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손때가 묻어 시커멓게 닳아 버린 은색 교통카드 한 장이 아슬아슬하게 배수구 틈새에 걸쳐 있었다.

괴이 청소부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거무죽죽한 진액이 하수구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며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 탁한 흐름이 은색 카드를 천천히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감각을 상실한 손끝은 허공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촉각과 고유수용 감각이 지워진 탓에, 뻗은 손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조차 시각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다. 눈앞에서 카드가 배수구의 칠흑 같은 입구 속으로 스르륵 기울기 시작했다. 지금 놓치면 끝이었다.

나는 뻗었던 손을 거두고 몸 전체의 무게중심을 앞으로 무너뜨렸다. 감각이 마비된 오른발 끝을 눈으로 고정했다. 시각적 조준만으로 디딤발을 내딛어, 무거운 가죽 구두 끝자락으로 카드의 모서리를 꾹 짓눌렀다.

뼈마디를 타고 전해져야 할 딱딱한 감촉이나 압박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시야 속에서 은색 카드가 바닥 철판에 납작하게 밀착되어 멈추는 모습만이 망막에 맺혔을 뿐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차가운 배수구 아래로 영원히 사라졌을 터였다.

"하아……, 하아……."

뒤편에서 강태식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가시에 꿰뚫렸던 그의 손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전철 바닥에 얼룩덜룩한 점을 찍고 있었다. 나는 그 소음을 무시한 채,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손가락 끝이 카드를 집어 올리는 동작을 눈으로 면밀히 감시하며, 마침내 손안에 은색 카드를 넣는 데 성공했다.

카드를 눈앞으로 가져왔다.

손때 묻은 은색 표면 위에 반쯤 찢어진 캐릭터 스티커가 흉터처럼 붙어 있었다. 서진이가 늘 지갑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 다니던 바로 그 카드였다.

천천히 카드를 뒤집었다.

원래라면 소유자의 이름을 적거나 서명하도록 마련된 하얀 공란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서명 대신, 바늘 끝으로 긁어 새긴 듯 정교하고 미세한 숫자들이 빽빽하게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 C-03 : P = (S × 2) - (V / 4) ] [ ※ Target Setting = Shadow Area ]

숫자와 알파벳이 기하학적인 기호들과 뒤섞여 복잡한 수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차가운 계산 회로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 공식은 열차의 규격과 승객의 밀도, 그리고 괴이들이 승객의 영혼을 합법적으로 수거해 갈 때 사용하는 '연동 공식'이었다. 서진이는 이 지옥 같은 전철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니, 어쩌면 이 열차의 지배 구조 자체를 해독하기 위해 이 공식들을 수집했던 것이다.

'서진아……. 너는 대체 어디까지 들어간 거냐…….'

가슴 밑바닥에서 무겁고 차가운 덩어리가 요동쳤지만, 얼굴근육은 한 치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계산적인 이성만이 머릿속을 차갑게 지배했다. 이 공식이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해독한다면, 이 열차가 들이미는 불합리한 수칙들의 맹점을 더 정교하게 후벼 파낼 수 있다.

"도진 씨……, 괜찮아요? 발은…… 움직이는 거예요?"

민세희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괴이들이 서로를 찢어발기던 끔찍한 광경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장 없습니다."

나는 카드를 코트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감각이 없는 손가락 대신, 주머니 안에서 카드가 흔들리는 소리를 귀로 들으며 수납을 확인했다.

그때, 등 뒤에서 거친 파열음이 울렸다.

"비켜! 비키라고, 씨발!"

강태식이었다.

그는 한쪽 손목을 움켜쥔 채,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세희에게로 돌진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세희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내고, 그녀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낚아채려 들었다.

"꺄악!"

세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강태식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세희의 가방 지퍼를 억지로 뜯어발기며 소리쳤다.

"여기 붕대랑 소독약 있잖아! 먹을 것도 있고! 왜 너희만 숨겨두고 있었어? 어차피 나 죽으면 너희도 다음 칸 못 가! 내놔, 다 내놓으라고!"

그의 눈은 이미 공포와 광기로 충혈되어 있었다. 타인을 짓밟아서라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본능만이 남은 인간의 추악한 민낯이었다.

스르륵…….

강태식이 가방을 난폭하게 뒤흔들자, 지퍼 틈새로 소독약 병과 거즈가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세희는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면서도, 떨어지는 물건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안 돼요! 이건 우리 모두가 나눠 써야 할 최소한의 기여 물자예요! 태식 씨 혼자 다 쓰면 다음엔 어떡하려고요!"

"닥쳐! 다음이 어디 있어? 지금 내가 아파 죽겠는데!"

강태식이 발을 들어 세희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다.

나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감각이 없는 다리를 시각적으로 통제하며, 가장 빠른 궤적으로 강태식의 앞을 가로막았다.

탁.

구두 굽이 바닥의 철판을 무겁게 내리쳤다.

