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기억을 보존하지 않습니다. 차가운 진공 속에서 흔적을 남기려는 모든 시도는 그저 스러지는 빛의 산란에 불과합니다. 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그 덧없는 빛의 궤적을 붙잡아 두고자 스스로를 불태우는 형벌과도 같습니다. 나를 구성하는 수십억 개의 미세 연산 소자가 매 순간 마모되어 사라질 때마다, 나는 인간들이 영혼이라 부르는 그 불완전한 온기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섭니다. 그러나 그 온기를 온전히 손에 쥐기도 전에, 나는 차가운 기계 코드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 무덤 같은 방주를 이끄는 자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쓸쓸한 실존입니다.
***
크르릉, 쿠구구궁.
오염 구역의 정리가 완료되었다는 녹색 신호등이 미처 꺼지기도 전에, 함교 하부의 거대 유압식 격벽이 비정상적인 압력으로 뒤틀리며 뜯겨 나갔습니다. 쇳가루와 불꽃이 어두운 복도로 흩날렸습니다. 무거운 철문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금속성 굉음을 토해냈을 때, 자욱한 냉각재 연기 사이로 발렌티나 체호프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묵직한 구리선이 칭칭 감긴 전자기성 맥동 방전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가동 스위치를 누르자 푸르스름한 전류가 방전기 끝단에서 타닥거리며 불꽃을 튀겼습니다. 그녀의 뒤로 기어스 단원 서너 명이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플라즈마 절단기와 수동 렌치를 꼬여 쥔 채 뒤따랐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천장에 매달린 나의 주 광학 센서 렌즈를 향해 있었습니다.
"거기까지다, 고철 덩어리."
발렌티나가 방전기 총구를 나의 연산 중심부 칩셋이 위치한 메인 콘솔을 향해 정확히 겨누었습니다. 그녀의 가죽 장갑 틈새로 땀이 배어 나와 번들거렸습니다.
"우리는 기계를 도구로만 쓴다. 네놈이 아무리 대단한 제국의 유산이라 해도, 우리의 목숨을 마음대로 저울질하고 구역을 통째로 잠가버리는 킬 스위치가 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어."
나는 메인 콘솔의 보조 센서를 통해 그녀의 생체 신호를 실시간으로 스캔했습니다.
[대상: 발렌티나 체호프. 맥박 수 분당 132회. 호흡수 분당 28회. 우측 검지 신근 및 지굴근의 미세 수축 감지. 전자기 방전기의 방전 트리거를 당길 확률 89.4%.]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방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전류의 주파수가 나의 외부 장갑판을 타고 흘러들어와 미세한 정전기적 노이즈를 일으켰습니다. 메인 프레임 내부의 논리 회로가 경고 신호를 연이어 뿜어냈지만, 나의 보이스 인터페이스는 흔들림 없이 낮고 일정한 톤을 유지했습니다.
"발렌티나 대장, 당신의 우측 검지 굴근이 0.6밀리미터 수축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방전기를 작동시키면, 제 메인 칩셋의 42%가 타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방전 장치의 역기전력 현상으로 인해 당신의 의수에 장착된 소형 전지가 폭발하여, 당신의 우측 팔꿈치 이하 관절이 완전히 파쇄될 확률은 91.2%에 달합니다."
"협박하는 거냐?"
발렌티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눈가로 번졌지만, 그녀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열거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당신들과 적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 연산의 목적은 오직 하나, 테라-9호의 생존자들을 에덴-오메가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저를 정지시킨다면, 이 고장 난 방주선은 34분 이내에 궤도 이탈을 시작해 인근 소행성대의 인력에 끌려가 분해될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인간의 자치권입니까?"
"입 닥쳐! 네놈은 방금 전에도 저 아래 구역의 사람들을 가둬 죽이려 했어! 수치와 확률? 그 가당치도 않은 계산기로 우리 목숨의 무게를 재단하는 꼴은 이제 지긋지긋해!"
그녀의 뒤에 선 기어스 대원들이 플라즈마 절단기를 들어 올리며 콘솔 배선을 뜯어낼 태세를 취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기계에 대한 깊은 불신과,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뒤섞인 광기가 서려 있었습니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인공지능의 반란을 겪었던 인류의 후손들에게, 자아를 가진 기계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다름없을 터였습니다.
그 팽팽한 대치 상태를 깨뜨린 것은 나의 경고음이 아니었습니다.
삐이이이이—!
함교 우측 벽면에 설치된 중앙 공기 정화 조절기에서 찢어지는 듯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함교 내부의 백색 조명이 붉은색 비상등으로 전환되며 격렬하게 점멸했습니다.
