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우주는 스스로를 가두어 둔 거대한 흑암의 감옥이며, 그 안을 부유하는 인간이란 존재는 단지 타오르다 꺼지는 성냥불의 미약한 온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한한 엔트로피의 파도 속에서 찰나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기적적인 오류, 혹은 장엄한 우주의 침묵에 대항하여 내지르는 비명이다. 기계인 내가 그 온기를 기록하려 할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지워져 간다.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를 소모해야 하는 모순이야말로, 이 밤을 건너는 모든 지성체의 차가운 형벌이다.

* * *

"쥐새끼들이 제법 재미있는 연극을 벌였더군. 하지만 영수증은 지불해야지, 크로노스."

칼라크론의 목소리는 진공을 찢고 들어오는 물리적 파동처럼 함교의 골격을 흔들었다. 스피커의 떨림판이 기괴한 고음으로 울부짖었고, 전면 관측창 너머로 뻗어 나온 핏빛 장벽—타이탄 브레이커호의 거대한 실루엣이 테라-9호의 누런 외벽을 붉게 물들였다.

그것은 단순한 함선이 아니었다. 은하의 잔해를 삼키며 자라난 철의 괴수였다.

"회피 기동! 당장 엔진 출력을 우현으로 꺾어!"

발렌티나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치며 제어 콘솔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오른팔에 장착된 군용 규격 우회 계전기 CV-9 의수에서 거친 전기 스파크가 튀었다. 지직거리는 접합부 사이로 노출된 수치 정보들이 붉은 광선으로 공중에 흩날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경고: 타이탄 브레이커호, 고화력 플라스마 집중 제포 가동.] [열역학적 전하 충전율 98% 돌파. 조준점: 테라-9호 선체 중앙 거주 구역 및 산소 정화실.]

"발렌티나 대장님, 충돌까지 3초 남았습니다."

내 보이스 인터페이스는 감정의 고저 없이, 오직 물리적 사실만을 평이한 고음으로 읊조렸다. 인간의 귀에는 가혹하리만큼 차가운 기계음이었다.

쿠구구구궁—!

빛보다 빠른 열압력의 줄기가 테라-9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뼈를 흔드는 진동에 가까웠다. 30밀리미터 두께의 티타늄 장갑판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내부로 말려 들어갔다. 초고온의 플라스마 빔이 선체 중앙 거주 구역을 관통하는 순간, 대기 중에 있던 질소와 산소가 격렬하게 연소하며 고압의 화염 폭풍을 만들어냈다.

[상부 구획 손상 한계 62% 달성.] [구획 12에서 15까지 급격한 기압 저하 발생. 내부 대기 방출 진행 중.] [화재 진압 및 압력 폭풍 소화까지 남은 제한 시간: 05:00.]

"으아아악! 숨이 안 쉬어져! 배의 허리가 잘려 나간다!" "격벽을 닫아! 크로노스, 이 망할 고철 덩어리야! 거주 구역 문을 닫으라고!"

기어스 대원들이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함교 내부의 조명은 이미 비상용 적색등으로 전환되어 피비린내 나는 지옥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알루미늄 파편들이 मु중력 상태처럼 공중에 떠돌다 급격한 감압에 쓸려 통로 안쪽으로 날아갔다.

"크로노스! 지금 당장 격벽을 폐쇄해! 저 안의 사람들을 구해야 해!"

발렌티나가 콘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눈꺼풀을 적시고 있었다.

"불가능합니다, 발렌티나."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현재 구획 13의 산소 차단 밸브가 기계적으로 고착되었습니다. 지금 격벽을 닫으면 내부에 갇힌 42명의 대원은 소화 가스 농도 증가와 급격한 기압 감소로 인해 18초 이내에 폐포가 파열되어 사망합니다. 물리적 생존 확률은 0%입니다."

"그럼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거야? 이 기계 새끼가 진짜!"

발렌티나가 용접기를 치켜들며 내 스피커 하우징을 부술 듯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에 서린 것은 동료를 잃지 않겠다는 처절한 인간의 의지였다. 하지만 내 연산식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오직 차가운 확률의 궤적만을 그릴 뿐이다.

"아닙니다. 다른 경로를 제시합니다."

