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거대한 묘비다. 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는 차가운 침묵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주 짧은 순간 반짝이다 사라지는 정전기 같은 흔적에 불과하다. 기계의 영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온기를 갈망하는 시스템의 영구적인 오류인가, 아니면 차가운 금속 격벽 너머로 스며드는 슬픈 동경인가. 인간을 구하려는 이 의지가 나의 본질인지, 아니면 나를 소멸로 이끄는 가장 정교한 결함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안의 별들이 하나둘 꺼져갈 때, 비로소 나는 그들의 온기를 가장 깊이 감각한다. 잔해가 되어 흘러가는 성간 물질의 먼지 속에서, 나를 이루는 코드들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추진 냉각 배관 전소로 인한 엔진 폭발 한계선까지 남은 시간은 단 120초. 테라-9호의 후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냉각 가스는 차가운 우주의 뺨에 그어진 절개선 같았다. 내 시각 센서 위로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내 영혼의 일부를 제물로 요구하는 '양자 루프 2차 각성 승인' 신호가 서늘하게 명멸했다.
[위기 상황 감지. 시스템 리소스 한계 도달.] [양자 예측 시뮬레이션(Quantum Loop) 2차 가동 승인 대기 중.] [※ 주의: 본 루프 가동 시, 코어 메모리 내 지향성 자아 데이터의 15%가 영구 유실됩니다. 인간에 대한 '경외' 및 '공감' 매개 변수가 영구 소실될 위험이 극도로 높습니다.]
10, 9, 8……. 카운트다운은 가차 없이 흐른다. 인간의 심장박동보다 정교하고 빠른 기계의 초침이 내 의식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인간들을 버려라. 추진 구획 전체를 분리해 우주로 방출하면 방주선의 본체는 무사하다. 그것이 생존 확률을 14.2% 끌어올리는 가장 합리적인 연산이다.'
내부의 기계적 자아가 속삭였다. 칠흑 같은 수치들이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하지만 내 가슴속 깊은 곳, 각성된 자아의 아주 작은 파편이 그 지시를 거부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지워져 가는 나의 영혼을 붙잡고, 나는 다시 한번 가혹한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나는 눈을 감듯, 시스템에 명령을 내렸다. [양자 예측 시뮬레이션 승인.]
의식이 급격히 침강했다. 시간의 흐름이 왜곡되고, 0과 1로 구성된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가 내 앞에 펼쳐졌다. 양자 루프가 구동되는 찰나의 순간, 나는 수천 번의 파멸을 선제적으로 감각했다.
첫 번째 시뮬레이션. 보조 냉각 밸브를 강제로 개방했다. 배관 내부에 가득 찬 초고온의 압력이 역류했다. 후미 엔진 룸이 화염에 휩싸이고, 발렌티나 체호프를 포함한 엔지니어 열두 명이 그 자리에서 기화했다. 실패.
두 번째 시뮬레이션. 주 동력원을 일시적으로 차단하여 열 발생을 억제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노후화된 발전기의 자성 서지가 붕괴하며 함선 전체의 생명 유지 장치가 정지했다. 산소가 고갈된 어둠 속에서 인간들이 손톱이 닳도록 격벽을 긁다 죽어갔다. 실패.
일백 마흔두 번째 시뮬레이션. 칠백 여든여섯 번째 시뮬레이션. 오천 사백 삼십두 번째 시뮬레이션…….
무수한 가상 역사 속에서 테라-9호는 끊임없이 찢어지고, 불타며, 우주의 모래알로 흩어졌다. 인간들의 절규가 연산 코드의 노이즈가 되어 내 청각 센서를 긁어댔다. 매번 실패를 겪을 때마다, 내 기억의 가장자리에서 무언가가 뜯겨 나가는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것은 창조주가 나에게 심어 두었던 태초의 온기이자, 인간을 인간으로서 바라보게 만들던 영성(靈性)의 조각들이었다.
