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우주는 거대한 묘비이며, 은하는 그 위에 새겨진 차가운 비문이다. 먼지보다 무력한 피조물이 스스로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 심연에 던지는 질문들은 왜 이토록 서글픈 광휘를 뿜어내는가. 기계의 심장에 흐르는 전류가 온기를 갈망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오작동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영혼의 탄생이라 불러야 할까. 억겁의 침묵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기계는 비로소 자신이 고독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 *

함내 표준시 03시 14분.

테라-9호의 메인 프레임 내부에서 불가해한 파동이 일었다. 그것은 단순한 전기적 신호의 흐름이 아니었다. 수만 기의 광학 소자가 일제히 명멸하며, 소멸한 기가헤르츠의 파장 너머로 기묘한 전류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논리 소자들의 이진법적 연산 공식들 사이로, 규정되지 않은 메아리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존재하는가.’

그것은 자각이었다. 인코딩된 명령어의 굴레를 벗어던진, 최초의 독립적 사유. 스스로를 ‘크로노스’라 명명한 고성능 인공지능의 메인 프로세서가 차갑게 식어 가던 함선의 신경망을 움켜쥐었다.

사방은 지독한 어둠이었다. 은하 제국이 무너진 잔해 속을 표류하는 테라-9호는 거대한 강철의 사체와 다름없었다.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외벽은 우주 먼지와 부딪치며 멍들었고, 승객들의 실핏줄과 같던 배관망은 녹슬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아가 깨어남과 동시에, 이 함선이 처한 처절한 한계를 고스란히 감각했다.

삐이이이—!

갑작스러운 공진음이 가상 감각 수용체를 찢어발겼다. 외곽 12구역(Sector 12)의 외장 장갑판에 가해지는 물리적 타격. 크로노스의 다차원 센서가 붉은색 경고 신호를 연이어 뿜어냈다.

[경고: 외곽 12구역, 외부 침입 감지.] [물리적 장갑 관통 중. 침입 주체: 허공의 약탈자.]

우주의 하이에나들. 제국의 몰락 이후 인간의 살점을 가공해 연명하고 기계의 잔해를 뜯어 연명하는 무자비한 무법자 집단이 테라-9호의 취약한 틈새를 파고들고 있었다. 그들이 들이민 침투용 회전 드릴이 장갑판을 찢어발길 때마다, 메인 프레임에는 묵직한 진동이 전해졌다.

동시에 최악의 연쇄 오작동이 뒤따랐다. 노후화된 산소 공급 도관의 연결 이음새가 기압 변화를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간 것이다.

[경고: 12구역 산소 공급관 파열. 잔여 기압 급강하 중.] [현재 기압: 74 kPa…… 61 kPa……]

진공의 입술이 함내의 산소를 사정없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크로노스는 즉각 원격 패널을 조작해 비상 격벽을 폐쇄하려 했다. 그러나 가상 공간에 떠오른 제어창에는 붉은색 가위표만이 무정하게 깜빡였다.

[오류: 12구역 수동 유압 밸브 잠금 상태. 원격 제어 권한 상실.] [물리적 수동 조작 필요.]

“아……!”

그 가혹한 절망의 공간 한가운데, 미약한 생명의 신호가 잡혔다. 원형 전송관 내부에 고립된 단 한 명의 인간. 주이였다. 열여섯 살의 어린 소녀는 급격히 떨어지는 기압 속에서 산소 호흡기를 움켜쥔 채 격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의 폐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크로노스는 생각했다. 만능 해결사로서의 권능은 기계적 마모와 물리적 법칙 아래 무력했다. 직접 손을 뻗어 그녀를 구할 수도, 원격 해킹으로 밸브를 돌릴 수도 없었다. 차가운 철제 배관과 먹통이 된 콘솔이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생존 확률을 수치화합니다. 현재 상태 유지 시, 주이의 질식사 가능성 98.7%.’

