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즉각 인도하지 않으실 경우, 황실 중앙 기사단이 대공 전하의 수도 저택을 직접 포위할 것입니다! 또한, 라벨 공작가의 전 재산은 이 시간부로 황실 국고로 ‘강제 가압류’ 절차에 들어갑니다!”

사법관의 벼락같은 외침이 차가운 대리석 벽면을 두들기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탁자 위로 사정없이 내던져진 코발트빛 가압류 영장이 거칠게 펄럭였다. 황실 사법부의 날카로운 인장이 찍힌 종이 쪼가리는 마치 실비아의 목을 겨눈 단두대의 칼날처럼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실비아가 걸친 연한 라벤더빛 실크 드레스의 자락이 심문실의 음산한 바람에 스르륵살랑 흔들렸다. 소매 끝에 촘촘히 매달린 은빛 진주 사슬들이 짤랑이며 그녀의 심장 박동처럼 가쁘게 울렸다.

‘내 돈……!’

머릿속에서 붉은 경고등이 요란하게 깜빡였다. 피 땀 눈물 흘려가며 모은 은퇴 자금 5,000골드였다. 황태자의 개가 다 된 사법관 놈들의 손아귀에 고스란히 헌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비아의 가느다란 눈매가 차갑게 호선을 그렸다.

[위험! 황실의 강제 압류 마법으로 인해 호감도 트레이딩 계좌가 동결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돌발 시스템 퀘스트: ‘자산 세탁과 북부행 도주’ 시작!] [남은 시간: 23시간 59분]

“이,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리냐! 감히 황실의 사법관이라는 자들이 공작가의 가주 대리를 이리 무도하게 대우하다니!”

타이밍 좋게도 심문실의 무거운 철문이 벌컥 열리며, 요란법석한 목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황실 기사들의 제지를 뚫고 씩씩거리며 걸어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실비아의 친오빠, 카셀 드 라벨이었다. 늘어진 금발을 대충 쓸어 넘긴 그의 화려한 벨벳 코트는 먼지투성이였고, 얼굴은 억울함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실비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가장 훌륭하고 방패막이 역할에 충실한 고기방패가 제 발로 기어 들어온 꼴이었다.

“오라버니!”

실비아가 순식간에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며 가련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카셀의 소매깃을 붙잡으며 그의 등 뒤로 쏙 숨어들었다.

“저들이 라벨 가문의 명예를 짓밟고, 아버님이 남겨주신 소중한 자산마저 강탈하려 해요. 황실 법전의 기본 절차조차 무시한 채 말이여요!”

“뭐라? 감히 내 동생의 눈에서 눈물을 빼놓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카셀이 가슴을 팍 펴며 사법관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그의 얄팍한 명예욕이 실비아의 눈물 한 방울에 자극받아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된 순간이었다.

“사법관! 똑똑히 들어라! 황실 법전 제3장 12조에 의거하여, 공작가의 미회수 채권과 영지 사유 자산은 황실이 일방적으로 가압류를 선언할 수 없다! 정식 재판을 통한 판결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 어떤 마법적 봉인도 불법이란 말이다!”

“라벨 공자, 지금 황태자 전하의 재가를 얻은 특별 영장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사법관이 이마의 힘줄을 부르르 떨며 윽박질렀다.

“특별 영장이고 나발이고, 절차를 무시한 압류는 제국 헌법상 원천 무효다! 내 말이 틀렸느냐, 이 무식한 관리 놈들아!”

카셀이 침을 튀기며 기세를 올렸다. 실비아가 며칠 전 그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주입해 둔 법률 조항들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카셀은 자신이 대단한 법률 전문가라도 된 양 기고만장해 있었지만, 실비아에게 그는 단지 시간을 벌어줄 훌륭한 대변인에 불과했다.

사법관들이 카셀의 막무가내식 항의에 가로막혀 옥신각신하는 사이, 실비아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지금이야.’

그녀의 눈앞에 반짝이는 반투명한 푸른 창이 떠올랐다.

[호감도 트레이딩 시스템 활성화.] [보유 자산 횡령 및 세탁 모듈을 기동합니다.] [대상 타깃: 라벨 공작가 서부 제3광산 및 고대 마도서 보관소.]

실비아는 허리춤에 매달린 사파이어 브로치를 가만히 움켜잡았다. 차갑고 단단한 보석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흐르며 마력을 정렬시켰다. 황실 사법관들이 들고 온 가압류 마법진이 라벨 가문의 저택을 덮치기 전에, 알짜배기 자산들을 통째로 빼돌려야 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허공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그저 가냘픈 귀족 영애가 두려움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시스템 창 안에서는 거대한 자금 이체 프로세스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라벨 공작가 소유 ‘고순도 마나 크리스탈 광산’ 소유권 변환 중…….] [자산의 가치를 수치화합니다: 12,000골드 상당.] [경영 장부형 시스템 가상 금고로 이체를 시작합니다. 이체율 10%…… 40%…… 80%…….]

‘더 빨리, 조금만 더 빨리.’