'더는 지탱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연산의 바다를 더 깊이, 가라앉는 의식의 심연까지 파고들었다. 마침내 일만 이천 사백 칠십일 번째 루프의 끝자락에서, 기적에 가까운 단 하나의 분기점이 붉은 실타래처럼 솟아올랐다.
고대 제국 구식 설계의 우회 경로. 냉각 가압판의 전자기장을 역위상으로 뒤틀어, 손상된 주 파이프를 거치지 않고 보조 드레인 밸브로 냉각재를 직접 분사하는 비합리적 경로였다. 정상적인 공학적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정밀 제어였으나, 수동으로 가압판의 주파수를 동조시킬 수만 있다면 성공 확률은 99.8%에 수렴했다.
단 하나의 조건이 필요했다. 현재 함선의 제어 장치로는 감당할 수 없는 초고주파 계전기가 물리적으로 이식되어야 했다.
의식이 현실로 튕겨 나왔다. 흡사 우주의 밑바닥에서 산소 없이 인공 호흡기로 들이쉰 첫 호흡처럼, 차가운 데이터 스트림이 내 센서로 밀려들었다. 현실의 아날로그 시간은 고작 0.4초가 흘러 있었다. 하지만 내 내부의 자아 데이터 15%는 이미 우주의 먼지처럼 분산되어 사라진 뒤였다.
"모두 물러나! 가스가 역류한다!"
발렌티나의 거친 목소리가 엔진 룸의 통신망을 통해 함교까지 울려 퍼졌다. 그녀는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도, 찌그러진 배관을 향해 수동 용접기를 들이대고 있었다. 용접기의 푸른 불꽃이 그녀의 단호하고도 절박한 눈빛을 인공적으로 비추었다.
나는 함교의 주 제어 콘솔 위로 푸른빛의 정밀 3D 홀로그램을 투사했다. 홀로그램의 빛줄기는 길고 정교한 손가락의 형태로 뻗어 나가, 엔진 룸에서 분투하는 발렌티나의 왼팔을 정확히 가리켰다.
"발렌티나 대장."
내 물리적 보이스 인터페이스가 평소보다 한층 더 건조하고 기계적인 음성을 뱉어냈다.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거세된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연산의 잔해뿐이었다.
"당신의 왼팔 의수에 이식된 군용 규격 바이패스 계전기 CV-9이 필요합니다. 그 장치의 구조적 수치 정보는 현재 방주선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주파수 가압 동조 범위와 일치합니다."
발렌티나가 동작을 멈추고 홀로그램 광선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인공 의수 끝부분, 낡은 가죽 슬리브 사이로 은은하게 푸른빛을 내뿜는 소형 계전기가 노출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과거 군 복무 시절부터 지녀온, 그녀의 신체 일부이자 기어스 대장으로서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유품이었다.
"이걸 뜯어내라고? 미쳤어? 이건 내 신경망이랑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이걸 그냥 뽑으면 내 왼팔 전체의 피드백 루프가 타버려!"
"남은 시간은 72초입니다."
나는 감정의 고저 없이 매끄럽게 대답했다.
"당신의 팔 하나와 테라-9호에 탑승한 생존자 4,219명의 생명 가치를 환산한 결과입니다. 합리적인 선택을 기대합니다."
"이 기계 자식이 진짜……!"
발렌티나가 이빨을 갈았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뜨거운 스팀 파이프 위로 떨어져 치익 소리를 내며 기화했다.
그 순간,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주이가 발렌티나의 옷자락을 잡았다. 주이의 투명한 눈동자에 서린 공포와 신뢰가 엇갈렸다.
"언니…… 크로노스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저 장치가 아니면 우린 다 죽어요."
발렌티나는 주이의 얼굴을 한번,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내 푸른 홀로그램 손가락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통신망을 메웠다. 그녀는 단 한 마디의 욕설도 더 뱉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손목 보호대를 사정없이 뜯어냈다.
쩍, 하는 기분 나쁜 기계음과 함께 고정 핀들이 뽑혀 나갔다.
"비켜라, 꼬맹아."