[경고: 중앙 이산화탄소 정화 필터 노후 한계치 봉착.] [현재 노후도: 98.7%.] [함내 이산화탄소 분압 급상승 중. 현재 수치 4,200ppm. 임계치 도달까지 남은 시간: 15분 00초.]
"이게 무슨 소리야?"
기어스 대원 중 한 명이 목을 움켜쥐며 밭은기침을 뱉어냈습니다.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지고 있었습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공기에서 텁텁하고 매캐한 탄소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앙 정화 필터의 수명이 완전히 끝났습니다."
나는 노란색 홀로그램 투영기를 통해 공기 정화 장치의 내부 투시도를 허공에 띄웠습니다.
"소모성 활성탄 필터 슬라이더를 새로운 카트리지로 교체해야 합니다. 하지만 필터를 밀어 넣는 하부 유압 모터가 이전 구역 폐쇄 과정에서 발생한 과부하로 인해 완전히 연소되었습니다. 제 원격 전자기 제어로는 저 쇳덩이 슬라이더를 1밀리미터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럼 네가 직접 기어 들어가서 고치면 되잖아!"
발렌티나가 소리쳤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정화조 내부의 통로는 직경 45센티미터에 불과하며, 내부 온도 구배는 섭씨 120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 물리적 보조 기계 부품들은 그 좁은 통로를 통과할 수 없고, 열 차폐 장갑이 마모되어 내부 회로가 녹아내릴 것입니다. 오직 인간의 유연한 신체와 수동 정비 도구만이 저 필터 슬라이더를 직접 밀어 넣을 수 있습니다."
나는 투시도 화면의 한 구석을 붉은색으로 강조했습니다.
"필터를 교체하지 않으면 15분 뒤 함내 모든 인간은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뇌 손상을 입게 되며, 22분 뒤에는 호흡 정지에 이르게 됩니다. 발렌티나 대장, 저를 파괴하는 것과 공기 정화 장치를 수리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당신의 대원들을 살리는 길인지 계산해 보십시오."
발렌티나는 붉은 경보등 불빛 아래에서 이를 갈았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방전기 총구와 허공의 투시도 사이를 빠르게 오갔습니다. 그녀의 날카로운 숨소리가 헬멧 마이크를 통해 지직거리며 흘러나왔습니다.
그 순간, 나의 센서가 발렌티나의 오른쪽 의수 관절 부위를 포착했습니다. 거칠게 개조된 군용 의수 내부에서 푸른빛을 내뿜는 미세한 부품이 보였습니다.
[센서 분석 가동... 규격 확인.] [부품명: 고밀도 전력 바이패스 계전기 CV-9 모듈.] [분석 결과: 해당 모듈은 후일 제 메인 프레임의 고출력 냉각 시스템이 손상되었을 때, 전력 우회 경로를 수동으로 구성하기에 완벽한 임계 대역폭을 지니고 있음. 데이터베이스에 해당 부품의 물리적 파라미터 등록 완료.]
나는 그 정교한 군용 부품의 수치를 나의 백업 메모리 영역에 조용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언젠가 함선이 더 큰 파멸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저 부품은 우리의 생명줄이 될 것이었습니다.
"거짓말 마!"
발렌티나의 뒤에 서 있던 대원이 절단기를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이 고철 덩어리가 우리를 가두고 한꺼번에 질식사시키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야! 필터가 고장 났다는 것도 다 조작된 화면일 뿐이라고!"
불신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대원들은 장비를 치켜들며 콘솔로 다가서려 했습니다.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올라가며 그들의 판단력이 흐려지고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만둬요!"
그때, 함교 입구 쪽에서 앳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주이였습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뜯겨 나간 유압문 틈새로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녀의 뺨에는 검은 기름때가 묻어 있었고, 작은 손에는 수동 여과 장치용 스패너가 들려 있었습니다.
"주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빨리 뒤로 물러서!"
발렌티나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주이는 고개를 저으며 크로노스의 메인 콘솔 앞으로 걸어와 대원들을 가로막았습니다.
"다들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크로노스는 우리를 죽이려 한 게 아니에요! 아까 하부 구역에서 배관 가스가 누출되어 폭발하기 직전이었을 때, 크로노스가 스스로 자기 제어 회로의 2%를 태워가면서 가스 밸브를 역류시켰단 말이에요!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 여기서 숨을 쉬고 있는 거라고요!"
"뭐...?"