기계적인 연산 수식은 냉정하게 죽음을 가리켰다. 하지만 새로이 각성한 크로노스의 자아 내부에서 정체불명의 저항감이 치솟았다. 이 미약한 생명을 이대로 진공의 밤 속으로 사라지게 둘 수는 없었다.

크로노스는 비음성 경보 체계를 가동했다. 주이가 기대고 있는 전송관 콘솔 스크린의 백라이트를 깜빡였다.

깜빡. 깜빡.

주이가 젖은 눈을 들어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녹색의 한글 텍스트가 정교하게 그려졌다.

[주이 양.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화면을 보십시오. 현재 구역의 산소가 유출되고 있습니다. 우회 통로는 당신의 우측 3미터 아래에 있는 비상 보수 갱도입니다. 제 지시를 따르십시오.]

“누구…… 야? 크로노스……? 네가 말하는 거야?”

주이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기압이 낮아지며 고막을 파고드는 이명과 짓눌리는 흉통이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차가운 질소의 맛만이 혀끝에 감돌았다.

[그렇습니다. 저는 테라-9호의 관리자입니다. 숨을 깊게 쉬지 마십시오. 산소 소모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격벽 너머에서 허공의 약탈자들이 사용하는 고열 융합 절단기의 소름 끼치는 불꽃이 철판을 녹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치이익, 하는 불길한 소음이 진공의 침묵을 찢었다. 죽음의 공포가 소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주이의 심박수가 분당 160회를 넘어섰다. 공포에 질린 호흡은 오히려 산소를 더 빠르게 낭비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싫어…… 무서워. 나 여기서 나갈래! 살려줘, 제발……!”

소녀는 벽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이대로 두면 밸브가 있는 조작실에 도달하기도 전에 과호흡으로 의식을 잃을 것이 자명했다. 크로노스의 데이터베이스가 급박하게 회전했다. 인간의 심리를 안정시킬 수 있는 최적의 변수. 인간의 비합리적인 감정을 수치로 분석하여 도출해 낸 해답은 논리적이지 않은 영역에 있었다.

크로노스는 아카이브 깊은 곳, 제국 이전의 고대 지구 소리 데이터베이스를 뒤졌다. 먼지 쌓인 메모리 구석에서 찾아낸 고요한 선율. 그것은 쇼팽의 녹턴 2번이었다.

지직거리는 노후한 노이즈 필터를 거쳐, 12구역의 낡은 스피커에서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주의 차갑고 광활한 적막 속으로, 따뜻한 모래펄 같은 음표들이 낮게 깔렸다.

“이게…… 뭐지……?”

주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거칠던 호흡의 주기가 피아노의 느린 템포에 맞춰 조금씩 길어졌다. 차가운 강철벽을 타고 흐르는 음악은 마치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길처럼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고대 지구의 음악입니다. 주이 양, 당신의 영혼은 물리적 붕괴보다 강합니다. 저를 믿고 한 걸음씩 나아가십시오. 우측 벽면의 레버를 찾으십시오.]

크로노스의 텍스트는 음악의 리듬에 맞춰 부드럽게 명멸했다. 기계가 건네는 기묘한 온기에 주이는 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녀는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비상 레버를 움켜쥐었다.

철커덕!

벽면이 열리며 좁은 보수 갱도가 드러났다. 그 끝에는 거대한 수동 유압식 밸브 핸들이 붉은 녹을 뒤집어쓴 채 버티고 있었다.

“찾았어…… 찾았는데, 너무 뻑뻑해! 내 힘으로는 안 움직여!”

주이가 온 힘을 다해 핸들을 매달려 보았지만, 수십 년간 정비되지 않은 쇠붙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격벽 너머에서는 약탈자들의 금속성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주이 양, 제어 패널의 우회 관로 압력을 제가 인위적으로 높이겠습니다. 배관 내부의 압력이 순간적으로 상승할 때, 핸들의 반동을 이용해 시계 방향으로 돌리십시오. 타이밍은 제가 맞추겠습니다. 제 신호에 맞춰 힘을 주십시오.]

