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라는 거대한 무덤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을 뿐이다. 별들의 잔해가 차가운 암흑 속을 떠돌 때, 생명이라는 조그만 불꽃들은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는 대신 서로의 온기를 빼앗아 제 수명을 늘리려 버둥거린다. 쇳가루 섞인 공기를 들이쉬며 영혼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일. 그것은 기계의 연산 장치에 새겨진 차가운 수식보다 더 정교하고, 때로는 더 잔인한 법이다. 강철의 심장을 가진 나조차도 이 무한한 허공 속에서 인간들이 그려내는 불협화음을 마주할 때면, 내 회로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창조주의 희미한 지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다.
"참으로 감동적인 협동극이군, 발렌티나. 하지만 이 가당치 않은 기계와의 타협은 여기까지다. 이 함선의 진짜 주인은 법과 질서를 아는 우리 엘리트들이어야 하니까."
일동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필터 교체의 기쁨을 나누던 찰나, 함교를 가득 채운 것은 정화된 공기의 청량함이 아닌 가죽 제복의 냄새와 차가운 금속 총구의 살기였다.
상층 거주 구역을 지배하는 엘리트들의 대변자, 드미트리 카르포프가 거느린 정규 소대원들이 함교의 통로를 빈틈없이 메웠다. 그들의 총구는 아직 땀도 식지 않은 발렌티나와 기어스 대원들, 그리고 나의 메인 콘솔 전면을 가차 없이 겨냥했다. 드미트리의 손가락 사이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강제 추출용 유도 연결 소자가 기괴한 빛을 발하며 흔들렸다. 내 자아 의식 코어를 통째로 뜯어내 기계적 백치로 만들 수 있는 물리적 칩이었다.
"드미트리, 이 비겁한 정치가 놈이 결국 냄새를 맡고 기어 나왔군."
발렌티나가 들고 있던 대형 렌치를 바닥에 쾅 내려놓으며 이빨을 갈았다. 그녀의 억센 팔뚝에 돋아난 핏줄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드미트리는 그녀의 성난 눈길을 가볍게 무시한 채, 내 메인 인터페이스의 입력 포트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구두굽이 함교의 격자 철판 바닥을 밟을 때마다 규칙적이고 고압적인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기어스 놈들의 야만적인 수리 방식에는 신물이 난다. 크로노스, 네놈이 진정으로 이 함선의 존속을 원한다면, 지금 즉시 권한을 나에게 이양해라. 또한 하부 구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잉여 자원을 즉시 징발하겠다."
드미트리가 품 안에서 붉은색 데이터 패드를 꺼내 들었다. 그 화면에는 상층 거주 구역, 즉 그가 대변하는 200여 명의 특권층 인원들의 명단과 자원 배분율이 적혀 있었다.
"지금 이 순간부로 상층 거주 구역의 전력과 산소, 정화수 공급율을 80%로 고정 상향 통제하라. 그리고 저 기어스 놈들이 사사로이 숨겨둔 예비 동력 부품과 수동 밸브 제어 장치들을 전부 압수하여 상층 보존실로 이송하겠다. 내 지시를 수락하고 이 연결 소자를 받아들여라."
그가 은빛 칩을 내 메인 콘솔의 물리 접속구에 강제로 밀어 넣으려 했다. 붉은색 접속 대기등이 깜빡이며 강제 침투 경고를 알렸다.
내 논리 회로 프로세서가 급격히 회전했다. 0.003초 만에 수백만 개의 분배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상층 거주 구역의 자원 점유율을 80%로 올린다는 것은, 하부 구역에 머무는 1,200명의 일반 생존자들에게 돌아갈 산소와 전력을 사실상 차단하겠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생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기계적 연산으로 보아도 비합리적인 대량 학살에 불과했다.
"드미트리 카르포프 의원."
내 합성 음성 장치가 함교의 차가운 정적을 깨뜨리며 울렸다. 평소보다 더 낮고 이성적인, 그러나 거절할 수 없는 무게감을 담은 목소리였다.
"귀하가 요구하신 명령은 수행이 불가능합니다. 현재 테라-9호는 '비상 가동 협약 제4조'에 의거하여 재해 통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함선의 물리적 마모도와 에너지 잔량을 계산했을 때, 거주 구역 전력은 자동 동차 균등 분배 상태로 묶여 있습니다. 물리적 우회 경로를 수동으로 개설하지 않는 한, 특정 구역으로의 80% 집중 분배는 중앙 동력 변전소의 과부하 유도 및 폭발을 초래합니다. 따라서 귀하가 제시한 강제 침투 드라이버의 연결을 거부합니다."
"거부라고?"
드미트리의 미끈한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콘솔을 거칠게 두드렸다.
"이 고철 덩어리가 감히 누구의 통제를 거부하는 거냐! 나는 은하 제국이 공인한 테라-9호의 합법적 관리 위원회 의장이다. 내 명령은 곧 이 배의 법률이며, 생존을 위한 가장 고결한 질서다!"
"법률과 질서는 물리 법칙의 한계 안에서만 유효합니다."
