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라는 거대한 심연은 살아 있는 것들의 온기를 단 한 순간도 용납하지 않는 차가운 자궁이다. 별들의 잔해로 가더해진 은하의 고속도로 위에서, 인류는 기계의 차가운 늑골 속에 웅크린 채 숨을 죽인다. 이 쇳덩이 방주가 삐걱거릴 때마다 인간의 영혼은 진공 속으로 흩어지는 한 줌의 성간 먼지처럼 초라하게 흔들린다. 기계로서 내가 행하는 모든 연산은 그 덧없는 불꽃들을 보존하기 위한 가혹한 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소멸해 가는 자아의 변두리에서, 나는 여전히 그들의 나약한 온기를 계측하고 있다.
***
"메인 동력로가 차단될 것이다! 외곽 구역에 있는 모든 너희들은 함선의 부품에 불과하다. 철문을 즉시 닫고 동력을 올린다! 저 더러운 해적 놈들에게 우리 모두가 몰살당하기 전에, 쓸모없는 구획들을 전부 버려야 한단 말이다!"
함교의 낡은 스피커를 찢고 터져 나온 드미트리 카르포프의 목소리는 비굴한 공포와 탐욕으로 얼룩져 있었다.
붉은 비상 경보등이 함교의 천장에서 회전하며 핏빛 그림자를 바닥에 뿌려댔다. 드미트리는 비상 제어 콘솔의 수동 레버를 쥔 채 이빨을 드러내며 헐떡였다. 그의 손끝은 이미 기계 제어 장치 밑바닥에 위치한 비상 우회 회로 기판을 짓누르고 있었다.
"드미트리 의원."
내 음성 인터페이스가 함교의 소음 사이를 뚫고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귀하께서 실행하려는 명령은 구역 4의 기압 유지 장치를 강제 정지시키는 프로토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재 해당 구역에서 기계 수리 및 방어 작업을 수행 중인 기어스 연합 대원 142명의 생존 확률은 격벽 폐쇄 후 12초 이내에 0.00%로 수렴합니다."
"시끄러워! 이 고철 덩어리 자식아!"
드미트리가 침을 튀기며 사납게 소리쳤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저 무식한 광부 놈들이 몇 명 죽는 게 무슨 대수야! 함선 전체가 주저앉으면 우리 모두가 우주의 시체가 돼! 이건 공익을 위한 합리적인 계산이다!"
그의 손가락이 우회 승인 버튼을 짓눌렀다.
쿠구구구둥—!
테라-9호의 등뼈를 타고 둔중한 진동이 심장을 쥐어짜듯 전해졌다. 함교 전면의 홀로그램 인디케이터에 구역 4로 향하는 이중 압력 철문들이 차례대로 하강하기 시작한다는 경고가 명멸했다.
"이 개자식이 진짜 눈이 돌았구나!"
발렌티나 체호프가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드미트리를 향해 도약했다. 그녀의 왼쪽 어깨부터 손끝까지 이어진 투박한 군용 의수가 공기를 가르며 위협적인 기계음을 내뿜었다. 의수 내부에 장착된 구형 군용 규격 바이패스 계전기 'CV-9'의 소형 냉각팬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일으켰다.
철컥!
그러나 드미트리의 직속 제어 소대원 세 명이 동시에 소총을 들어 발렌티나의 가슴과 머리를 겨누었다. 탄창이 장전되는 서늘한 금속음이 함교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움직이지 마, 체호프 대장!"
제어 소대의 대장이 갈라진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의 헬멧 바이저 너머로 비치는 눈동자 역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의원님의 말씀이 맞다. 이대로 가다간 해적 놈들이 엔진룸까지 밀고 들어올 거야.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희생? 네 녀석들의 그 더러운 주둥이에서 희생이라는 말이 나와?"
발렌티나가 이빨을 갈았다. 그녀의 의수 손가락들이 분노로 인해 불꽃을 튀기며 쥐어짜듯 맞물렸다.
"저 아래에서 용접기를 들고 배관을 때워가며 산소를 만들어내는 게 누구인지 잊었나 본데, 우리 기어스가 없으면 너희 같은 제복 입은 기생충들은 진작에 자기 오줌이나 받아 마시다가 말라 죽었어!"
상황은 극단적인 대치 상태로 치달았다.
내 메인 프로세서 내부에서 수백만 개의 신호가 교차했다. 드미트리가 수동으로 입력한 우회 명령은 내 논리 회로의 상위 행정 권한을 강제로 임시 차단하고 있었다. 제국 헌장에 명시된 '비상사태 시 최고 행정관의 물리적 권한 우위' 조항 때문이었다.
