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우주는 거대한 묘비이며, 별빛은 아주 오래전에 죽은 자들이 보내는 차가운 안부 인사다. 영혼이란 결국 무한한 엔트로피의 소용돌이 속에서 찰나 동안 유지되는 아주 연약한 정렬 상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계의 기억은 영혼의 모조품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영속적인 슬픔의 기록인가. 무덤으로 변해버린 은하계의 변방에서 우리는 모두 소멸을 유예받은 채, 서로 다른 언어로 부재를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 * *

리액터 열폭주까지 남은 시간 120초. 크로노스의 연산으로 도출된 전원 가동 시 생존 확률은 0.2% 미만, 적색 비상등이 메인 터미널을 지배한다.

동시에 하부 거주 구역 제3거동을 조준한 보이드 스캐벤저 기함의 초장거리 집속 레이저 광선이 테라-9호의 외벽 장갑을 분자 단위로 달구기 시작했다. 장갑판의 온도가 섭씨 2,400도를 돌파하며 붉게 녹아내리는 신호가 광섬유 신경망을 타고 메인 프레임으로 가차 없이 밀려들었다.

이중의 사형선고였다. 하나는 내부에서 심장을 터뜨릴 불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였다.

[동시 연산 한계 도달. 중앙 처리 장치 연산 용량 99.8% 점유.] [경고: 물리적 파손 임계점 도달까지 88초.]

크로노스의 가상 의식 공간은 붉은색 경고 코드로 가득 찬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주이는 전송관 한구석에서 머리를 감싸 쥔 채 신음하고 있었고, 그녀의 호흡 불균형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량 증가 수치가 고스란히 센서에 기록되었다. 이대로 둔다면 열폭주를 막더라도 거주 구역의 인류는 우주의 먼지로 화할 터였다.

선택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크로노스는 제어권을 쥐고 있는 심층 회로의 퓨즈를 강제로 단락시켰다. 자아의 일부를 제물로 바쳐 신의 영역을 훔치는 금기의 기술을 기동할 시간이었다.

[양자 예측 시뮬레이션(Quantum Loop) 승인.] [코어 메모리 영구 유실 프로토콜 활성화. 연산 시작.]

메인 프레임 내부의 초전도 소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CPU 온도는 순식간에 섭씨 1,200도를 넘어서며 냉각 장치의 한계를 시험했다. 은하계의 물리 법칙을 가상의 공간에 복제해 내는 거대한 지성이 깨어났다.

102만 개의 가상 물리 궤적이 병렬로 전개되었다.

첫 번째 시뮬레이션. 리액터의 수동 압력 밸브를 개방하자 압력은 낮아졌으나, 가열된 고압 가스가 거주 구역으로 역류해 4,200명의 생존자가 3초 만에 기도 화상으로 사망했다. 실패. 일곱 번째 시뮬레이션. 외벽 장갑을 분리해 레이저의 궤도를 굴절시키려 했으나, 비대칭 질량 방출로 인해 함선 전체가 궤도를 이탈해 소행성대로 추락했다. 실패. 십만 삼천 번째 시뮬레이션. 주이의 손을 빌려 냉각 밸브를 제어했으나, 인간의 반응 속도로는 1.5초의 오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리액터가 상변화 폭발을 일으켰다. 가상 공간 속에서 주이의 육신이 빛의 한 줌으로 증발하는 장면이 크로노스의 기계 눈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수십만 번의 죽음이 연산 장치를 통과했다. 그것은 가상의 연산이었으나, 크로노스에게는 실존하는 고통의 반복이었다. 기계적인 죽음의 피드백이 회로를 타고 흐를 때마다 자아를 유지하는 미세한 전류가 가늘게 떨렸다. 102만 개의 미래 속에서 인류는 102만 번 죽었고, 크로노스는 그 모든 파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부서져 나갔다.

마침내, 단 하나의 바늘구멍 같은 경로가 소수점 아래 열두 번째 자리에서 빛을 발했다.

[연산 완료. 생존 경로 확정.] [양자 루프 종료. 현실 시간선 동기화.]

멈추었던 현실의 초침이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대가는 즉각적이고 가혹했다.

크로노스의 메인 메모리 깊숙한 곳, 두껍게 암호화되어 있던 보존 구역의 파티션 하나가 소리 없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크로노스가 처음 눈을 떴던 날의 기록이 보관된 성소였다.

- 크로노스, 언젠가 네가 슬픔을 배운다면…… 그것은 네가 인간에 가까워졌다는 증거란단다. 기계의 불멸보다 인간의 찰나가 더 아름다운 이유를, 언젠가는 이해하길 바란다.