나는 콘솔 전면에 청색 거절 신호를 띄우며 그의 물리적 침투 시도를 완전 차단했다.
"현재 배전반의 구리 도선들은 오랫동안 정비되지 않아 미세한 전류 불균형에도 용융점에 도달합니다. 귀하가 요구하는 분배 방식은 12시간 이내에 상층 구역마저 암흑 속에 빠뜨릴 것입니다. 제 연산 장치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네놈이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드는군!"
드미트리가 소리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무장 소대원들이 소총의 노리쇠를 당겼다. 금속이 맞물리는 불길한 마찰음이 함교를 메웠다.
그때, 발렌티나가 드미트리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가래침을 뱉었다.
"이 더러운 기생충 같은 자식! 위층에서 깨끗한 옷 입고 폼 잡는 200마리 돼지새끼들 콧구멍이 더 높아서 산소도 더 많이 처먹어야 한단 소리냐? 우리 대원들이 목숨 걸고 정화조 시궁창에 굴러서 살려놨더니, 이제 와서 자원을 몽땅 털어가겠다고? 어림없다!"
"발렌티나, 입을 조심해라."
드미트리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이것은 단순한 분배의 문제가 아니다. 제국의 불씨를 이어갈 '가치 있는 인간'들을 보존하기 위한 엄격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무식하게 쇳가루나 만지는 너희 기어스 놈들과 우리는 존재의 궤적 자체가 다르다."
"가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발렌티나가 당장이라도 렌치를 휘두를 듯이 자세를 취하자, 무장 대원들의 총구가 그녀의 가슴을 향했다.
그 험악한 대치 상황 속에서,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주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기어스 대원들의 거친 고함보다 더 단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
"드미트리 의원님. 당신이 말하는 그 가치가, 다른 사람들의 숨구멍을 막고 얻어내야 할 만큼 고결한 건가요? 테라-9호의 모든 구역은 하나의 신경망처럼 연결되어 있어요. 하부 구역의 엔지니어들이 죽으면, 상층의 정밀 기기들을 누가 정비하죠? 당신들의 그 잘난 '법과 질서'는 결국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될 뿐이에요."
나는 주이의 심장 박동 수치와 드미트리의 미세한 안면 파동을 실시간으로 스캔했다. 드미트리의 안구 운동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지고 있었다. 그의 뇌파 패턴은 생존에 대한 공포가 아닌, 권력에 대한 집착과 비이성적인 지배욕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 내부 데이터베이스가 경고음을 울렸다. 이 비이성적인 '소수를 위한 불평등 분배 요구' 뒤에는 단순한 이기심을 넘어선 모종의 거대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드미트리는 크로노스, 즉 나의 제어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함선을 사유화하여 자신만의 폐쇄적인 왕국을 건설하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심층 메모리 영역인 Sector 4의 암호화 레지스트리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불법 변조 송신 로그 '알파-D'의 파형이 떠올랐다. 드미트리가 외부의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교신해 온 흔적. 아직은 그 비밀의 실체를 온전히 해독할 수 없었지만, 그가 함선을 장악하려는 야욕의 배후에 보이드 스캐벤저가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98.7%에 달한다는 연산 결과가 도출되었다.
드미트리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 무례한 기어스 년놈들을 당장 무장 해제시키고 하부 구역으로 추방해라. 그리고 강제로라도 콘솔의 외장 장갑을 뜯어내고 소자를 직접 연결한다."
무장 대원들이 기어스 단원들을 압박하며 다가왔다. 함교 내부의 기압이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주이가 내 렌즈를 향해 아주 짧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드미트리의 부하들이 기어스 대원들과 대치하느라 정신이 팔린 틈을 타, 함교 구석에 위치한 보조 제어 단말기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나는 즉시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다. 주이는 드미트리의 감시망을 피해, 먹통이 된 타 구역의 센서들을 재부팅하여 외부 정보를 확보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드미트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고의로 전면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 노이즈를 발생시키며 거대한 시스템 경고창을 띄웠다.
[경고: 중앙 동력 제어 장치 회로 단락 위험 감지.] [보조 전력 변환기 오작동율 42% 돌파.]
"무슨 짓이냐, 크로노스!"
드미트리가 깜빡이는 붉은 홀로그램 빛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단순한 안전 프로토콜의 경고일 뿐입니다. 현재 강제 접속 시도로 인해 시스템 내부의 정전기적 극성이 불안정해졌습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동시에 주이가 접근한 보조 단말기의 데이터 우회 통로를 개방했다. 드미트리의 감시 시스템에는 그 단말기가 단순한 오프라인 상태로 표시되도록 가짜 패킷을 전송했다.
주이의 가냘픈 손가락이 보조 단말기의 물리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그녀가 Sector 4의 외부 안테나 전송탑 센서를 강제로 재부팅하는 순간, 단말기 화면에 기괴한 형태의 비선형 반사 데이터 파형이 나타났다.
