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척수액이 얼어붙는 듯한 냉기가 어깨뼈를 타고 내려앉았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오직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만이 실존했다. 보이지 않는 어둠은 사방에서 도진의 숨통을 조여 왔고, 오른쪽 귀는 여전히 무음의 진공 속에 갇혀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오른쪽 어깨 위로 얹어진 다섯 개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영하의 냉동고에서 방금 꺼낸 고깃덩어리 같은 감촉이었다.

도진의 턱관절이 부서질 듯 맞물렸다.

두려움보다 먼저 뇌리를 스친 것은 생존을 향한 잔혹한 계산이었다. 규칙을 위반한 괴이인가, 아니면 어둠을 틈타 자신을 해치려는 또 다른 트롤러인가. 어느 쪽이든 자비는 사치였다.

치익, 하는 기괴한 이명과 함께 오른쪽 귀의 진공이 뜯겨 나갔다. 고막을 찌르는 철도 마찰음과 함께 둔탁한 공기의 흐름이 양쪽 귀로 쏟아져 들어왔다. 청각의 복구였다.

그 찰나, 어깨 뒤편에서 아주 미세한 옷자락의 마찰음과 밭은 숨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흐읍……!"

가냘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억눌린 목소리.

도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왼쪽 귀로 방향을 가늠한 그는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오른쪽 어깨를 뒤로 강하게 젖혔다. 어깨를 짓누르던 차가운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순간, 도진은 몸을 돌려 상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가느다란 뼈마디가 손아귀 안에서 힘없이 으스러질 듯 잡혔다.

"아악! 아파요, 놔주세요……!"

찌르는 듯한 비명이 어둠 속을 갈랐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도진은 손아귀에 힘을 빼지 않은 채, 상대를 거칠게 열차의 쇠벽으로 밀어붙였다. 쾅 하는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상대의 가쁜 호흡이 도진의 뺨에 닿았다.

"민세희 씨인가……?"

도진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타인을 향한 불신이 가시처럼 돋아나 그의 이성을 지배했다.

"네, 네…… 저예요. 제발 이거 좀 놓아주시면 안 돼요? 뼈가 부러질 것 같아요……."

민세희의 목소리는 공포와 고통으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진은 천천히 손을 풀었다.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발소리를 죽여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바닥에 남은 그녀의 체온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것은 괴이의 냉기가 아니라 극도의 공포로 인해 말초 혈관이 수축한 인간의 온기였다.

"내 어깨엔 왜 손을 댔지? 뒤에서 기척도 없이 접근하는 건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짓과 다름없을 텐데……."

"그게 아니라…… 불이 갑자기 다 꺼지고, 도진 씨가 아무 소리도 안 내고 가만히 서 계시니까…… 걱정돼서……."

"걱정?"

도진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이 지옥 같은 전철 안에서 남을 걱정할 여유가 있나 보군. 내 눈이 보이지 않는 걸 틈타 무슨 짓이라도 하려던 게 아니라면,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다음번엔 목줄기를 꺾어버릴 테니까……."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민세희는 억울한 듯 울먹였지만, 도진은 그녀의 감정 섞인 호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정보와 생존뿐이었다. 시각이 차단된 지금, 그녀는 그의 눈이 되어줄 도구에 불과했다.

"시끄럽고, 내 말에만 대답해. 지금 내 눈이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방의 상황을 말해라. 4B석에 있던 그 기괴한 정장의 승객은 어떻게 되었지?"

세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그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도진 씨가 안내판을 만지고 나서…… 바닥에서 붉은 안개 같은 게 솟구치더니 그 남자를 삼켜버렸어요. 지금은 그냥 타버린 가죽 시트만 남았어요……."

"확실한가?"

"네…… 정말이에요. 그리고 지금 사방이 정말 캄캄해요. 비상등마저 다 꺼져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런데…… 도진 씨는 안 보이는데 어떻게 저를 그렇게 단번에 잡으신 거예요?"

"청각이 돌아왔으니까……."