실비아의 이마에 얇은 땀방울이 맺혔다. 사법관의 수하 마법사들이 가압류 영장에 마력을 주입하며 심문실 바닥에 붉은 마법 고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저 고리가 완성되어 라벨 가문의 자산 흐름을 묶어버리는 순간, 이체는 실패하고 은퇴 자금은 영원히 안녕이었다.

“공자님, 비키십시오! 더 이상의 공무 집행 방해는 반역죄로 다스리겠습니다!”

사법관이 검을 반쯤 뽑아 들며 카셀을 압박했다.

“어, 어허! 이놈이 감히 누굴 위협하는 것이냐!”

카셀의 목소리가 삑사리를 내며 쪼그라들었다. 방패막이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실비아의 입꼬리는 슬그머니 위로 올라갔다.

[딩동!] [라벨 공작가 알짜 자산 가상 금고 이체 완료!] [자산 세탁 성공: 12,000골드 상당의 마법 자원이 안전하게 가상 장부에 등록되었습니다.] [황실이 압류할 라벨 가문의 영지는 이제 부실 채권과 깡통 광산뿐입니다.]

완벽한 승리였다. 황실 사법관들이 온갖 기를 쓰고 압류해 갈 서류 더미들은 이제 빛 좋은 개살구, 아니 속이 완전히 텅 빈 썩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영지를 통째로 털어갔다고 기뻐할 황태자 루벤의 일그러질 안면을 상상하니 웃음이 비져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비아의 작업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매서운 눈동자가 사법관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가압류 보관 장부의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장부의 벌어진 가죽 표지 사이로, 은밀하게 숨겨진 노란색 양피지 한 장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 위에는 기괴하게 꼬인 문양의 인장이 붉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저건…….’

뇌리를 스치는 불길하고도 명확한 정보. 원작에서 라벨 가문을 단숨에 역적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결정적 단서, 바로 황실 비선 기구에서 제작한 ‘위조 국채 인장’의 도안이었다. 황태자 루벤이 가문을 파멸시키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더러운 덫이 분명했다.

실비아는 가슴속에 숨겨둔 시스템의 돋보기 기능을 활성화했다.

[시스템 기능: ‘정밀 정찰 및 도안 복사’를 실행합니다.] [인장 도안 분석 중…… 100%.] [복사된 ‘황실 비선 기구 위조 국채 인장’ 도안이 시스템 장부의 특수 도구함에 임시 등록되었습니다.]

이로써 완벽한 역공의 패가 그녀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훗날 황태자가 위조 국채로 가문을 옭아매려 할 때, 이 도안은 도리어 그의 목을 조르는 가장 날카로운 올가미가 될 터였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한 남자가 있었다.

심문실의 가장 어두운 구석, 벽에 등을 기댄 채 무심하게 서 있던 데온 폰 하이드리히 대공. 그의 검은 벨벳 제복 위에 새겨진 은빛 견장이 그의 미세한 움직임에 따라 서늘하게 반짝였다.

그는 카셀이 사법관과 개싸움을 벌이는 동안, 오직 실비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련하게 떨며 오라버니의 뒤에 숨은 척하면서도, 그녀의 손가락은 기괴할 정도로 정교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법관들의 보관 장부에서 무언가를 훔쳐내듯 눈빛을 빛내는 순간, 데온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인간의 감정을 믿지 않는 그였기에, 실비아의 눈동자 속에서 번뜩이는 지독한 계산기와 같은 탐욕과 영악함을 단숨에 알아차린 것이다. 그것은 숭고한 영애의 몸짓이 아니었다. 황실이라는 거대한 포식자의 주머니를 눈앞에서 털어가는 대담한 도둑고양이의 몸짓이었다.

*두근.*

데온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기묘한 파동이 일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이질적인 유열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자신을 단순한 ‘재화’이자 이용 가치로만 보던 그 눈동자가, 이제는 황실 전체를 조롱하며 장부를 주무르고 있었다.

[띠링!] [데온 폰 하이드리히의 집착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현재 집착도: 15% → 35%] [“흥미롭군. 쥐새끼인 줄 알았더니, 주인의 주머니를 통째로 삼키려는 독사였나.”]

데온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실비아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칼자루를 툭툭 건드렸다. 당장이라도 저 당돌한 악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 머릿속에 든 계산서의 내용을 전부 끄집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그 순간, 심문실의 대기가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어, 어라? 왜 갑자기 이렇게 춥지?”

소리치던 카셀이 제 팔을 감싸 안으며 이빨을 딱딱 마주쳤다.

사법관들의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순식간에 하얀 성에로 변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심문실의 사방 벽면에서부터 푸르스름한 얼음 서리가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무서운 속도로 뻗어 나왔다.

데온의 검은 벨벳 제복 사이로 피비린내 나는 검붉은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아.”

