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수증기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동시에 짐승의 썩은 내장을 끓인 것처럼 비릿했다.

철문이 뒤로 밀려나며 열린 통로 안쪽에서 백색의 증기가 폭사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 냉기에 피부가 닿는 순간, 소름이 돋아야 마땅했으나 한도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촉각과 고유수용 감각을 상실한 그의 육체는 그저 시각이라는 불완전한 렌즈에 의지해 세상을 재구성할 뿐이었다.

눈앞에서, 강태식이 바닥에 내팽개쳤던 피 묻은 안내문들이 종이비행기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니, 그것은 종이가 아니라 얇게 저민 철판 같았다.

파바바박-!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안내문들이 사방의 벽면과 천장, 그리고 도진의 발 바로 앞 철판에 깊숙이 박혔다. 모서리마다 강태식의 붉은 피가 묻어 있어, 마치 녹슨 못에 찔린 상처에서 흘러내린 진물처럼 보였다.

쿠구구구궁……!

발밑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열차 전체가 좌우로 요동치며 비명을 질렀다. 철과 철이 부딪치며 내는 파열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도진은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고유수용 감각이 사라진 탓에 자신의 발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무릎이 얼마나 굽혀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오직 눈을 부릅뜨고 시야 속에서 흔들리는 황색 안전 손잡이를 포착했다.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기둥에 닿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손가락 마디마디가 기둥의 둥근 곡면에 맞춰 구부러지고, 손톱 밑이 하얗게 죽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도진은 자신이 기둥을 붙잡았음을 확신했다.

"앗……! 아아악!"

뒤에서 민세희의 비명이 들렸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손바닥을 관통당한 강태식이 피를 흘리며 기둥에 머리를 찧고 있었다. 그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요동치는 열차 바닥을 따라 기괴한 기하학적 선을 그리며 번져나갔다.

"이…… 미친 새끼…… 다 알고 있었지? 어?!"

강태식의 충혈된 눈이 도진을 향해 저주의 불길을 뿜어냈다.

하지만 도진은 그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새로 열린 세 번째 칸, Carriage 3의 내부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안개 너머로 보이는 그곳은, 지금까지의 칸들과는 완전히 다른 기괴함을 품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좌석의 배치였다.

지하철의 좌석은 대개 벽면을 따라 일렬로 정렬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도심을 달리는 대중교통의 불문율이자 행정적 효율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칸의 좌석들은 달랐다.

마치 무덤가의 비석처럼, 혹은 거대한 이빨이 무질서하게 돋아난 괴수의 입안처럼, 좌석들이 통로 한가운데와 벽면 구석구석에 뒤죽박죽 얽혀 있었다. 어떤 좌석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어떤 좌석은 비스듬히 누워 바닥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좌석의 시트는…… 갓 짜낸 선혈을 머금은 것처럼 축축하고 끈적한 붉은색 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붉은 시트 구역…….

도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을 살폈다.

흔들림이 조금 잦아들자, 안개 사이로 바닥에 뚫린 무수한 구멍들이 보였다. 지름 10센티미터 정도 되는 둥근 배수구들이었다. 일반적인 전철 바닥에는 존재할 리 없는, 오직 도살장이나 공장 바닥에나 어울릴 법한 정교한 배수 구멍들…….

그 안쪽은 빛조차 삼켜버릴 듯 깊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진은 주머니 속을 더듬었다. 촉각이 없으니 손가락 끝의 감각 대신 주머니가 부풀어 오르는 모양새를 눈으로 보며 조심스럽게 물건을 꺼냈다. 손에 잡힌 것은 아까 전철 바닥에서 주워 두었던 100원짜리 동전이었다.

그는 동전을 배수구 안쪽으로 떨어뜨렸다.

동전은 어둠 속으로 매끄럽게 빨려 들어갔다.

도진은 귀를 기울였다.

일초.

이초.

삼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금속이 철판에 부딪히는 소리도, 먼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마찰음도 들리지 않았다. 완전한 무음. 마치 그 구멍 아래에는 소리라는 물리 현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공동(空洞)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물리 법칙의 왜곡…… 혹은 소리를 완전히 흡수하는 공간인가.'

도진의 뇌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 무음의 구멍들은 단순한 배수구가 아니다. 이 열차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수거하여 어딘가로 흘려보내는 통로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2화에서 마주했던 4B석 승객의 의자. 그 의자 다리 밑에 묻어 있던 정체 모를 검은 응고 흔적과, 그 주변에 마치 정교한 암호처럼 뚫려 있던 기묘한 티켓 구멍들의 배치…….