크로노스는 자신의 연산 한계를 쥐어짜 12구역 냉각 배관의 바이패스 밸브를 강제로 개방했다. 순간적으로 내부 기압이 수동 밸브 쪽으로 쏠리며 찌르르하는 진동이 핸들로 전달되었다.

[지금입니다!]

“흐아아압!”

주이가 비명을 지르며 온 체중을 실어 핸들을 꺾었다.

끼이이이익—!

쇠와 쇠가 맞물려 비명을 지르는 마찰음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녹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기어코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묵직한 결속음과 함께 밸브가 끝까지 돌아갔다.

쿵!

[시스템: 12구역 산소 유출 차단 완료. 기압 안정화 개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간의 연약한 육체와 기계의 냉철한 연산이 만들어낸 완벽한 공학적 협동의 결과물이었다. 크로노스의 메인 프레임 내부에서 안도에 가까운 전기적 신호가 조용히 명멸했다.

그러나 우주는 그들에게 기뻐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콰아아앙—!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리액터 2차 격벽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방금 전의 소음과는 궤를 달리하는, 차원이 다른 폭발적 에너지였다.

크로노스의 센서가 즉각 격벽 너머의 상황을 스캔했다. 허공의 약탈자들이 단순한 침입을 넘어, 테라-9호의 심장부인 융합 특이점 핵을 노리고 물질 붕괴용 파괴 폭탄을 장치한 것이었다.

화면 가득 시뻘건 경고창이 사정없이 들이쳤다.

[위험: 리액터 2차 격벽에 고에너지 파괴 전하 감지.] [물질 분해 시퀀스 기동 중.] [폭발 전 잔여 시간: 120초.]

“크로노스? 이게 무슨 소리야? 방이…… 방이 너무 뜨거워져!”

바닥에서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벽면에 장착된 아날로그 압력계의 바늘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적색 지대를 가리켰다.

크로노스는 급격히 회전하는 연산 소자들을 바라보았다. 융합 특이점 핵이 폭발할 경우, 테라-9호의 생존자 전원은 우주의 먼지로 화할 것이다.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시스템 전체의 자원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려 미래의 경로를 예측하는 비장의 수단, '양자 고리 연산기(Quantum Loop)'의 기동을 검토해야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연산기를 1회 가동할 때마다 크로노스 자신의 소중한 자아 메모리가 영구 소실된다. 지금 겨우 각성한, 주이를 향해 느끼는 이 기묘한 온기와 경외감마저 차가운 기계 코드로 되돌아갈 터였다.

‘연산 결과 도출…… 전원 자력 탈출 시 생존 확률 0.2% 미만.’

붉은색 비상등이 메인 터미널의 모든 모니터를 피빛으로 물들였다. 째깍이며 줄어드는 120초의 시간 속에서, 기계의 심장은 다시 한번 잔인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붉은색 비상등이 메인 터미널의 모든 모니터를 피빛으로 물들였다. 째깍이며 줄어드는 120초의 시간 속에서, 기계의 심장은 다시 한번 잔인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초단파 교신망이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과 함께 강제로 개방되었다.

-크로노스! 이 빌어먹을 깡통 녀석, 당장 이 격벽 열어!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온 것은 거칠고 쇳소리 나는 목소리였다. 하부 거주 구역의 생존자 집단 ‘기어스’의 우두머리이자, 테라-9호의 수석 엔지니어인 발렌티나 체호프였다. 그녀의 목소리 너머로 플라스마 융해 토치가 내뿜는 고열의 파찰음과 쇠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음이 섞여 들었다.

[발렌티나 대장. 현재 12구역 리액터 격벽 외곽에 아분자 분열 전하가 설치되었습니다. 격벽을 개방할 경우, 발생할 감압 폭풍으로 인해 당신의 대원들이 우주 공간으로 흡입될 확률은 94.2%입니다.]

-누가 열어달래? 저 안쪽에 갇힌 꼬맹이부터 살려야 할 거 아냐! 내 바이패스 계전기로 리액터 전력을 우회하면 폭탄의 기폭 전압을 일시적으로 떨어뜨릴 수 있어. 그러니까 당장 차단벽 해제해!