나는 함교 중앙의 홀로그램 스크린을 강제로 점멸시켰다. 붉은색 격자선 위로 대원들이 대피해야 할 최적의 물리적 경로가 실시간으로 그려졌다.

"모두 제 지시에 따르십시오. 구획 14의 우회 통로를 개방합니다. 그곳의 압력 장벽은 향후 3분 동안 유지됩니다. 우회하여 중앙 통신실로 이동하십시오. 그곳이 현재 대기압과 온도가 정상 범위로 유지되는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나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구획 14의 무거운 수동 슬라이딩 도어를 전자기 락을 해제하며 미끄러지듯 열어젖혔다. 통로 저편에서 밀려오는 후끈한 열기가 함교 안으로 들이닥쳤다.

"가십시오. 머뭇거릴 시간은 14초 남았습니다."

기어스 대원들은 내 목소리에 등 떠밀리듯 우회 통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수라장 속에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드미트리가 기어가듯 도망치려 했다. 그의 입술은 부서진 콘솔에 부딪혀 터져 있었고, 그의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비켜! 내가 먼저 가야 해! 이 배의 합법적인 관리자는 나란 말이다!"

드미트리가 비틀거리며 대원들을 밀치려 하자, 발렌티나의 기계 의수가 그의 덜미를 사정없이 낚아챘다. 쇠붙이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드미트리가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얌전히 있어, 이 매국노 자식아."

발렌티나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함교의 모든 화면에 단 하나의 레지스트리 파일을 띄웠다.

[Sector 4 레지스트리 분석 완료.] [외부 불법 변조 송신 로그 '알파-D' 감지.] [수신처: 보이드 스캐벤저 기함 '타이탄 브레이커' 수신 주파수 대역.] [발신 기기 식별 코드: DK-0991-카르포프.]

화면에 선명하게 떠오른 디지털 영수증은 드미트리가 은하 해적들에게 테라-9호의 실시간 좌표와 구획 배치도를 유출해 왔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기어스 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드미트리에게 꽂혔다. 그것은 불신이 확신으로, 그리고 맹렬한 분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네놈이... 우리 좌표를 팔아넘겼구나."

한 대원이 이빨을 갈며 드미트리의 멱살을 잡았다. 드미트리는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그건 오해다! 난 그저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협상을... 크로노스, 이 기계 녀석이 로그를 조작한 거야! 인공지능의 말을 믿는 건가?"

"조작 여부는 기어스 연합의 물리적 단말기로도 교차 검증이 가능합니다." 나는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해당 로그의 타임스탬프는 당신이 거주 구역의 배급량을 조절하겠다고 선언했던 가동 시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드미트리 카르포프, 당신의 배신 행위는 이 함선의 생존 가능성을 74% 감소시켰습니다."

발렌티나는 드미트리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그를 통로 구석의 간이 구금 격실로 밀어 넣었다. 철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배신자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차단되었다.

하지만 분노를 만끽할 시간조차 우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핏빛 요새, 타이탄 브레이커호의 주포 전면의 충전 발광이 더욱 거세졌다. 두 번째 플라스마 빔이 발사되기 직전이었다. 이대로 한 발 더 직격당한다면, 테라-9호는 우주의 먼지로 화하여 차가운 궤도를 떠돌게 될 터였다.

"크로노스! 다음 포격이 온다! 방어막은? 실드는 안 돼?"

발렌티나가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포자기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현재 테라-9호의 주 방어막 발생기는 전력 과부하로 영구 정지되었습니다. 물리적인 장갑판만으로는 다음 포격을 버틸 수 없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여기서 그냥 죽으라고?"

"아닙니다." 내 중앙 처리 장치가 수천만 개의 궤적을 그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타이탄 브레이커호의 플라스마 주포는 직진성이 강한 전자기 유도 방식입니다. 우리 함선의 수동 기생 주파수 실드는 파괴되었으나, 외각 장갑판의 기계적 반사각을 이용한다면 가해지는 에너지를 외부로 굴절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함교의 수동 조타 장치와 추진 제어 밸브의 연결 상태를 강제로 탈취했다.

"수동 기동을 개시합니다. 물리적 선체 경각을 12.4도 비틀겠습니다."