도진은 차갑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감각을 점검했다. 오른쪽 귀의 먹먹함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바늘로 찌른 듯 뻑뻑했고, 눈꺼풀을 깜빡여도 오직 완벽한 무(無)의 세계만이 펼쳐져 있었다. 골든핑거 '가이드라인의 위조 서명'을 사용한 대가였다. 다행히도 오감 상실의 유효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 암흑 속에서 시간 감각마저 흐려진 지금은 1분이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때, 민세희가 주춤거리며 도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저기…… 도진 씨. 저를 못 믿으시는 건 알지만, 이것 좀 만져봐 주시겠어요?"

"뭐지?"

"제 목걸이예요. 실은…… 제 동생이 이 전철에서 실종되기 전에, 저한테 남겨준 소문이 있었어요……."

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다가오는 기척에 본능적으로 손끝이 굳어졌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동생'이라는 단어가 그의 심장을 강하게 두드렸다.

민세희는 천천히 도진의 손을 가져가 자신의 목목걸이 펜던트에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도진의 손끝에 닿았다. 거칠거칠하면서도 기묘하게 굴곡진 표면. 손가락 끝으로 그 형태를 더듬어 나가던 도진은 그것이 정교하게 조각된 나비 문양임을 깨달았다.

"이건……?"

"나비 문양 펜던트예요. 제 동생 은지가 실종되던 날, 방에 떨어뜨리고 간 물건이에요. 그런데…… 은지가 사라지기 전날 밤 저한테 울면서 말했어요. 자정이 지나면 운행하는 유령 열차가 있고, 그 열차 안에는 사람을 홀리는 가짜 규칙들이 가득하다고……."

세희의 목소리에 깊은 슬픔과 원망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은지가 그랬어요. 그 열차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절대 안내판의 글자들을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고…… 그 열차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갇혀서 부품처럼 쓰이고 있다고 했어요. 도진 씨 동생분 이름이 서진이라고 하셨죠?"

도진의 손가락이 나비 펜던트 위에서 멈췄다.

"그걸 어떻게 알지?"

"도진 씨가 아까 혼잣말로 서진이를 찾겠다고 하셨잖아요……. 은지가 남긴 일기장에 적혀 있었어요. 열차 안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한서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고…… 아주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 열차의 규칙을 어겨서 차장에게 끌려갔다고요……."

도진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서진이. 동생이 이 지옥 같은 열차 안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비록 끌려갔다는 절망적인 소식이었지만, 그것은 도진의 뇌리에 꽂힌 차가운 불꽃과 같았다. 타인을 극도로 불신하던 도진의 방어벽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민세희 씨……."

"네?"

"그 펜던트, 절대로 잃어버리지 마라. 그게 네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물건이 될 테니까……."

도진은 차갑게 손을 거두었다. 여전히 그녀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쥐고 있는 정보는 동생을 찾기 위한 결정적인 단서가 될 터였다.

도진은 벽면을 더듬으며 바닥으로 몸을 낮췄다. 아직 시각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예민해진 청각과 촉각을 곤두세웠다.

"민세희 씨, 4B석 주변의 벽면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봐라. 아주 자세히 관찰해. 안내판 뒷면이나 모서리에 다른 흔적은 없나?"

세희는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며 안내판 쪽으로 다가갔다.

"어…… 음, 너무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휴대폰 플래시를 켜볼게요."

잠시 후, 미세한 광원이 도진의 감겨진 눈꺼풀 너머로 희미한 붉은빛을 투과시켰다. 시각 세포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는 증거였다.

"도진 씨, 안내판 뒷장의 테두리 쪽에 희미한 얼룩 같은 게 보여요. 그냥 먼지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붉은색 도장 자국 같아요. 아주 오래된 것 같은……."

"도장 자국?"

"네. '처분 완료', '자원 회수'…… 그런 글자들이 겹쳐서 찍혀 있어요. 그리고 그 옆에 아주 작은 글씨로 뭔가 적혀 있는데……."

세희가 숨을 들이켜며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본 열차의 운행 지속을 위해, 규정 위반자의 신체 및 영혼은 철도 공무 괴이단의 영구적 자원으로 귀속된다. 소모 쿼터 달성률 84%'…… 이게 무슨 소리죠?"