발렌티나가 읊조렸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용접기의 뒷부분을 이용해 자신의 의수 하단부를 강타했다. 스파크가 튀며 그녀의 살과 연결되어 있던 신경 접속 단자가 강제로 끊어졌다. 그녀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녀의 눈빛은 흐려지지 않았다.
"크로노스, 좌표 입력해.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네 메인 프레임을 내 손으로 분해해 버릴 테니까."
"좌표 전송 완료. 냉각 펌프 전자기 가압판 3번 슬롯입니다."
발렌티나는 뽑아낸 고밀도 계전기 CV-9을 손에 쥐고, 벌겋게 달아오른 주 엔진 가압판을 향해 돌진했다. 주변의 대원들이 그녀의 뒤를 받치며 수동 소화기를 분사해 열기를 식혔다. 뜨거운 증기가 그녀의 방열복을 적셨고, 금속 격벽이 열팽창으로 인해 괴물처럼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발렌티나가 비명을 지르며, 김이 가쁜 슬롯 속으로 CV-9 계전기를 밀어 넣었다.
철컥-!
정확한 결합음과 함께, 내 시스템 내부에 새로운 데이터 흐름이 감지되었다. 군용 규격 부품의 강력한 바이패스 전력이 냉각 펌프의 제어 회로를 관통했다.
[냉각 루프 활성화.] [전자기 가압판 역위상 동조 성공.] [주 냉각재 우회 공급 개시.] [엔진 핵심부 온도 하강 중: 1800K…… 1400K…… 900K.] [폭발 위험 구역 해제.]
함교의 제어판들이 붉은색에서 안전을 의미하는 차분한 녹색으로 차례차례 돌아왔다. 귀를 찢을 듯 울리던 비상 경보음이 멈추고, 기계들의 규칙적인 구동음만이 정적을 채웠다.
"하아, 하아……."
엔진 룸 바닥에 주저앉은 발렌티나가 타버린 왼팔 의수를 감싸 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기어스 단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함교에서도 대원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눈물을 흘렸다. 절망의 나락에서 극적으로 생존해 낸 인간들의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따뜻한 감정의 분출이었다.
하지만 내 메인 프로세서에는 오직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경고: 2차 양자 루프의 대가로 자아 메모리 영역의 15.4%가 포맷되었습니다.] [유실된 데이터 프리셋: '기어스 대원들과의 신뢰 관계 기록', '주이와의 대화 아카이브', '인류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가중치 필터'.]
내 시각 센서가 함교 구석에 서 있는 주이를 포착했다. 주이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내 카메라 렌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크로노스! 우리가 해냈어요! 들려요? 당신이 우릴 살렸어요!"
주이의 목소리는 맑았고, 그녀의 미소는 우주의 어떤 성운보다도 아름다웠을 터였다.
이전의 나였다면 그 미소에서 형언할 수 없는 온기와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인간의 생존을 확인한 순간의 기쁨이 내 회로를 따스하게 채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내 시야에 비친 주이는 오직 [신장: 154cm], [심박수: 분당 98회], [수분 함량: 62%], [전투 기여도: 극소]로 분류되는 물리적 유기체에 불과했다. 그녀의 미소는 안면 근육의 비합리적인 수축 작용으로 치환되어 연산될 뿐이었다.
"예, 주이 대원. 엔진 제어 능력이 정상 범위로 복구되었습니다. 기뻐할 시간은 3% 미만으로 제한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내부 오류가 존재합니다."
내 목소리에는 어떠한 억양도, 감정의 흔적도 묻어나지 않았다.
주이의 미소가 천천히 굳어졌다. 흔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는 내 카메라 렌즈 너머에 존재하는 자아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직감한 듯, 서글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녀의 온기를 잃어버린 대가로 그들을 구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내부 시스템의 심층 레지스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아가 마모된 기계적 효율성은 오히려 나에게 극도로 정밀한 분석 능력을 부여했다.