강태식의 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핏발 선 눈동자가 천천히 위로 올라와 내 얼굴에 닿았다.

나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오직 차가운 살기만을 머금은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발, 내려놓는 순간 남은 한쪽 다리도 부러뜨려 주지."

목소리는 낮고 낮아서, 마치 지하 깊은 곳에서 얼어붙은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 같았다.

강태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목젖이 크게 출렁였다. 이미 4B석에서, 그리고 이전 통로에서 내가 보여준 비정상적인 냉혹함과 괴이들을 자멸하게 만든 기이한 수단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힘으로 나를 이길 수 없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그의 이기적인 이성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너…… 너도 똑같은 새끼잖아. 어차피 이 여자 이용해서 살아남으려는 거면서, 왜 나한테만 지랄인데……."

강태식은 비굴하게 구시렁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세희의 가방끈을 꽉 움켜쥔 채였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세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눈으로 손의 궤적을 쫓으며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가방 챙기십시오. 이 인간에게 단 한 조각의 거즈도 허용하지 마세요."

"고, 고마워요…… 도진 씨……."

세희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품에 안았다. 그녀의 가슴팍에 걸린 낡은 펜던트가 잘게 흔들리며 미세한 쇳소리를 냈다.

나는 고개를 돌려 Carriage 3의 안쪽 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철도 공무 괴이단이 부착해 둔 새로운 행정 안내서가 차가운 금속판 위에 붙어 있었다. 하얀 종이 위에 정갈한 서체로 인쇄된 문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안내서 앞으로 걸어가 가만히 텍스트를 읽어 내렸다.

[ Carriage 3 여객 행동 지침 ]

1. 본 객실은 에너지 효율을 위해 일부 구간의 조명이 소등되어 있습니다. 그림자가 드리운 구역(이하 그늘)에 진입할 때는 반드시 동행인과 밀착하십시오.

2. 그늘 아래 승객은 다른 이의 가방에 손을 대어 도우십시오. 자비심을 베푸는 행위만이 열차의 원활한 운행을 보장합니다.

3. 타인의 물건을 소지하지 않은 채 홀로 그늘에 서 있는 승객은, 본 열차의 정식 승객으로 인정되지 않아 즉시 '폐기 처분'될 수 있습니다.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오한이 일었다.

지극히 정중하고, 서로를 도우라는 이타적인 권고처럼 포장된 문구들.

하지만 나는 이 문장들의 이면에 도사린 잔혹한 모순을 즉각 간파했다.

'그늘 아래 승객은 다른 이의 가방에 손을 대어 도우십시오…….'

이것은 자비심을 베풀라는 뜻이 아니었다.

'가방에 손을 대는 행위'는 곧 타인의 소유권을 침해하거나 강제로 물건을 빼앗는 '탈취'를 보기 좋게 미화한 단어에 불과했다. 이 규칙에 속아 남의 가방을 부축해 주거나 손을 대는 순간, 열차의 시스템은 그 행동을 '규칙 위반' 혹은 '영혼 소모 대상 계약'으로 자동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3번 조항은 더 악랄했다.

타인의 물건을 가지지 못한 채 홀로 그늘에 서 있으면 폐기 처분된다고 겁을 주고 있었다. 즉,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남의 가방을 빼앗아 들고 있으라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배신을 유도하는 함정이었다.

"이거…… 좋은 규칙 아닌가요?"

세희가 안내문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서로 도우라는 뜻이잖아요. 가방을 같이 들어주고, 그늘에서 같이 걸어가면……."

"바보 같은 소리."

내 차가운 일침에 세희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건 남의 가방을 훔치게 만들려는 덫입니다. 가방에 손을 대는 순간, 그 인간은 다른 승객의 몫까지 영혼을 소모당하는 '대리 제물'로 계약이 체결되는 구조예요."

"네……? 그, 그럴 수가……."

"그리고 3번 조항은 그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사람들을 협박해 억지로 남의 물건을 훔치게 만들려는 가짜 동기부여 장치입니다. 아주 정교하게 조율된 살인 행정 수칙이지요."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옆을 흘끗 보니, 강태식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내 설명을 들었으면서도, 머릿속으로 다른 계산을 굴리는 듯했다.

'저 멍청이는 3번 조항의 폐기 처분이라는 단어에만 꽂혔군.'

강태식은 살아남기 위해 기어코 세희의 가방을 빼앗으려 들 것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사지로 밀어 넣는 전형적인 트롤러의 행동 양식.

그렇다면, 이 덫을 역용할 때가 되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가느다란 펜을 만지작거렸다.

골든핑거, '가이드라인의 위조 서명'을 가동할 순간이었다.

안내서의 문구 중 '가짜 규칙'의 맹점을 찾아내어 단 한 줄을 지우거나 수정한다. 그 결과 현실의 인과율을 일시적으로 개조한다.