도진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었다.

이 열차는 단순한 살인 공간이 아니었다. 인간을 죽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철도 공무 괴이단'이라는 존재들이 자신들의 영역과 열차를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인간의 영혼을 채굴하는 거대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가짜 규칙은 그 채굴을 합법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덫에 불과했다.

"과연…… 사법적 명분을 내세워 인간의 영혼을 합법적으로 수거해 가는 시스템이군. 규칙을 위반하게 만들어 스스로 파멸하게 만드는 덫……."

도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 규칙의 맹점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만 있다면 이 괴이들의 시스템 자체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달리던 전철의 바닥이 거칠게 덜컹거렸다.

쿠우우우웅……!

기분 나쁜 진동과 함께, 머지않은 곳에서 쇠사슬이 바닥을 끄는 듯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철커덩, 철커덩…….

소리는 전철 칸의 앞쪽 연결문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소름 끼치도록 규칙적인 발소리. 인간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거대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바닥을 짓이기며 다가오는 소리였다.

"도…… 도진 씨, 뭔가가 오고 있어요! 연결문 유리에 빨간 불빛 같은 게 번쩍여요……!"

세희의 목소리가 극도의 공포로 뒤집어졌다.

도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필이면 시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이 시점에 순찰 공무 괴이가 들이닥친 것이다.

철커덩!

연결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차가운 곰팡이 냄새와 썩은 철 비린내가 좁은 객실 안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검표 시간입니다……."

낮고 갈라진, 마치 기계음이 섞인 듯한 기괴한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단정히 앉아 계시기 바랍니다. 자율 안전 수칙 제7조. 승무원의 호출 없이 좌석에서 이동 시, 즉각 사형에 처합니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도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전면 대결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들이 새로 들고나온 규칙은 치명적이었다. '좌석에서 이동 시 사형'.

현재 도진과 세희는 통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괴이가 다가와 그들을 발견하는 순간, '이동' 혹은 '좌석 이탈'이라는 명목 하에 처분당할 것이 뻔했다.

"도진 씨…… 어떡해요? 우리 죽는 거예요……?"

세희가 도진의 옷자락을 붙잡고 부르르 떨었다.

도진은 이빨을 악물었다. 그의 두뇌가 한계까지 회전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주변의 모든 감각이 정밀한 데이터가 되어 머릿속에 가상 공간을 그려냈다.

괴이의 발소리 크기, 바닥의 진동 주파수, 바람의 흐름…….

"민세희, 내 말 잘 들어.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라. 죽고 싶지 않다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 지시를 따라야 해."

"네, 네……! 말만 하세요……."

"바닥에 있는 찢어진 전철 티켓이나 종이 부스러기 같은 게 있나?"

"어…… 네! 아까 죽은 남자의 옷자락 옆에 찢어진 티켓 조각들이 흩어져 있어요."

"그걸 주워서 내 손에 쥐여줘. 그리고 괴이가 우리 쪽을 향해 세 걸음 더 걸어오면, 내가 신호를 줄 테니 너는 반대편 좌석 밑으로 기어가서 니가 가지고 있는 플래시를 그쪽 벽에 비춰라. 알겠나?"

"하지만…… 움직이면 사형이라고……."

"내가 규칙을 바꿀 거다. 너는 오직 내 신호에만 집중해."

세희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찢어진 티켓 조각들을 도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도진은 티켓 조각의 까칠한 촉감을 느끼며, 벽면에 붙은 안내판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철커덩…… 철커덩…….

괴이의 발소리가 이제 불과 다섯 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썩은 살이 타는 듯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도진은 숨을 죽인 채 골든핑거를 발동할 준비를 했다. 시각이 이미 차단된 상태에서 능력을 발휘하려면, 다른 감각을 추가로 공여해야 했다.

'미각을 바친다.'

입안이 순간적으로 완전히 마비되며 철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 기괴한 무감각이 혀끝을 지배했다. 혹독한 대가였지만, 그 순간 그의 손가락 끝에 푸른빛의 위조 서명이 깃들었다.

