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고막을 메운 적막은 지독하리만큼 무거웠다.
오른쪽 반신 전체가 깊은 물 속에 잠긴 듯, 먹먹한 압박감이 뇌리를 짓눌렀다. 왼쪽 귀로는 강태식의 찢어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고스란히 흘러들었지만, 오른쪽은 오직 진공 상태의 고요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대칭적이지 못한 감각의 불균형은 극도의 신경질적인 결벽을 지닌 도진의 신경을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고통에 겨워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스스스스…….
붉은 안개가 걷히는 와중에도, 전철 바닥의 틈새로부터 불길하게 피어오르는 핏빛 기류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가스가 아니었다. 안개의 잔해들이 기괴하게 소용돌이치며, 마치 굶주린 짐승의 형상처럼 뒤틀린 채 도진의 발끝을 향해 단숨에 쇄도해 왔다.
오른쪽 귀가 멀어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공기의 파동이 피부를 거칠게 긁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도진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전철 바닥에 그어진 노란색 안전선. 찌그러지고 빛바랜 그 선이 기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붉은 기류의 궤적은 정확히 그 안전선을 침범하지 못하고 겉돌며 굽이치고 있었다. 소리가 사라진 시야 속에서, 도진의 두 눈은 한순간에 그 궤적의 맹점을 포착해 냈다.
도진은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스스로가 정한 가장 효율적인 생존 공식에 따라, 그는 노란 안전선 뒤쪽의 좁은 틈새로 거칠게 굴러 피신했다.
슈우우욱!
소리 없는 바람이 도진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기류에서 뻗어 나온 무형의 갈퀴 같은 형상이 그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무쇠 바닥을 사정없이 긁어내렸다. 귀를 찢는 굉음 대신, 공중으로 거칠게 튀어 오르는 시퍼런 불꽃과 사방으로 비산하는 미세한 쇳가루만이 도진의 뺨에 닿아 차갑게 식어 내렸다.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파괴였다.
안전선 뒤에 밀착한 도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팍이 격렬하게 오르내렸지만, 그의 안광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아…… 하아……."
왼쪽 귀를 통해 들려오는 강태식의 거친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전철 칸 내부의 참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방은 온통 찌그러진 철판과 정체 모를 얼룩으로 가득했고, 차가운 형광등만이 깜빡이며 기분 나쁜 소음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스름한 조명 아래, 전철 안쪽의 한 좌석이 눈에 들어왔다.
노약자 지정석이 위치한 열차의 모퉁이. 그곳의 '4B'라고 적힌 좌석에는 한 승객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단정한 잿빛 정장을 차림새로 보아 얼핏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였지만, 그의 목은 정상이 아니었다. 오른쪽으로 기이할 정도로 꺾인 목덜미, 그리고 얼굴에 박제된 듯 걸려 있는 불쾌하고 인위적인 미소…….
그 존재는 텅 빈 눈동자로 도진과 생존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정장 차림의 승객은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옆자리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입꼬리를 더 찢어 올리며, 마치 편히 앉으라는 듯이 눈짓으로 집요하게 권하기 시작했다.
남겨진 승객들에게 보내는 무언의 환대였다.
하지만 도진은 그 기이한 호의에 소름을 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타인을 극도로 불신하는 그의 편집증이 경고음을 울려대고 있었다. 저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전철을 관리하고 규칙의 이행을 감시하는 '철도 공무 괴이단'의 말단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교활한 무언가다.
도진은 4B석 주변의 디테일을 집요하게 뜯어보았다.
흐릿한 형광등 불빛이 가죽 시트에 닿는 순간, 도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노란색 가죽 시트 표면에는 무수히 많은 자국들이 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가죽의 노후화가 아니었다. 짐승의 이빨에 뜯겨 나간 듯한 미세하고 날카로운 홈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더욱 기괴한 것은 좌석 측면의 알루미늄 프레임이었다.
가죽과 쇠붙이가 맞물리는 경계선을 따라,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은 미세한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마치 옛날 역무원들이 승차권에 구멍을 뚫을 때 쓰던 티켓 클리퍼로 수십, 수백 번을 사정없이 찍어 누른 듯한 기하학적인 패턴……. 구멍의 단면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의문의 검은 응고 흔적이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그것은 함정의 냄새였다.
"아, 시발…… 허리 부러지겠네……."
그때, 생존자 무리 중 한 명이었던 체구가 건장하고 이마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공포와 피로에 찌든 그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고 충혈되어 있었다. 남자는 다리를 절뚝이며 4B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이, 저리 비켜!"
남자는 제자리에 서서 눈치를 보던 강태식을 어깨로 거칠게 밀쳐냈다.
"으악!"
강태식이 바닥에 사정없이 나뒹굴며 꼴사납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흉터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4B석의 텅 빈 옆자리를 바라보며 침을 뱉었다.
"여기 빈자리잖아. 수칙에도 앉지 말라는 소린 없었어. 몸이 으스러질 것 같으니까 일단 앉고 본다."
그 모습을 본 민세희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안 돼요……! 저 좌석, 뭔가 이상해요. 함부로 앉으면 위험할 수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도 도덕적 규범을 지키려는 무력한 본능이었다. 그녀는 남자를 말리기 위해 한 걸음 나서려 했다.
탁.
하지만 도진이 차가운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
민세희가 놀란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도진의 시선은 그녀를 향해 있지 않았다. 오직 4B석으로 다가가는 흉터 남자의 등 뒤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도진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건조하고 차가웠다.
"놔둬."
"네? 하지만 저러면 저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자를 구하려 들지 마라. 그런 자비는 이 열차 안에서 가장 먼저 소모되는 사치일 뿐이다."