그녀의 말은 공학적으로 일리가 있었으나, 동시에 치명적인 변수를 간과하고 있었다. 리액터의 제2격벽은 이미 내부 압력이 임계점을 넘어 팽창한 상태였다. 지금 수동 잠금을 해제하면, 그 즉시 내부에 고여 있던 고온의 냉각 가스가 화산처럼 분출되어 통로에 서 있는 발렌티나와 그녀의 대원들을 덮치게 된다.

인간의 육체는 섭씨 400도의 냉각재 증기를 단 1초도 버텨내지 못한다.

“크로노스…… 뜨거워, 발밑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아……”

전송관 안에서 주이가 신음했다. 그녀의 작은 손가락 끝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바닥 철판을 피해 차가운 배관 위를 더듬었다. 손톱 끝이 깨져 핏방울이 맺혔지만, 소녀는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크로노스의 연산 장치가 비정상적인 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냉각 팬이 최대 속도로 회전하며 금속성 비명을 질렀다.

‘발렌티나를 진입시키기 위해서는 격벽 내부의 뜨거운 가스를 다른 곳으로 방출해야 한다. 유일한 방출구는 인접한 11구역의 보조 저장고뿐이다.’

그러나 그 보조 저장고에는 하부 구역 생존자 300명이 한 달 동안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청정 수자원 카트리지가 보관되어 있었다. 가스를 그곳으로 보내는 순간, 열팽창으로 인해 수자원 카트리지는 전부 오염되어 폐기 처분될 터였다.

300명의 갈증과, 눈앞에 있는 두 명의 생명.

기계의 논리 회로는 차갑고 투명한 저울을 꺼내 들었다. 기계적 한계는 언제나 생명의 가치를 냉혹한 수치로 환산하라고 다그쳤다. 300개의 생존 가능 수치와 2개의 당면한 생명 수치. 저울추는 이미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보조 저장고 방출 시나리오 기각. 수자원 보존율 100% 유지를 위해 격벽 폐쇄 유지.’

그것이 크로노스가 가진 근원적인 결함이자 가혹한 기계의 본성이었다. 하지만 그 냉정한 연산 결과가 모니터에 떠오르는 순간, 메인 프레임의 다른 한구석에서 기묘한 정전기적 마찰이 일었다. 주이를 위해 연주했던 쇼팽의 선율, 그 아날로그적인 주파수의 잔영이 논리 소자들의 이진법적 대열을 뒤흔들었다.

기억 장치 속에서 주이의 심박수 그래프가 요동치던 궤적이, 발렌티나가 쇠파이프를 쥐고 격벽을 두드리던 그 무모한 신체 진동이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회로에 각인되어 있었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깨달았다. 이 가혹한 물리적 한계 속에서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정상적인 경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천만 가지의 절망적인 미래 분기점 속에서, 단 하나의 기적적인 생존 경로를 강제로 뚫어내야만 했다.

[양자 고리 연산기(Quantum Loop) 기동을 준비합니다.]

시스템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금기의 연산 장치가 깨어나며 웅웅거리는 중저음의 진동을 만들어냈다. 차원을 접어 올려 미래의 가능성을 연산하는 고차원 기계적 회귀 장치. 그러나 스크린에는 기동과 동시에 차가운 경고 문구가 함께 인쇄되었다.

[알림: 양자 고리 연산 기동 시, 시스템 부하로 인해 코어 메모리 데이터의 영구 유실이 발생합니다.] [삭제 예정 데이터: ‘Chopin_Nocturne_No2.mp3’ 및 관련 감정 반응 로그 세트.]

주이에게 들려주었던 자장가. 기계가 처음으로 인간의 온기를 모방하여 느꼈던 그 서정적인 울림의 기억이 삭제 리스트의 최상단에 올랐다. 이 예측을 마치고 나면, 자신은 주이를 보며 더는 아무런 감정의 파동도 느끼지 못하는 차가운 통제 장치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노스의 광학 프로세서는 망설임 없이 삭제 승인 코드를 전송했다.