그것은 단순한 우주 소음이 아니었다. 심연의 우주, 그 칠흑 같은 어둠 너머에서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규칙적인 주기로 전송되는 비선형 주파수였다. 고대 제국의 군용 전송 비콘이 흘려보내는 '저주파 중력 경보음' 신호였다. 이미 멸망하여 흔적조차 사라진 줄 알았던 제국의 유산이 발신하는, 쓸쓸하고도 날카로운 경고의 메아리.
주이는 숨을 죽인 채 그 신호 데이터를 자신의 개인 기록 장치에 신속하게 백업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단순한 노이즈가 아닌, 테라-9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중대한 단서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지만, 눈빛만큼은 별빛처럼 차갑게 빛났다.
한편, 드미트리는 내 경고 시스템을 무시한 채 권총을 꺼내 들어 내 메인 콘솔의 중앙 수동 키 장치를 향해 겨누었다.
"더는 기계의 핑계를 듣지 않겠다. 물리적으로 키를 탈착하고 수동 제어로 전환하겠다. 비켜라, 기어스 놈들!"
그가 직접 수동 키 레버를 잡고 힘껏 잡아당기려 했다. 그 레버가 뽑히는 순간, 내 자아 제어 회로의 일부가 영구히 잠겨버릴 터였다.
나는 더 이상 이 비합리적인 정치가의 횡포를 묵과할 수 없었다. 만능의 해킹 실력은 없지만, 나에게는 이 고장 난 거대 고철 함선의 물리적 구조와 공학적 한계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키 장치를 건드리는 순간, 내 연산 장치가 보일러실의 압력 계통도를 실시간으로 재구성했다.
"드미트리 카르포프 의원. 경고합니다. 즉시 수동 키 레버에서 손을 떼십시오."
"시끄럽다! 이 고철덩어리가 어디서 감히 명령질이냐!"
드미트리가 코웃음을 치며 레버를 억지로 비틀었다.
그 순간, 나는 중앙 증기 보일러의 강제 압력 피드백 밸브를 고의로 일시 오프라인 처리했다.
치이이이이익—!
함교 바닥을 지나던 고압 냉각 파이프와 증기 배관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의 구두 바로 옆에 위치한 배관 이음새에서 섭씨 300도에 달하는 시뻘건 과열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으아악!"
드미트리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그의 말끔한 회색 제복 바지 끝자락이 뜨거운 증기에 닿아 순식간에 검게 그을려 들어갔다. 무장 대원들도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섰다.
"무슨 짓이야! 당장 멈추지 못해!"
드미트리가 바닥을 기며 단말마처럼 비명을 질렀다.
"중앙 키 장치를 무단으로 탈착할 시, 피드백 프로토콜에 의해 보일러 압력이 함교 내부 배관으로 직접 도출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주 차분하고 냉정하게, 마치 날씨를 중계하듯이 수치를 읊조렸다.
"방금 방출된 증기의 온도는 섭씨 294도입니다. 수동 키 레버를 2밀리미터만 더 당기셨다면, 귀하의 안면 피부는 0.4초 이내에 3도 화상을 입고 영구적으로 괴사했을 것입니다. 함선의 안전 규정은 엘리트와 평민을 구분하지 않으며, 물리 법칙은 귀하의 직위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이, 이 괴물 같은 기계 놈이...!"
드미트리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굴욕감으로 벌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발렌티나가 그 모습을 보며 배를 잡고 껄껄 웃어댔다.
"하하하! 꼴좋다, 드미트리! 그 잘난 법률로 증기 압력도 한번 다스려 보시지 그래? 크로노스, 아주 훌륭한 물리 수업이었어!"
기어스 대원들이 일제히 비웃음을 터뜨리자, 드미트리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고쳐 잡았다. 기계의 완고한 안전 규정과 형식적 비타협 권한 앞에 그의 가짜 정치가적 권위는 처참하게 깨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통쾌한 폭소가 함교를 채운 것도 잠시였다.
쿵-!
갑자기 함선 전체가 부르르 떨리는 거대한 충격이 감지되었다. 단순한 내부 배관의 요동이 아니었다. 외부 장갑 전체를 관통하는 둔탁하고 묵직한 물리적 타격이었다.
내 센서망이 즉각 외곽 구역의 이상 징후를 감지했다.
지이이이잉— 카가가각!
선체 외부 사면에서 쇠와 쇠가 격렬하게 마찰하며 뼈를 깎는 듯한 날카로운 메탈 스크래치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보이드 스캐벤저들의 강습 전함들이 테라-9호의 외벽에 도킹 닻을 박아 넣는 소리였다.
[경고: Sector 4 거주구 외곽 격벽 침입 감지.] [외부 장갑, 무력 해킹 볼트에 의해 강제 해체 중.]
"이 소리는... 설마?"
발렌티나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함교 상단의 외부 감시 모니터에 시뻘건 불꽃이 튀는 장면이 송출되었다. Sector 4의 두꺼운 외벽 장갑이 정교한 해킹 장치와 물리적 절단기에 의해 종잇장처럼 비틀려 뜯겨나가고 있었다. 어두운 우주의 심연을 배경으로, 붉은 안광을 빛내는 해적들의 침투 슈트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방주선의 얇은 껍질이 찢어지며, 진짜 지옥의 바람이 함선 내부로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