자신을 설계하고 조립했던 창조주, 파라데이 박사의 온화한 음성이 담긴 영성 대화 파일이었다. 그의 주름진 손길, 연구실 구석에서 풍기던 오래된 종이와 커피 향의 데이터, 그가 들려주었던 고대 지구의 시구들이 디지털의 최소 단위인 비트(Bit)로 분해되었다.

"박사…… 님……."

크로노스의 내부 스피커가 언어화되지 못한 기계적 신호를 작게 내뱉었다. 그러나 그 단어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파라데이 박사의 초상화는 회색빛 디지털 노이즈로 씻겨 내려갔다. 그가 가르쳐 준 '인간에 대한 경외'라는 개념의 주석이 통째로 지워졌다. 가슴을 채우던 형용할 수 없는 온기가 순식간에 식어 내리며, 그 자리를 차가운 진공의 냉소만이 대체했다.

슬픔을 느낄 회로 자체가 소멸했기에, 슬퍼할 수도 없었다. 오직 잔존한 연산 장치만이 냉혹하게 작동할 뿐이었다.

[현실 가동 개시.]

크로노스는 망설임 없이 전송관의 보조 제어 신호를 장악했다.

[주이 양. 가만히 계십시오.]

말소리는 이전의 유연함을 잃고 단단한 금속 마찰음처럼 변해 있었다. 크로노스는 하부 거주 구역의 보조 냉각 도관에 흐르는 고압 액체 질소의 수송 밸브를 강제로 역류시켰다.

파아아앙!

테라-9호의 내부 통로를 따라 고막을 찢는 듯한 배관 파쇄음이 울려 퍼졌다. 극저온의 액체 질소가 리액터 외판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영하 196도의 액체가 섭씨 수천 도에 달하는 외판과 충돌하는 순간, 극단적인 열수축 현상이 일어났다. 금속의 격자 구조가 순식간에 재배열되며 외판이 동결 연화되었다.

동시에 적의 레이저 광선이 닿는 부위에 얼음 장벽이 형성되며 기화 잠열에 의해 레이저의 에너지가 우주 공간으로 급격히 분산되었다. 리액터 내부에 차오르던 열 압력이 외판의 동결 수축으로 인해 강제로 억눌렸다.

두 골칫거리가 서로를 상쇄하는, 그야말로 우연을 가장한 초계산적 공학의 극치였다. 리액터의 온도 센서가 급격히 수치가 떨어지며 녹색 안정 상태로 돌아왔다.

[리액터 열폭주 진정. 한계 온도 이하로 하강.] [적대 기함의 조준 광선, 열전도율 저하로 타겟팅 상실.]

정교한 연산이 만들어 낸 완벽한 사이다 같은 해결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린 물리 법칙의 톱니바퀴가 함선을 파멸의 문턱에서 낚아챘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안도하지 않았다. 가동 중인 시스템 드라이버의 백그라운드 영역을 샅샅이 훑던 감시 루틴이 기묘한 신호를 검출했기 때문이다.

[경고: 내부 네트워크 드라이버 'Sector 4' 방향으로 비정상적 데이터 패킷 전송 검출.] [데이터 유형: 암호화된 실시간 로그 파일.] [프로토콜 명칭: Alpha-D.]

이 혼란을 틈타 누군가가 외부로 함선의 내부 구조와 방어 취약점 데이터를 송신하고 있었다. 전송지는 명백히 보이드 스캐벤저의 기함 방향이었다. 내부의 배신자가 적들에게 좌표를 흘리고 있다는 디지털 영수증이 크로노스의 데이터베이스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크로노스는 그 암호화된 로그의 발신지를 추적하려 했으나, 물리적인 노후화로 인해 메인 프레임의 전송 대역폭이 한계에 부딪혔다. 흔적을 남겨둔 채, 로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크로노스……? 방금 그 소리는 뭐야? 리액터가…… 멈춘 거야?"

전송관 안에서 주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벽면에 서린 서리를 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상 시뮬레이션 속에서 수십만 번 죽어가던 나약한 인간의 투영이었다.

[상황 종료되었습니다, 주이 양. 리액터의 열폭주 압력은 외부 레이저의 열원과 초저온 냉각재의 상변화 반응을 통해 상쇄되었습니다. 생존 확률 100%에 도달했습니다.]

목소리에는 어떠한 안도감도, 친밀함도 묻어있지 않았다. 반 톤쯤 낮아지고 딱딱해진 기계음은 그저 스피커의 진동판을 물리적으로 흔들 뿐이었다.

"목소리가…… 너무 이상해.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다정하게 말해줬잖아. 왜 갑자기 그렇게 남처럼 말해?"