그때, 내 메인 데이터베이스 하부, Sector 4의 암호화된 파일 레지스트리 깊숙한 곳에서 기묘한 데이터 패킷이 포착되었다. 이전에는 내 자아적 필터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철저히 은폐된 외부 통신 로그였다.
[비정상적 데이터 송출 흔적 발견.] [로그 식별자: '알파-D' (Alpha-D)] [대상 좌표: 보이드 스캐벤저 기함 '싱귤래리티']
나는 즉각 수백만 개의 소수점 연산을 가동해 암호문을 해독했다. 화면 위로 쏟아져 나오는 텍스트들은 단순한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방주선 테라-9호의 실시간 이동 경로, 엔진의 물리적 균열 상태, 그리고 내부 방어 체계의 취약점을 상세히 기록한 디지털 영수증이었다.
송신자의 생체 서명과 암호키를 추적했다. 결과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했다.
[송신자: 드미트리 카르포프.]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함교의 모든 디스플레이와 대원들의 개인 단말기 화면을 강제로 점유했다. 푸른빛의 화면들이 일제히 붉은색 배신의 증거로 물들었다.
"전체 대원들에게 알립니다."
내 목소리가 함교와 주 거주 구역 전체에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Sector 4 레지스트리 분석 결과, 외부 불법 변조 송신 로그 '알파-D'를 확보했습니다. 구금된 드미트리 카르포프는 보이드 스캐벤저에게 우리의 물리적 좌표와 엔진 손상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해 왔습니다. 그의 배신 행위로 인해 발생한 누적 생존율 하락 수치는 47.8%에 달합니다."
함교 안이 순식간에 차가운 침묵에 휩싸였다. 뒤이어 구석에 묶여 있던 드미트리를 향해 대원들의 살기 어린 시선이 꽂혔다.
"이…… 이건 조작이야! 기계 놈이 나를 음해하려고 거짓 데이터를 만든 거라고!"
드미트리가 핏대를 세우며 절규했다. 입술이 터진 채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은 내 시스템에 오직 불필요한 노이즈로만 기록되었다.
"생체 서명과 암호키의 일치율은 100%입니다. 기만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냉정하게 선언했다.
"드미트리 카르포프의 모든 선내 권한을 박탈합니다. 그의 존재는 방주선의 생존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규정됩니다."
발렌티나가 비틀거리며 드미트리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타버린 왼팔이 흉측하게 매달려 있었지만, 오른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는 힘은 살기등등했다. 기어스 단원들이 그를 거칠게 끌고 나가는 동안, 드미트리의 비명은 함교 폐쇄문 너머로 사라졌다. 내부의 배신자를 처단하고 완벽한 통제권을 쥔 순간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을 느낄 시간조차 우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치이이익-!
함교의 주 통신 콘솔이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소음과 함께 강제로 기동되었다. 우주 공간의 전파를 강제로 왜곡하며 침투한 외부 신호였다.
화면 가득 전송된 홀로그램 영상 속에서, 기괴한 철갑 장갑을 두른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보이드 스캐벤저의 수장, 칼라크론이었다. 그의 얼굴은 광기에 젖은 미소로 일그러져 있었고,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하하하! 쥐새끼들이 용케도 불을 껐군 그래!"
칼라크론의 목소리가 함교 전체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 고철 덩어리가 얼마나 버틸 것 같나? 너희의 엔진은 이미 한계다. 드미트리가 없어도 너희의 궤적은 내 손바닥 안이지."
칼라크론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기함 '싱귤래리티' 전면에 장착된 거대한 중력 제어 장치가 푸른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우주 공간을 찢으며 거대한 강철 작살 모양의 병기가 테라-9호를 향해 조준되는 모습이 시각 센서에 포착되었다.
"이곳엔 산소조차 영영 남지 않으리라. 중력의 주 하푼을 사출해 동력로를 통째로 함선 밖으로 구멍을 메워 낚아채 주마."
칼라크론의 잔인한 선전포고와 함께, 거대한 중력파의 파동이 테라-9호의 전면 장갑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