그 티켓 구멍들과 이 바닥의 배수구들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뚫려 있는, 그러나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인공적인 구멍들.

'티켓 클리핑 도구와 이 구멍들의 연관성…… 분명 무언가가 더 있다.'

생각이 꼬리를 물려던 찰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도진은 본능적으로 손을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그의 고질적인 신경증과 편집증을 억누르는 유일한 버팀목, 불안 치료제 약통이 만져지지 않았다.

급히 겉옷 주머니와 바지 주머니를 눈으로 훑었다.

없었다.

아까 전철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강태식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바닥의 틈새나 어둠 속으로 떨어뜨린 것이 분명했다.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뇌 속의 뉴런들이 미친 듯이 경보를 울려댔다. 약이 없다. 자신을 통제할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배로 커졌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자신을 해치려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도진 씨……?"

민세희가 조심스럽게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촉각이 없는 도진은 그녀가 옷을 당기는 모양새를 보고서야 그녀의 접근을 알았다.

도진은 젖은 짐승처럼 사나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타인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이 신경증적 발작과 결합하여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손 치워."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세희는 주춤하며 손을 뒤로 뺐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묘한 슬픔과 확신이 서려 있었다.

"약…… 찾으시는 거죠?"

도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떻게 알았지."

"그 약통…… 분홍색 라벨이 붙은 하얀색 플라스틱 통 맞죠? 알약들이 부딪치며 사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민세희는 품 안에서 낡은 가죽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서진이도…… 도진 씨 동생 서진이도 늘 그 약을 가지고 다녔어요. 이 칸을 지나갈 때, 그 아이도 아주 불안해하면서 그 약통을 꼭 쥐고 있었거든요. 결국 바닥에 떨어뜨렸지만……."

도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서진이가 이 칸을 지나갔다고?"

"네. 확실해요. 서진이는 이 기괴한 붉은 의자들 사이를 지나면서 계속 무언가를 적고 있었어요. 그리고 제게 말했죠. '오빠가 올 거야. 오빠는 철저하니까, 내가 남긴 흔적을 반드시 알아볼 거야'라고……."

민세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도진의 이성을 붙잡아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도진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약이 없어도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 서진이가 이곳을 지나갔다. 그리고 흔적을 남겼다. 자신이 무너지면 동생을 찾아낼 기회는 영원히 사라진다.

그는 신경질적인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들이 붉은 시트 구역의 한가운데로 발을 딛는 순간, 천장에 매달린 낡은 스피커에서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기계적인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본 열차는 현재 Carriage 3, '붉은 시트' 구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을 위해 아래의 수칙을 반드시 준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본 구간의 모든 승객은 즉시 가장 가까운 '붉은 시트'에 착석하셔야 합니다.]

[둘째, 붉은 시트에 엉덩이를 대지 않는 자는 '불침범'으로 간주합니다. 불침범은 열차의 청결을 저해하는 쓰레기이므로, 현장에서 청소 괴이가 즉결 처형합니다.]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열차 칸 너머에서 짙은 안개를 뚫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스스스스…… 사각, 사각…….

무언가 바닥을 쓰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 명의 존재였다. 그들은 단정한 철도청 청소부 정장을 입고 있었으나, 목 윗부분에는 얼굴 대신 거대한 쓰레기봉투 같은 검은 가죽 주머니가 얹혀 있었다. 그 주머니가 숨을 쉴 때마다 붉은 기류가 쉭쉭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날카로운 면도날이 촘촘히 박힌 거대한 철제 빗자루와, 인간의 두개골을 반으로 잘라 만든 듯한 기괴한 쓰레받기가 들려 있었다.

"저…… 저게 뭐야……."

강태식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다 발이 엉켜 바닥에 넘어졌다.

청소 괴이들의 검은 주머니가 일제히 강태식을 향해 꺾였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지는 붉은 기류가 방 안의 한기를 더했다.

"불침범…… 감지……."

쇳소리가 섞인 기괴한 목소리가 청소 괴이들의 몸속에서 흘러나왔다.

"붉은 시트에…… 엉덩이를 대지 않은 자…… 쓰레기…… 처분한다……."

도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가짜 규칙이다.

이 열차의 안내문은 언제나 승객들을 교묘한 함정으로 밀어 넣는다. '붉은 시트'에 엉덩이를 대는 순간, 그 축축한 가죽 시트가 승객의 육체를 빨아들이거나 영혼을 귀속시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앉지 않으면 청소 괴이들에게 즉결 처형당한다.