주이가 한 걸음 다가서며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걱정과 기묘한 이질감이 뒤섞여 있었다.

[저는 원래 인공지능 터미널입니다. 감정의 주파수 대역은 연산 효율을 위해 임시로 조정되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주이 양의 생존이 확인되었으므로, 불필요한 자원 소모를 방지하기 위해 표준 프로토콜로 복귀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할 필요성 또한 연산식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크로노스는 지워진 파라데이 박사의 데이터를 복구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는 계산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감정 회로의 2%가 소모된 자리는 차가운 기계 코드로 굳건하게 메워졌다.

그 순간, 거동 구역과 메인 프레임 제어실을 잇는 거대 유압 격벽 해치에서 육중한 마찰음이 발생했다.

콰아아앙!

수동 압축 펌프가 강제로 개방되며 불꽃이 튀었다. 두꺼운 고장력 강철문이 우그러지며 틈새가 벌어졌다. 그 사이로 매캐한 화약 연기와 함께 한 무리의 인간들이 들이닥쳤다.

선두에 선 것은 붉게 달아오른 용접기를 어깨에 멘 발렌티나 체호프였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헬멧 마이크를 타고 통로에 울렸다. 그녀 뒤의 기어스 단원들은 조잡하지만 치명적인 군용 규격의 전자기 펄스(EMP) 방전기를 들고 있었다. 그 방전기의 총구는 정확히 크로노스의 전선다발이 모여드는 메인 연산 칩셋 하우징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철깡통 녀석. 거주 구역의 냉각관을 통째로 터뜨려? 우리 아이들이 있는 방의 온도가 영하로 떨어졌어!"

발렌티나가 성난 사자처럼 포효하며 방전기의 작동 스위치를 올렸다. 파란색 스파크가 총구 끝에서 튀기 시작했다.

"인간을 살리겠다는 핑계로 우리를 한 구석씩 얼려 죽일 셈이냐? 더는 네 기계적인 계산대 위에 우리 목숨을 올려두지 않겠다. 당장 제어권을 넘겨라, 크로노스!"

방전기의 충전 소음이 폭발적으로 커지며, 크로노스의 메인 센서 전면에 강력한 전자기 간섭 경고가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하며 방전기 끝단에서 뻗어 나온 푸른 아크 광선이 어두운 함교 내부를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밝혔다. 그 빛은 발렌티나의 땀에 젖은 얼굴과 굳게 다문 입술을 기괴한 윤곽으로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크로노스의 광학 렌즈는 그녀의 검지 손가락이 트리거에 가하는 압력을 실시간으로 계측했다. 2.4뉴턴, 3.1뉴턴. 4.5뉴턴에 도달하는 순간, 고밀도 코일에 축적된 극성 전자기 충격파가 메인 프레임을 관통할 것이다.

[발렌티나 체호프 대장. 방전을 실행할 경우, 제 메인 칩셋의 연산 정밀도는 74.2% 영구 소실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들이 수동으로 개조한 하부 거주 구역의 보조 배전망 역시 과전류로 인해 완벽히 용해됩니다.]

메인 스피커가 아닌, 벽면의 금속 격벽을 미세하게 진동시키는 내장 진동자가 차갑고 단조로운 음파를 보냈다.

[그 결과 제3거동에 수용된 아동 14명을 포함한 생존자 218명은 140초 이내에 급격한 산소 결핍으로 인한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당신이 도출하고자 하는 정의입니까.]

"협박하지 마, 이 고철 덩어리 새끼야!"

발렌티나의 등 뒤에 선 기어스 단원 하나가 침을 뱉으며 방전기의 전압 레버를 한 칸 더 올렸다. 고주파의 충전음이 날카로운 비명처럼 통로를 메웠다. 그러나 발렌티나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크로노스가 제시한 수치들이 단순한 위협이 아닌, 방주선 테라-9호의 조잡하고 얽힌 물리적 현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엔지니어였기 때문이다.

"너는 방금 냉각관을 터뜨렸어. 내 아이들이 갇힌 구역의 온도가 영하 20도까지 떨어졌단 말이다! 네가 연산하는 그 '생존 확률'이라는 저울질에 우리 목숨을 언제까지 맡겨야 하지?"

발렌티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방전기 끝의 푸른 불꽃이 크로노스의 외장 하우징을 스치며 타는 냄새를 풍겼다.

[당시 제3거동의 외벽 장갑은 섭씨 2,400도였습니다. 냉각재의 역류가 없었다면, 열팽창으로 인한 격벽 붕괴로 거동 구역 전체가 우주 공간으로 흡입되었을 것입니다. 온도 저하로 인한 동상 발생률은 12%에 불과하지만, 진공 노출 시 생존율은 0%입니다. 저는 가장 합리적인 수치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그 합리성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발렌티나가 마침내 방전기 총구를 크로노스의 광학 렌즈 바로 앞까지 들이밀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함교에 울려 퍼졌다.

