황실 혈통의 살의 어린 언령에 반응하여, 고대 혈인(血人) 계약의 낙인이 활성화됩니다!] [집착도 및 폭주 수치: 85% - 위험 수위 돌파 중!]

데온의 목덜미를 따라 붉게 타오르는 고대의 기하학적 문양이 핏빛으로 선명해지고 있었다. 황실이 북부 대공가를 영원히 통제하기 위해 고대에 새겨둔 저주이자 구속구. 황태자 루벤의 도발적인 언령이 그 저주의 트리거를 사정없이 자극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비아의 머릿속에 2화에서 시스템 포인트 800을 주고 해금했던 정보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이드리히 가문의 고대 혈인 계약 상세 정보〉 - 약점: 황실의 마력적 언령에 노출 시 본능적인 살육 충동과 함께 마력이 강제 폭주함. - 트리거 해제 조건: 계약자가 지정한 ‘유동 자산적 가치’를 지닌 존재가 물리적 접촉을 통해 대공의 마력 파동을 자신의 장부(시스템)로 우회 정화할 것.

‘지금 여기서 데온이 폭주해서 황태자를 썰어버리면, 내 평화로운 은퇴 계획은 공중분해 된다. 5,000골드 세탁하기도 전에 반역죄로 목이 먼저 날아갈 거라고!’

실비아는 지체 없이 데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단단하고 차가운 오른손을 망설임 없이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푸른빛을 발하는 고순도 사파이어 반지가 데온의 뜨겁게 달아오른 살결과 맞닿았다.

‘시스템, 호감도 자산 500포인트 소모! 데온의 혈인 마력 우회 정화 가동!’

[띠링!] [자산 500포인트가 차감됩니다.] [우회 정화 프로토콜 작동!]

순간, 데온의 몸을 집어삼킬 듯 날뛰던 검붉은 마력이 실비아의 손길을 거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제된, 투명하고 날카로운 얼음의 마력으로 급격히 치환되었다.

파스스스-!

데온의 목덜미를 채우던 핏빛 낙인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내리며 사라졌다. 이성을 되찾은 그의 눈동자에 기묘한 희열이 서렸다. 실비아가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극상의 자극이었다.

데온은 실비아의 손을 깍지 껴 꽉 맞잡으며, 왼손을 가볍게 허공으로 뻗었다.

서걱-!

공기 중의 수분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형성된 거대하고 날카로운 얼음 검 한 자루가, 루벤의 코앞 1인치 직전까지 날아가 허공에 박혔다.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독의 한기가 루벤의 뺨을 스치며 미세한 핏방울을 만들어냈다.

“내 성에서, 내 여자에게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사냥개는 목을 쳐도 무죄다. 황태자라 해도 말이지.”

데온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연회장을 지배했다.

루벤은 頬에 닿는 차가운 한기에 소름이 돋는 듯 몸을 굳혔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오만함 뒤로 찰나의 공포가 스쳤다.

“데온……! 네놈이 감히 황태자인 내게 칼날을 겨누는 것이냐!”

“칼날이 아니라 얼음인데. 시력이 나쁘면 황실 주치의에게 안경이라도 맞추지 그래, 루벤 전하.”

데온은 나른하게 웃으며 실비아의 손가락을 찌릿찌릿할 정도로 강하게 얽어맸다.

그 대치 상황 속에서, 실비아의 예리한 시선은 루벤의 귀퉁이에 서 있는 비선 수행원의 품으로 향했다. 수행원의 가슴팍 주머니 틈새로 살짝 삐져나온 양장 가죽 영장의 모서리가 보였다.

그녀의 눈가에 황금빛 반짝뽀짝한 시스템 분석창이 내려앉았다.

[분석 대상: 황실 사법 사정단 수색 영장] [결함 포착 완료!] - 발행 날짜: 황제력 742년 4월 12일 - 실제 황실 인장 승인일 로그: 황제력 742년 4월 15일 - 특이 사항: 황실 비선 기구의 위조 인장을 사용해 날짜를 사흘 앞당겨 불법 조작함. (3화에서 획득한 ‘황실 비선 기구 위조 인장 장부 로그’와 100% 일치)

실비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녀는 데온의 손을 잡은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벨벳 드레스의 우아한 자락이 바닥을 쓸며 그녀의 지적 우아함을 배가시켰다.

“황태자 전하. 제국의 법과 질서를 그토록 숭상하시는 분께서, 어찌 이리 허술한 문서를 들고 오셨을까요?”

“뭐라?”

실비아는 루벤의 비선 수행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 수행원님, 품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계신 그 수색 영장 좀 이리 보여주시겠어요? 아니, 굳이 보여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 눈이 워낙 좋아서 날짜가 아주 똑똑히 보이거든요.”

실비아는 목소리를 한 톤 높이며 연회장의 모든 기사와 보좌관 펠릭스가 들을 수 있도록 명확하게 읊조렸다.

“그 영장에 찍힌 발행 날짜는 분명 4월 12일이군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황실 비선 기구의 공식 전자 장부 로그에 따르면, 해당 사정단의 인장이 최종 승인되어 효력을 발휘한 날짜는 4월 15일입니다. 즉, 전하께서는 아직 법적 효력도 발생하지 않은 영장을 사흘이나 앞당겨 ‘위조’하여 북부로 들이치신 겁니다.”

연회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보좌관 펠릭스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펠릭스는 즉각 품에서 자신의 휴대용 장부를 꺼내 실비아의 말을 검증하기 시작했다.

“이건 명백한 황실 사법 절차 위반이자, 공문서 위조죄에 해당합니다.”

실비아는 쐐기를 박듯 생긋 웃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이라도 있으셔서 영장을 미리 떼어 오신 게 아니라면…… 이건 북부 대공가를 모함하기 위해 급조된 ‘가짜 영장’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네요. 어머나, 제국 최고 권력자께서 이리도 어설픈 사기를 치시다니.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군요.”

“이, 이 년이……!”

루벤의 얼굴이 붉다 못해 흙빛으로 타 들어갔다. 그의 비선 수행원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영장을 품속 깊이 숨기려 했으나, 이미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무력 한 번 쓰지 않고, 오직 법과 숫자의 모순만을 짚어내 황태자의 기세를 완벽하게 꺾어버린 실비아의 지적 사이다에, 연회장에 있던 북부의 가신들 사이에서 나직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루벤은 그대로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그의 뱀 같은 눈동자가 잔혹한 광기로 번뜩였다.

“입을 잘도 놀리는구나, 실비아 드 라벨! 감히 황실의 권위를 이딴 말장난으로 훼손하려 들다니!”

루벤은 격분해 길길이 날뛰며, 품속에서 시뻘건 황제의 직인이 선명하게 박힌 최후 체포 집행장을 가차 없이 꺼내 들었다. 그것은 위조된 영장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는, 황제 직속의 친필 명령서였다.

“닥쳐라! 황제의 명이다! 이 반역자의 딸을 당장 법의 이름으로 사형 대위에 올려라!”

루벤의 고함과 동시에, 황실 친위대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살기를 뿜어냈다. 연회장의 공기가 다시 한번 팽팽하게 얼어붙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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