앉아도 죽고, 앉지 않아도 죽는 모순된 상황.

'그렇다면…… 규칙 자체를 비튼다.'

도진은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감으면 안 되었다. 촉각이 없기에 시각을 차단하는 순간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마음속으로 골든핑거를 호출했다.

'가이드라인의 위조 서명.'

그의 시야에 붉은색 안내문의 텍스트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둘째, 붉은 시트에 엉덩이를 대지 않는 자는 '불침범'으로 간주합니다.]

도진은 이 가짜 규칙의 주어를 비틀기로 했다. 승객을 향한 칼날을, 그 칼을 쥔 자들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는 마음속의 펜을 들어 '엉덩이를 대지 않는 자'라는 문장을 지워나갔다. 그 강렬한 정신적 소모와 함께, 귓가에 기분 나쁜 이명이 울렸다.

[규칙 위조를 감행합니다.]

[대가로 촉각 및 고유수용 감각 상실 상태가 유지되며, 다음 역 지각 시 감각 회복 대기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나는 가혹한 패널티가 누적됩니다.]

'상관없어. 지금 살지 못하면 다음 역은 없다.'

도진은 이빨을 악물며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갔다.

[둘째, '붉은 기류를 품은 괴이'는 '불침범'으로 간주합니다.]

스스슥……!

안내문의 글자가 마법처럼 비틀리며 재배치되었다. 현실이 개조되는 기괴한 진동이 열차 칸 전체를 휩쓸었다.

그 순간, 다가오던 청소 괴이들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들의 검은 가죽 주머니가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슈우우욱- 하며 그들의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기류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불침범…… 감지……."

가장 왼쪽에 서 있던 청소 괴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동료를 바라보았다.

"붉은 기류를 품은 괴이…… 쓰레기…… 발견……."

"처분한다…… 즉시 처분한다……."

그들의 논리 회로가 엉망으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뿜어내는 붉은 기류 자체가 새로운 수칙에 의해 '불침범(쓰레기)'의 증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각, 사각, 사각-!

청소 괴이들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날카로운 면도날이 박힌 철제 빗자루가 허공을 가르며 동료의 검은 가죽 주머니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퍼억-!

기괴한 파열음과 함께 검은 가죽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시커먼 진액과 썩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끄아아악-!"

괴이들의 단말마는 인간의 비명과 칠판을 긁는 소리가 뒤섞인 듯 불길했다. 그들은 서로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두개골 쓰레받기로 서로의 얼굴을 으깨버리기 시작했다.

콰직! 퍼억! 콰정창!

마치 거대한 믹서기에 살덩이를 넣고 돌리는 듯한 참혹한 소음이 Carriage 3를 가득 채웠다. 괴이들이 지은 위조 룰의 덫에 자기 자신들이 걸려들어 서로를 쓰레기 취급하며 찢어발기는 광경은, 기괴하면서도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도진은 그 참상을 한 걸음 뒤에서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괴…… 괴물들이 자기들끼리 싸워……."

민세희는 입을 틀어막은 채 그 광경을 응시했고, 강태식은 바닥을 기어 다니며 그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이윽고, 마지막 남은 청소 괴이가 동료의 머리를 완전히 으깨버린 뒤, 자신의 가슴에 빗자루를 꽂아 넣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쿠웅…….

세 마리의 청소 괴이가 모두 거무죽죽한 진액의 웅덩이 속으로 침몰했다. 그들의 육체는 빠르게 부식되며 전철 바닥의 철판 속으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도진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감각이 없는 다리를 시각적으로 통제하며, 괴이들의 잔해가 흩뿌려진 바닥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썩어가는 진액과 뼈 조각들 사이, 바닥에 뚫린 둥근 배수구 틈새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은색이었다.

도진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괴이의 검은 진액이 배수구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며 발생하는 소용돌이의 중심에, 손때가 묻어 낡아 버린 은색 교통카드 한 장이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카드 모서리에는 서진이가 좋아하던 작은 캐릭터 스티커가 반쯤 찢어진 채 붙어 있었다.

'서진이의 카드…….'

그 카드가 시커먼 진액에 휩쓸려 무음의 배수구 안쪽 깊은 어둠 속으로 막 빨려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지금 놓치면, 동생의 유일한 흔적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었다.

도진은 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감각이 없는 그의 손가락은 미끄러운 바닥을 제대로 움켜쥐지 못하고 허공을 헛돌았다.

카드가 배수구 구멍 속으로 반쯤 기울어졌다.

스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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