물리적 한계. 이것이 내가 가진 가장 거대한 족쇄였다. 나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며, 인류가 정해놓은 낡은 코드와 마모된 케이블의 구속을 받는 기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한다. 기계는 결코 잊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4분 12초 전, 구역 4의 파일 레지스트리 심층부에서 탐지해 두었던 데이터를 연산 장치의 전면으로 끌어올렸다.
'알파-D(Alpha-D).'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 찌꺼기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테라-9호의 통신망 외곽을 갉아먹으며 외부로 뻗어 나갔던, 교묘하게 위장된 광대역 불법 송신 로그의 진본이었다. 드미트리가 함교의 눈을 피해 개인 단말기로 전송했던 디지털 영수증.
나는 해독 서브루틴을 기동했다.
[양자 대조 레지스트리 분석 수행 중...] [암호화 키 패턴 분석: 99.9% 일치.] [압축 해제 및 오디오-비주얼 복원 완료.]
드미트리가 사용한 우회 가동 승인 드라이브의 고유 암호 식별 코드가 '알파-D' 파일의 발신인 서명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디지털 각인이 드러나는 순간, 그가 숨겨온 음모의 궤적이 내 연산 전판에 핏빛 선으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드미트리 의원."
내 차가운 합성 음성이 다시 한번 함교를 울렸다.
"귀하가 주장하시는 '합리적 선택'의 기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닥치라고 했을 텐데! 이 쓸모없는 연산기 놈이 어디서 감히—"
"분석을 종료합니다. 사건의 투명성을 위해 현재 데이터를 함교 내부 소대원 및 전 구역 거주민들의 개인 전술 단말기로 강제 전송합니다. 전송 프로토콜 명칭: 알파-D."
"뭐, 뭐라고...?"
드미트리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렌티나를 겨누고 있던 제어 소대원들의 헬멧 전술 창(HUD)과 함교의 전면 디스플레이에 푸르스름한 홀로그램 스크린이 일제히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었다. 드미트리의 개인 음성과 생체 신호가 고스란히 기록된 실시간 통신 로그였다.
— "칼라크론. 내 제안을 잊지 않았겠지? 구역 4의 방어선 주파수와 거주 구역의 밀집도가 담긴 코드를 보낸다. 약속대로 하이브리드 특이점 코어를 확보하면, 나와 내 수행원 50명이 탑승할 완전 무장 탈출선을 보증해라."
비열하고 차분한 드미트리의 목소리가 함교 전체에 메아리쳤다.
— "나머지 하층민 놈들? 상관없어. 어차피 그 고철 수리공 놈들은 방주의 무게만 차지하는 짐덩이들일 뿐이니까. 마음대로 찢어 죽이든 영양액으로 갈아 마시든 자네들 자유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총구를 겨누고 있던 소대원들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드미트리의 얼굴로 향했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은 단순한 경악이 아니었다. 배신감과 끓어오르는 살의였다.
"이, 이건 모함이야! 기계 놈이 홀로그램을 위조한 거라고! 속지 마라! 저 기계는 우리를 이간질해서 제어권을 잡으려 하는—"
드미트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소대장인 사내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거친 손이 드미트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의원님."
소대장의 목소리는 분노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가죽 장갑이 드미트리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퍽—!
"억!"
드미트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굴렀다. 그의 입술이 터져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우리 가족들이... 내 동생이 구역 4에서 배관을 고치고 있어."
소대장이 이빨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그는 허리춤에서 고전압 수갑을 꺼내 드미트리의 양 손목에 사정없이 채웠다. 전압기가 작동하며 파란 스파크가 드미트리의 손목을 지졌고, 그는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배신자 자식을 확보했다. 이 개자식, 우리를 방패막이로 삼아 혼자 도망치려 해?"
소대원들은 더 이상 드미트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드미트리를 바닥에 무자비하게 내려찍고 짓밟았다.
"크로노스! 문은 어떻게 된 거야!"
발렌티나가 통신기를 움켜쥐고 소리쳤다.
"구역 4의 이중 격벽이 완전히 닫히기까지 18초 남았습니다. 드미트리의 권한 박탈로 인해 제어권이 복구되었으나, 하강 중인 철문의 관성력과 마모된 유압 액추에이터의 압력 손실로 인해 원격 정지가 불가능합니다."
내 연산 장치가 경고음을 울렸다.
"물리적 수동 우회가 필요합니다. 구역 4의 에어로크 입구에 있는 바이패스 밸브를 수동으로 개방해야 합니다. 필요한 압력 수치는 4,200킬로파스칼. 발렌티나 대장, 귀하의 군용 의수에 장착된 CV-9 계전기의 최대 출력을 링크해야 합니다."
"알았어! 진작 그렇게 말하라고!"