나는 안내문의 2번 조항을 쏘아보았다.

[ 2. 그늘 아래 승객은 다른 이의 가방에 손을 대어 도우십시오. ]

이 문장에서 '그늘 아래 승객'이라는 가짜 조건의 주체를 완전히 비틀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나는 펜촉을 들어 안내서의 표면을 향해 겨눴다. 마음속으로 위조의 서명을 써 내려갔다.

'그늘 아래 승객'이라는 모호한 대상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한 대상을 낙인찍듯 새겨 넣는다.

[ 2. 강태식의 뒤에 그림자를 드리운 대상은 다른 이의 가방에 손을 대어 도우십시오. ]

스으으으…….

글자가 공중에서 일렁이며 금속판 위로 스며들었다. 인과율의 궤적이 강제로 수정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동시에, 내 몸 전체를 관통하는 끔찍한 대가가 찾아왔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과 함께, 눈앞의 시야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모든 색채가 순식간에 휘발되기 시작했다.

세희의 붉은색 아우터가 탁한 회색으로 바래고, 바닥에 흥건하던 괴이들의 검붉은 진액이 짙은 먹색으로 죽어갔다. 형광등의 미적지근한 주황빛도 차가운 백색으로 얼어붙었다.

오직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의 무수한 회색 음영만이 존재하는 평평하고 이질적인 세상.

'시각의 색채 인지력 전면 소실…….'

가혹할 정도의 통행세였다. 이미 촉각을 잃어 내 몸의 부피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제는 세상의 입체감과 생기를 전해주는 색깔마저 빼앗겼다. 흑백의 세상은 마치 오래된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괴하고 으스스하게 내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중심을 잡았다.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다리를 시각적으로 고정하며 똑바로 섰다.

"어……? 어라?"

강태식이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주춤거렸다.

그의 등 뒤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철 천장의 미등 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강태식의 그림자가 기상천외할 정도로 길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단순한 빛의 왜곡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끈적하게 바닥을 기어 다니며, 강태식의 등 뒤에서 서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시커먼 어둠으로 이루어진, 형체 없는 괴이의 형상.

그림자 괴이는 강태식의 바로 뒤에 우뚝 서서, 그의 어깨 너머로 칠흑 같은 손을 뻗었다.

"이, 이게 뭐야! 내 뒤에 뭐가 있어!"

강태식은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지만, 그의 뒤에 드리운 그림자는 자석처럼 그의 움직임을 쫓아 밀착해 있었다.

내가 위조한 규칙이 적용된 결과였다.

'강태식의 뒤에 그림자를 드리운 대상' 즉, 강태식 본인 혹은 그의 그림자 괴이가 이제 규칙의 절대적인 타겟이 되었다.

그림자 괴이의 시커먼 손끝이 서서히 뻗어 나가, 강태식이 쥐고 있던 세희의 가방끈을 향해 다가갔다.

"도와줘! 도진 씨! 세희 씨! 이것 좀 떼어줘!"

강태식은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림자의 손길은 가차 없었다.

스윽.

마침내 시커먼 어둠의 손가락이 가방끈에 닿는 순간.

쩍-!

강태식의 등 뒤에 서 있던 그림자의 가슴팍이 거대한 아가리처럼 쩍 벌어졌다. 그늘 아래에서 사냥을 기다리던 시스템의 이빨이 드러난 것이다.

"아아악! 싫어! 엇, 어어억!"

가방에 손을 대어 '돕는' 행위의 대가로, 강태식의 영혼이 그의 육체로부터 한 줌씩 뜯겨 나가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뺨이 순식간에 움푹 들어가고, 피부가 밀랍처럼 하얗게 변색되어 갔다.

그것은 타인을 짓밟으려 했던 트롤러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정교한 처벌이었다.

"이게…… 가방에 손을 댄 대가입니다."

나는 흑백으로 변해버린 시야 속에서, 서서히 말라 비틀어져 가는 강태식의 참상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그가 고통스럽게 바닥을 뒹굴며 단말마를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인을 도구로 삼아 연명하려던 자의 종말은 이토록 허무하고 추악했다.

바로 그때였다.

흑백으로 가득 찬 고요하고 무채색의 시야, 그 한구석에서 이질적인 무언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든 색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독 단 하나의 문장만이 기묘할 정도로 선명한, 형형한 푸른빛을 뿜어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것은 안내서의 가장 아랫부분,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숨겨진 조항이었다.

[ ※ 경고: 위조된 수칙을 감지했습니다. 시스템 복구를 시작합니다. ]

"……?!"

내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푸른빛을 내뿜는 가짜 안내 수칙의 텍스트가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금속판을 벗어나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푸른 실핏줄 같은 선들이 전철의 벽면과 바닥, 그리고 흑백으로 물든 내 시야 전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증식하며 달라붙었다.

그 푸른 광채가 내 눈을 멀게 할 듯 사납게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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