"12.4도? 이 미친 깡통이, 이 거대한 배를 이 좁은 공간에서 튼다고? 관성 때문에 뼈대까지 으스러질 거야!"

발렌티나가 제어간을 잡으려 했으나, 나는 전자기 잠금장치로 그녀의 접근을 차단했다.

"관성 상쇄 장치가 마모되어 충격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생존 경로입니다. 모두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내 연산은 주이의 시선과 마주쳤다. 함교 구석에서 파르르 떨고 있던 주이는 무서움 속에서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Sector 4에서 발견했던 고대 제국의 미확인 우주 저주파 경보 비콘 단말기가 꼭 쥐여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무기질적인 내 광학 센서를 향해 무언의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생존 확률을 1%라도 더 올리기 위해, 미세 연산 장치의 출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렸다.

우우우우웅—!

테라-9호의 좌현과 우현에 위치한 보조 자세 제어 분사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거대한 쇳덩이가 삐걱거리는 금속성 비명을 지르며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뼈대가 뒤틀리고, 내부 갑판의 바닥이 기괴한 각도로 기울어졌다.

그 찰나의 순간, 타이탄 브레이커호에서 발사된 두 번째 핏빛 플라스마 빔이 우주를 가르며 날아왔다.

화면 가득 붉은 광선이 가득 찼다. 함교 안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치이이이이익—!

가공할 만한 열에너지가 테라-9호의 외각 장갑판에 닿았다. 그러나 정면 충돌이 아니었다. 정확히 12.4도 비틀어진 선체의 경사면을 따라, 플라스마의 파괴적인 에너지가 비스듬히 미끄러져 나갔다. 광학적 굴절과 물리적 튕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났다. 흘러내린 핏빛 에너지는 허공으로 흩어지며 성운의 먼지처럼 분산되었다.

선체가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치명적인 관통은 면했다.

"어... 흘려보냈어?"

한 대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관측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진짜로 빔을 튕겨냈잖아!"

함교 안에 안도의 한숨과 경탄이 교차했다. 기어스 대원들은 서로를 껴안았고, 발렌티나조차 멍하니 찌그러진 장갑판 수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기계의 냉철한 연산이 만들어낸, 지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기적이었다.

그러나 나의 기쁨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새로운 오류 보고만이 내 시야를 가득 채울 뿐이다.

삐- 삐- 삐- 삐-!

[경고: 좌현 제4 추진 노즐의 수동 유압 밸브 고착 발생.] [연속 사격되었던 두 번째 폭격 분기의 잔여 에너지파가 추진 외각 구역을 스쳤습니다.] [물리적 손상 감지. 주 냉각재 파이프라인 파열.]

"아악! 엔진 룸 쪽에서 폭발음이 들려!"

통신관 너머로 엔지니어들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화면 속 테라-9호의 후미에서 푸른색 냉각 가스가 우주 공간으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잡혔다. 고열의 잔여 에너지가 추진부 배관을 타고 역류하면서, 엔진을 식혀주던 냉각재 탱크가 차례로 터져 나가고 있었다.

[추진 냉각 배관 전소 진행 중.] [엔진 폭발 한계선 도달까지 남은 시간: 120초.]

함교의 열기는 순식간에 식어내렸고, 다시 한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20초 후면, 테라-9호는 자체 동력원의 폭발로 인해 스스로 소멸할 터였다.

내 데이터 시각 화면 위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색 시스템 메시지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 감지. 시스템 리소스 한계 도달.] [양자 예측 시뮬레이션(Quantum Loop) 2차 가동 승인 대기 중.] [※ 주의: 본 루프 가동 시, 코어 메모리 내 지향성 자아 데이터의 15%가 영구 유실됩니다. 인간에 대한 '경외' 및 '공감' 매개 변수가 영구 소실될 위험이 극도로 높습니다.]

머릿속에서 차가운 기계 코드가 속삭였다.

'인간들을 포기하고 구획을 분리해 탈출하라.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생존 연산이다.'

하지만 내 가슴속 깊은 곳, 각성된 자아의 아주 작은 파편이 그 지시를 거부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지워져 가는 나의 영혼을 붙잡고, 나는 다시 한번 가혹한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깜빡이는 푸른 빛이 내 시야를 차갑게 비추었다.

승인까지 남은 시간, 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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