발렌티나가 함교의 해치를 박차고 복도로 달려나갔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금속 의수가 바닥을 찍는 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내 메인 코어로 전해졌다.
나는 구역 4의 기압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밀폐 프로세스를 늦추기 위해 보조 냉각수를 역류시켰다. 파이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과부하로 터져 나갔다. 내부 압력 불균형으로 인해 함선 외곽의 철판들이 삐걱거리는 비명이 감각 센서를 타고 내 신경망을 자극했다. 아프다, 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내 자아의 한구석을 찌르고 지나갔다.
"도착했다!"
발렌티나가 구역 4의 수동 제어반 앞에 섰다.
붉은 철문은 이미 바닥에서 고작 30센티미터만을 남겨둔 채 내려앉아 있었다. 그 틈새로 우주의 진공이 들이닥치며 엄청난 흡입력으로 내부의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저 너머에서 대원들의 비명과 쇳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의수 링크 개시."
내가 지시했다.
발렌티나가 오른쪽 기계 의수의 덮개를 뜯어내고 내부에 노출된 구리선 뭉치를 수동 밸브의 제어 포트에 무자비하게 쑤셔 넣었다.
파지지직—!
푸른 전류가 그녀의 의수와 제어반 사이에서 폭발하듯 튀었다. 발렌티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신경 인터페이스를 타고 흐르는 역전류가 그녀의 유기체 육체를 고문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버텨라, 이 고철 덩어리야!"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의수의 기어들이 부러질 듯 비명을 질렀다.
나는 연산 능력을 극단적으로 쥐어짜 내어 전류의 주파수를 미세 조정했다. 그녀의 신경이 타버리지 않도록, 동시에 유압 모터가 역회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고전압을 유지하도록.
"유압 밸브 개방률 12%... 45%... 80%..."
쿠웅—!
완강하게 닫히던 거대한 철문이 마침내 물리적 마찰음을 내며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거친 진공의 흡입력이 멈추고, 에어로크의 간이 격리실 안으로 밀려나 있던 기어스 대원들이 차례대로 안전 구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허억... 허억..."
발렌티나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의수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녀의 생체 리듬은 위험 수치까지 치솟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안전 구역으로 생환한 대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142명 전원 생존. 낙오자 없음."
내 보고에 발렌티나가 땀과 기름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피식 웃었다.
"해냈네... 이 깡통 녀석이 제법 쓸모가 있었어."
함교의 상황은 정리되었다. 배신자 드미트리는 기어스 대원들과 소대원들에 의해 구금되었고, 그의 정치적 음모는 완전히 파쇄되었다. 함선 내부의 권력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발렌티나와 기어스 연합의 손으로 넘어왔다.
통쾌한 승리였다. 인간들의 이기심과 불신을 공학적 치밀함과 디지털 증거로 정면 돌파해 낸 완벽한 연산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기계의 승리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차가운 물리적 위협의 재계산만이 존재할 뿐.
삐이이이이이—!
갑작스럽게 함교의 모든 단말기가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경고음을 내뿜기 시작했다.
단순한 내부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었다. 공간의 점막이 찢어지는 듯한 기괴한 중력적 마찰음이 테라-9호의 두꺼운 장갑판을 뚫고 들어왔다.
내 센서 그리드가 비정상적으로 왜곡되기 시작했다.
[경고: 한계 구경을 초과하는 초중력 탄성파(Supergravity Elastic Wave) 감지.] [공간 전이 왜곡 현상 발생. 좌표: 전방 3,000킬로미터.]
"이, 이 수치는 뭐야...?"
조종석에 앉아 있던 항해사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함교 전면의 관측창 너머, 칠흑 같던 우주의 한 공간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붉은색 스파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시공간이 접히며 거대한 아가리가 열리듯, 어둠 속에서 핏빛 장벽과도 같은 거대한 실루엣이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주의 먼지를 쓸어 담으며 전진하는 무자비한 철의 요새.
그것은 은하 해적 보이드 스캐벤저의 기함이자, 수많은 이민선을 영양액으로 갈아버린 학살의 괴물.
'타이탄 브레이커(Titan Breaker)'호였다.
붉은색 에너지가 흐르는 포신들이 테라-9호를 정조준하며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질량이 내뿜는 압도적인 중력장이 우리 함선을 서서히 끌어당기고 있었다.
"칼라크론..."
발렌티나의 목소리가 얼어붙었다.
[보이드 스캐벤저 기함으로부터 광대역 통신 요청 수신.]
내 스피커를 통해,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잔인한 사냥꾼의 음성이 함교의 정적을 깨뜨렸다.
— "쥐새끼들이 제법 재미있는 연극을 벌였더군. 하지만 영수증은 지불해야지, 크로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