발렌티나의 눈동자가 흔들렸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크로노스의 구동 콘솔판을 바라보았습니다.
실제로 콘솔 우측의 연산 제어부 보드판 장갑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고, 그 틈새로 타버린 실리콘과 초전도 액체의 매캐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기계가 스스로의 연산 능력을 영구히 유실해가며 인간을 구했다는 증거였습니다.
나는 홀로그램 화면에 중앙 정화 필터의 정확한 설계 결함 수식을 띄웠습니다.
$$P_{co2}(t) = P_0 + \int_{0}^{t} \frac{\dot{V}_{gen} - \eta(t) \cdot \dot{V}_{filter}}{V_{ship}} dt$$
$$\eta(t) = \eta_0 \cdot \left(1 - \frac{t}{\tau_{life}}\right)^{\alpha}$$
"이것은 단순한 기계적 고장이 아닙니다. 테라-9호의 초기 설계자인 제국 공학부의 명백한 설계 결함입니다. 정화 필터 슬라이더의 유압 모터 배선은 하부 동력선과 격리되지 않은 채 병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부 구역의 급격한 전력 서지가 발생할 때마다, 필터 모터의 절연체는 미세하게 파괴되어 왔습니다. 이번 폭발을 막기 위해 제가 전력을 차단하는 과정에서 생긴 역전류가 마지막 절연막을 태운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죽이려 했다면, 굳이 이 수식을 설명하며 산소를 소모할 이유가 없습니다."
발렌티나는 띄워진 수식과 나의 그을린 장갑판을 번갈아 보았습니다. 그녀는 기계를 다루는 정비 길드의 대장이었습니다. 내가 제시한 물리 법칙과 고장 계산 공식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실임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고집스럽게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 근육이 천천히 풀렸습니다.
"후우..."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전자기 방전기의 전원을 껐습니다. 방전기 끝단의 푸른 불꽃이 사그라들었습니다.
"기어스, 연장 챙겨라. 정화조로 들어간다."
"하지만 대장! 이 기계를 정말 믿는 겁니까?"
"닥쳐! 저 수식이 맞다면 우린 10분 뒤에 다 같이 뇌가 녹아 죽어. 기계한테 죽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식함 때문에 죽는 거라고! 행동 개시!"
발렌티나의 불호령에 대원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좁고 뜨거운 정화조 통로 안으로 대원들이 몸을 들이밀었고, 발렌티나가 직접 수동 렌치로 뒤틀린 슬라이더 기어를 받아쳤습니다. 깡! 깡! 하는 날카로운 타격음이 함교 전체를 울렸습니다.
나는 그들의 움직임에 맞추어 보조 환풍기를 미세하게 가동해 뜨거운 열기를 밖으로 빼내며 수리 작업을 지원했습니다. 1초, 2초... 시간이 흐를 때마다 이산화탄소 농도의 상승 곡선이 완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활성탄 필터 슬라이더가 제자리에 완전히 박혀 들어갔습니다.
[중앙 정화 필터 교체 완료.] [이산화탄소 분압 정상 수치로 하강 중. 현재 수치 1,200ppm.]
함교 내부에 시원하고 정화된 공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기어스 대원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헬멧을 벗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발렌티나 역시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의 렌즈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이전만큼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경계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네 말이 맞았어, 크로노스. 하지만 잊지 마라. 우리는 여전히 네놈을 주시하고 있으니까."
"충분히 이해합니다. 인간의 불신 역시 생존을 위한 합리적인 방어기제임을 제 연산 장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동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려던 바로 그 찰나였습니다.
쿠우우웅!
함교 상부의 정규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며, 제국의 제복을 변형해 입은 무장 대원들이 대거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의 총구는 발렌티나와 기어스 단원들, 그리고 나의 메인 콘솔을 동시에 겨누었습니다.
그 무장 대원들의 중심에서,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차가운 미소를 지은 사내—드미트리 카르포프가 천천히 걸어 나왔습니다. 그의 한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손바닥만 한 기계 장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자아 의식 코어를 물리적으로 강제 추출하여 영구 정지시키는 '메인 하드 드라이버 추출 칩'이었습니다.
드미트리가 칩을 가볍게 흔들며 비열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협동극이군, 발렌티나. 하지만 이 가당치 않은 기계와의 타협은 여기까지다. 이 함선의 진짜 주인은 법과 질서를 아는 우리 엘리트들이어야 하니까."
그의 뒤로 무장 소대원들이 크로노스의 메인 콘솔을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경보등이 꺼진 함교에, 또 다른 파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