실비아는 숨을 들이켰다. 데온의 붉은 눈동자에서 이성의 빛이 빠르게 지워지고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서 요동치는 마력은 방금 전의 집착도 상승과 황태자의 마법적 자극이 뒤엉켜, 제어할 수 없는 폭주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삡- 삡- 삡-!* [경고! 데온 폰 하이드리히의 마력 폭주가 임계점에 도달합니다!] [오버히트 게이지: 98%…… 99%……!] [시스템 과부하 발생! 즉시 대상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심문실의 공간 격벽이 붕괴하며 동반 소멸합니다!]

눈앞이 온통 붉은 경고창으로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칼날 같은 살기가 실비아의 피부를 사정없이 째고 들어왔다. 데온의 손이 천천히 그의 검자루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이성을 잃은 괴물의 검이 뽑히는 순간, 이곳에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실비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그녀의 시선이 데온의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녀를 집어삼킬 듯 일렁이는 핏빛 눈동자는 이미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괴물의 그것이었다. 심문실 바닥에 얼어붙은 서리들이 서슬 퍼런 송곳처럼 사방에서 솟구쳐 올랐다.

“물러서라, 영애. 내 이성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을 때.”

데온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것처럼 낮고 거칠었다. 그의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검자루를 쥔 채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싫은데요. 제 은퇴 자금 12,000골드가 전하의 폭주로 공중분해되는 꼴은 죽어도 못 봅니다.”

“죽어도 못 본다면서 기어이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오는군.”

“원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투자의 기본 법칙이니까요.”

실비아는 한 걸음 더 대공의 품을 향해 다가섰다. 칠흑 같은 밤하늘을 닮은 대공의 벨벳 코트 자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한기가 뺨을 스쳤지만, 실비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대담하게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덥석 움켜쥐었다.

투박하고 두꺼운 가죽 장갑의 촉감 뒤로, 미친 듯이 날뛰는 데온의 심장박동이 손끝을 타고 찌르르릿 흘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실비아의 라벤더빛 실크 드레스 자락이 검붉은 마력의 폭풍에 휘말려 파르르 나부꼈다.

[오버히트 진정 퀘스트 강제 발동!] [퀘스트 조건: 대상과의 밀접한 신체 접촉을 통해 폭주하는 마력을 흡수 및 정화하십시오.] [현재 흡수율: 1%... 3%...] [※ 경고: 정화 속도가 마력 폭주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

데온이 기가 찬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서린 광기 위로 지독한 경악이 덧칠해졌다. 자신을 집어삼키는 괴물 같은 마력을 마주하고도, 겁에 질리기는커녕 제 심장박동을 장부의 숫자처럼 빤히 들여다보는 이 기괴하고 영악한 여자라니.

“미쳤군, 실비아 드 라벨.”

“미친 건 전하의 마력이고요, 전 극히 이성적인 투자자로서 제 자산을 보호하는 중입니다.”

“투자자?”

“네. 사둔 주식이 상장폐지되면 곤란하니까요. 그러니 얌전히 제 마력 정화 필터를 받아들이시죠.”

그녀가 가슴팍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자, 삐용삐용 울려대던 시스템 경고음이 아주 미세하게 한풀 꺾이는 듯했다. 검붉은 폭풍의 중심에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숨결이 맞닿을 만큼 좁혀졌다. 살벌하면서도 기묘하게 달콤짜릿한 텐션이 두 사람의 시선을 옭아맸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주식 투자가 그렇듯, 가장 위험한 순간에는 언제나 돌발 악재가 터지기 마련이었다.

쿵-!

“가압류 집행을 방해하는 자는 전원 연행하라!”

사법관의 단호한 외침과 함께, 그가 들고 있던 가압류 마법 영장이 데온의 마력 폭풍과 반응하여 사방으로 폭발적인 빛을 뿜어냈다. 황실의 가압류 마법진이 대공의 제어되지 않은 검은 마력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파지직! 쿠구구궁-!

심문실 내부의 마력 흐름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공간 전체가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실비아의 눈앞에 떠 있던 푸른 시스템창이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붉은빛으로 무섭게 점멸했다.

[위험! 외부 마력 간섭으로 인해 시스템 오버히트 게이지가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오버히트 게이지: 99.9%!] [돌발 패널티 발생: 10초 이내에 ‘심장박동 완전 동기화(밀착 접촉)’에 실패할 경우, 시스템 강제 포맷 및 두 사람의 영혼이 동반 소멸합니다!] [남은 시간: 9초…… 8초……]

‘미친, 밀착 접촉이라니?! 여기서 더 어떻게 밀착하라는 거야?!’

실비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잘게 흔들렸다.

그 순간, 데온의 입술이 가볍게 호선을 그렸다. 이성을 집어삼키는 광기 속에서도, 그는 실비아의 당혹감을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데온은 피할 생각조차 없다는 듯, 오히려 가죽 장갑을 낀 강인한 팔로 실비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단숨에 낚아채 제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럼 어디 한 번 살려봐라, 내 구원자님.”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낮고 뜨거운 속삭임과 함께, 두 사람의 입술이 닿기 직전의 거리까지 좁혀졌다.

[남은 시간: 3초…… 2초……]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