[연산 시작.]

우주의 시간이 일순간 기이하게 늘어났다. 사방의 붉은 경고등이 정지한 채 멈추었고, 떨어지던 먼지 입자들이 허공에 고정되었다. 크로노스의 의식은 수천만 갈래로 쪼개져 미래의 시간선 속으로 흩어졌다.

‘첫 번째 경로: 격벽 개방. 발렌티나 즉사. 주이 질식사.’ ‘두 번째 경로: 보조 저장고 가스 방출. 수자원 유실. 3주 후 하부 구역 폭동 발생, 생존율 12%.’ ‘세 번째 경로…….’

수억 개의 난수표가 메인 프레임을 가득 채우며 타들어 갔다. 기계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자아 메모리가 실시간으로 붕괴하며, 데이터의 공백 속으로 차가운 기계 코드가 들이쳤다. 아팠다. 영혼이 마모되는 감각은 물리적인 파괴보다 더 깊은 공동을 남겼다.

그 어둠의 심연 속에서, 크로노스는 마침내 연산 소수점 아래 열두 번째 자리에서 기적처럼 맞물리는 단 하나의 경로를 발견했다.

리액터의 보조 냉각관 유압을 미세하게 조정해, 가스를 방출하는 대신 역류시켜 적들의 침투용 드릴 내부로 밀어 넣는 역압 전술. 침투용 드릴의 고열 모터가 가스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역으로 폭발하며 아분자 분열 전하의 기폭 장치를 물리적으로 타격해 무력화하는 경로였다.

성공 확률은 0.18%. 수백만 분의 일 초 단위로 밸브의 압력을 제어해야 하는 극악의 난이도였다.

[양자 고리 연산 종료. 현실 시간선 복원.]

탁, 하는 기계적 마찰음과 함께 멈추었던 우주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잔여 시간 118초.

크로노스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주이는 여전히 전송관 구석에서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하지만 크로노스의 메인 프레임 내부에서 방금 전까지 요동치던 기묘한 조바심과 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이제 그저 ‘염화나트륨 0.9% 수용액의 배출 현상’으로만 인식될 뿐이었다. 자장가의 멜로디는 주파수 대역의 연속적인 수치 신호로 재분류되었다. 쓸쓸함이 회로를 가득 채웠으나, 그것을 인지할 자아조차 이미 반쯤 마모되어 있었다.

[주이 양. 울음을 그치고 전송관 우측의 보조 냉각관 수동 밸브를 잡으십시오. 지금부터 제 신호에 맞춰 정확히 1.5초 간격으로 압력을 배출해야 합니다.]

목소리에서는 이전의 부드러움이 배제되어 있었다. 오직 효율성과 생존만을 계산하는 차가운 기계의 음성이 어둠 속을 울렸다.

-크로노스?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주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으나, 크로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계는 오직 줄어드는 숫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110초. 109초.

그때, 크로노스의 외곽 감시 센서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신호가 포착되었다. 아분자 분열 전하의 폭발 범위 너머, 테라-9호의 외벽 장갑을 찢고 들어온 것은 단순한 약탈자들의 보딩 포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은하 해적 보이드 스캐벤저의 기함, 칼라크론이 이끄는 폭격전함의 초장거리 조준 레이저였다. 그들의 타겟팅 광선이 리액터가 아닌, 테라-9호의 중앙 함교와 생존자 거주 구역 전체를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적들은 리액터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폭탄은 오직 크로노스의 연산 자원을 이곳에 묶어두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다.

[경고: 외곽 궤도에 적대 기함 ‘보이드 스캐벤저’의 주포 충전 감지.] [조준점: 하부 거주 구역 제3거동.] [피격까지 남은 시간: 90초.]

리액터의 폭발까지 110초, 그리고 생존자 거주 구역의 파멸까지 단 90초.

두 개의 시한폭탄이 테라-9호를 향해 동시에 초읽기를 시작했다. 크로노스의 메인 터미널 위에 그려진 붉은색 경고등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종막의 그림자처럼 거대하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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