도진은 정확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안내판의 제7조 수칙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손가락 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과 미세한 초자연적 마찰력이 그의 손길을 인도했다.

'승무원의 호출 없이 좌석에서 이동 시 사형.'

도진은 '이동 시'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강하게 지워나갔다. 손끝이 타오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문장을 위조해 넣었다.

['7. 승무원의 호출 없이 좌석에서 지정된 통행증 없이 사형.']

지이잉……!

공간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새로운 규칙이 현실에 각인되었다.

"지금이다! 반대편 좌석 밑으로 던져!"

도진이 나지막이 소리쳤다.

동시에 민세희가 몸을 던지며 들고 있던 플래시를 반대편 구석의 텅 빈 좌석 밑으로 강하게 던졌다. 플래시가 바닥을 구르며 기괴하게 훼손된 4B석의 가죽 시트 잔해를 비추었다.

그와 동시에 도진은 손에 쥐고 있던 찢어진 티켓 조각들을 공중으로 흩뿌렸다.

바람의 흐름을 탄 티켓 조각들이 흩날리며 가죽 시트 잔해 위로 떨어졌다.

"크으으으……!"

순찰 괴이가 반응했다. 괴이의 기괴한 안구가 플래시 빛이 도달한 반대편 좌석과 그 위에 떨어진 티켓 조각들을 향해 돌아갔다.

개조된 규칙은 '지정된 통행증 없이 사형'이었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티켓 조각들은 괴이의 초자연적 인지 오류를 유도하는 훌륭한 미끼가 되었다. 괴이의 눈에는 반대편 좌석에 '통행증을 소지하지 않은 무단 침입자'의 흔적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규칙 위반자 발견…… 사법 처분을 집행한다……."

괴이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반대편 좌석을 향해 돌진했다. 거대하고 날카로운 낫 같은 손가락이 텅 빈 좌석과 가죽 시트를 사정없이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콰콰쾅! 콰직!

쇠가 찢어지고 가죽이 터져 나가는 끔찍한 파괴음이 객실을 가득 채웠다.

도진은 그 틈을 타 민세희의 손목을 잡고 벽면에 바짝 밀착했다.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도, 그는 괴이의 공격 궤적과 공기의 파동을 완벽하게 읽어내며 단 한 치의 소리도 내지 않고 숨을 죽였다.

괴이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가상의 규칙 위반자를 처단하기 위해 광포하게 날뛰었다. 자신이 설계한 덫에 스스로 걸려들어 허공을 낭비하는 꼴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규칙의 허점을 찔러 괴이를 완벽하게 기만한 도진의 정교한 역살이었다.

마침내 광란의 난도질이 멈추었다.

괴이는 목표물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판단했는지, 기괴한 쇳소리를 내며 서서히 다음 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커덩…… 철커덩…….

연결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객실 안에는 다시 한번 적막이 찾아왔다.

"하아…… 하아……."

민세희가 도진의 품에 안긴 채 멈추지 않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살았어…… 우리, 살았어요……."

"조용히 해라.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도진이 차갑게 타이르는 그 순간.

스우우우…….

도진의 차단되었던 시야 너머로 서서히 희미한 회색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치 먹구름이 걷히듯, 칠흑 같은 암흑이 걷히고 사물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천장의 깨진 형광등, 붉게 물든 전철 바닥, 그리고 잔뜩 겁에 질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민세희의 얼굴이 흐릿하게 초점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시각의 복구였다.

도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뻣뻣해진 목을 움직였다. 드디어 세상이 다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채 3초를 가지 못했다.

치이이이익-!

갑자기 전철 천장에 매달린 녹슨 안내 방송 장치가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과 함께 켜졌다.

스피커 너머로 흘러나온 것은 안내 방송이 아니었다.

그것은…… 쇠창살에 갇힌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끔찍하게 찢어지는 비명 소리였다.

- 아아악! 오빠! 오빠 살려줘! 여기가 어디야! 살려줘……!

도진의 심장이 그 순간 완전히 멎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얼어붙었던 그의 이성이 단숨에 박살 나는 듯한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동생 서진의 목소리였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