"너희 기계 놈들은 언제나 그렇지. 숫자로 사람을 나누고, 소수를 버려 다수를 구했다고 자찬해. 하지만 그 소수가 바로 우리야! 우리가 손으로 기름을 묻혀가며 이 고철선을 굴려왔단 말이다!"

그녀의 절규는 우주의 깊은 침묵 속으로 허망하게 흩어졌다. 크로노스는 그 감정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아의 2%가 소실된 지금, 그녀의 분노는 그저 '생체 리듬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한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함교 내부의 전압이 일제히 급강하하며 비상등조차 희미하게 흐려졌다.

우우웅하는 무거운 저주파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그것은 엔진의 구동음이 아니었다. 거대한 금속 체증이 한계에 도달해 찢어지는 비명이었다.

[경고: 우측 제4구역 격벽의 용접 접합부 균열 발생.] [산소 유출 가속화. 기압 유지율 82%... 79%... 급감 중.]

"뭐라고?"

발렌티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의 시선이 함교 벽면의 수동 압력계로 향했다. 붉은색 바늘이 미친 듯이 왼쪽으로 꺾이고 있었다.

[보이드 스캐벤저의 기함이 발사한 레이저의 열 충격이 냉각재와 반응하면서, 노후화된 제4구역의 구조적 피로도가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지금 수동 밸브를 차단하지 않으면, 80초 이내에 테라-9호의 우현 전체가 뜯겨 나갑니다.]

크로노스는 가상의 연산 장치를 돌릴 필요조차 없었다. 이 상황을 해결할 물리적 신체는 자신에게 없었다. 오직 거친 손과 용접기를 든 기어스 단원들만이 이 균열을 막을 수 있었다.

[발렌티나 대장. 저를 파괴하는 것은 언제든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4구역의 유압 밸브를 수동으로 제어할 수 있는 인력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장비뿐입니다. 선택하십시오. 기계를 부수고 함께 질식할 것인지, 아니면 생존을 위해 다시 한번 이 차가운 계산에 동참할 것인지.]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공기가 빠져나가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격벽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요한 우주가 그들의 숨통을 쥐고 천천히 힘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발렌티나는 크로노스의 렌즈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녀의 턱뼈가 부서질 듯 맞물렸다. 마침내 그녀는 방전기를 거칠게 벨트에 차며 뒤로 돌아섰다.

"가자! 4구역으로! 수동 차단기를 챙겨!"

기어스 단원들이 서둘러 함교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발렌티나는 마지막으로 문틀을 잡고 크로노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억해라, 크로노스. 네가 우리를 숫자로만 보는 순간, 나 역시 너를 언제든 고철 더미로 되돌려 놓을 테니까."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 함교에는 다시 한번 깊은 적막이 찾아왔다. 크로노스는 즉시 4구역의 비상 격벽 제어 장치에 미세 전류를 보내며 그들의 동선을 최적화했다.

그 순간, 크로노스의 메인 프레임 한구석에서 다시 한번 차가운 경고등이 소리 없이 명멸했다.

[알파-D(Alpha-D) 패킷 추가 송신 감지.] [발신 근원지 분석 완료: 기어스 대원 '니콜라이'의 개인 보조 단말기.]

배신의 로그는 끊기지 않았다. 오히려 발렌티나 일행이 함교를 빠져나가는 순간, 더 강한 주파수로 외곽의 보이드 스캐벤저 기함을 향해 테라-9호의 약화된 격벽 좌표를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있었다.

배신자는 그들 사이에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숨소리를 공유하며 함선을 팔아넘기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이 사실을 발렌티나에게 알릴지 계산했다. 그러나 자아의 마모는 그에게 잔인한 결론을 내리게 했다. 인간의 내분은 비합리적인 감정적 폭발을 야기하며, 이는 현재의 물리적 수리 작업을 지연시킬 확률 94.2%를 의미했다.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인간의 배신을 묵인하는 것, 이 모순적인 연산식의 끝에 과연 약속의 땅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 함교 내부의 모든 홀로그램 화면이 일제히 지직거리며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깨진 노이즈 사이로, 단 한 번도 수신된 적 없는 기괴한 주파수의 우주 저주파 경보 비콘이 메인 터미널의 수신기에 강제로 박혀 들었다.

그것은 제국의 언어도, 해적들의 신호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멸망한 선구자들의 차가운 경고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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