도진은 타인의 생명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저 어리석은 트롤러는 다가오는 괴이를 자극하고, 진짜 규칙과 가짜 규칙의 실체를 감별해 줄 훌륭한 '이정표'이자 생존 데이터에 불과했다.
흉터 남자가 거칠게 4B석 가죽 시트 위로 엉덩이를 걸치며 주저앉았다.
"아아, 살 것 같네……."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4B석에 앉아 있던 기괴한 승객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지며 기괴한 무음의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스스…….
가죽 시트 밑바닥에서 미세한 이빨 자국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 끄어억!"
남자의 안색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그의 입에서 핏방울 섞인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좌석 가죽 시트 밑에서 보이지 않는 무수한 이빨들이 솟구쳐 올라, 남자의 허벅지와 둔부의 살점들을 사정없이 씹어 돌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쩍! 쩌적!
뼈가 바스러지고 살점이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도진의 왼쪽 귀를 자극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이미 그의 엉덩이는 가죽 시트 속으로 깊숙이 함몰되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살려…… 살려줘! 으아아아악!"
남자의 허벅지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선혈이 전철 바닥의 노란 안전선 위로 홍수처럼 쏟아졌다.
4B석의 기괴한 승객은 그 참상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나긋나긋한 손길로 남자의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이 남자의 지갑과 소지품을 헤집는 모습은 마치 정교한 행정 절차를 수행하는 공무원의 몸짓과도 같았다.
남자의 몸은 급격하게 녹아내리며 전철의 가죽 시트 속으로 흡수되어 갔다. 가죽 시트의 노란 표면이 남자의 피를 빨아들이며 기괴한 붉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도진은 그 참혹한 광경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차가운 수학적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죽 시트 밑의 이빨 자국은 착석한 승객의 육체를 침탈하기 위한 덫이다. 그리고 측면의 티켓 구멍들은 승객의 생명력을 흡수해 전철의 동력으로 변환하는 장치…….'
도진은 고개를 돌려 벽면에 붙은 '여객 안전 수칙'판을 쏘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제4조 문항에 꽂혔다.
[4. 4번 좌석은 노약자 및 임산부 지정석이므로 절대 비워두어야 합니다. 이를 위반하고 임의로 착석할 경우 처분 대상이 됩니다.]
'비워두어야 한다'는 이 규칙 역시 괴이들이 교묘하게 파놓은 함정이었다. 승객들이 함부로 앉지 못하게 유도하는 동시에, 공포에 질린 트롤러가 규칙을 오독하여 앉는 순간 영혼과 육체를 합법적으로 갈취하기 위한 덫.
도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 칸을 무사히 돌파하고, 계선역에 갇힌 동생 서진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 왜곡된 규칙의 판 자체를 뒤흔들어야 했다.
도진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빛의 미세한 스파크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가이드라인의 위조 서명'을 발동할 차례였다.
하지만 이 강력한 골든핑거에는 가혹한 대가가 따른다. 이미 오른쪽 청각을 상실한 상태에서, 이번에는 어떤 감각을 지불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혼의 통행세는 자비가 없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도진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오직 동생을 구하겠다는 일념이 그의 편집증적인 이성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내고 있었다.
"승인한다."
도진이 나직하게 독백했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앞에 붉은색 경고등이 켜지듯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안구 뒷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안압이 전해졌다.
'시각 소실…….'
이번 대가는 시각이었다. 앞으로 30분 동안, 그는 완벽한 어둠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청각에 이어 시각까지 잃는다는 것은 이 지옥 같은 열차 안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도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기 직전의 그 찰나의 순간,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안내판의 제4조 문항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치이이이익!
도진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르며 수칙서의 글자들을 지워나갔다. '절대 비워두어야 합니다'라는 문장이 타오르며 완전히 소멸했다.
그는 그 자리에 새로운 문장을 새겨 넣었다.
['4. 4번 좌석은 귀빈만 탑승 가능하며 괴이는 앉을 수 없습니다.']
지이잉!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안내판이 시뻘건 불꽃을 뿜어내며 현실이 개조되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엑-!"
4B석에 앉아 있던 기괴한 정장 차림의 승객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새롭게 개조된 규칙에 의해,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존재 자체가 '위법'으로 규정된 것이었다. 4B석의 가죽 시트 밑에서 솟구쳐 오른 무형의 이빨들이, 이번에는 그 괴이의 하반신을 사정없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바닥의 티켓 구멍들이 역류하듯 붉은 안개를 뿜어내며 괴이의 생명력을 사정없이 빨아들였다. 괴이의 신체가 종이처럼 구겨지며 전철의 벽면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완벽한 역살이었다.
괴이들이 설계한 덫을 그들 자신을 파멸시키는 살상 무기로 되돌려준 도진의 정교한 승리였다.
하지만 카타르시스는 극히 짧았다.
스우우우…….
도진의 시야를 채우고 있던 마지막 빛줄기가 급격하게 바래져 갔다. 사방의 형광등 불빛이 먼지처럼 흩어지더니, 이내 칠흑 같은 완전한 암흑이 그의 시야를 덮쳐왔다.
오른쪽 귀는 여전히 무음의 지옥 속에 갇혀 있었고, 이제 두 눈마저 완벽한 어둠 속에 매몰되었다.
왼쪽 귀로만 들려오는 민세희의 경악 섞인 숨소리와, 열차가 선로를 달리는 불길한 진동만이 도진이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끈이었다.
도진은 어둠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벽면에 손을 뻗어 의지했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완전한 고립. 소리도, 빛도 없는 세계에서 그는 오직 자신의 차가운 이성만을 나침반 삼아 서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산한 냉기가 도진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른쪽 귀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 완벽한 암흑 속에서…….
도진의 오른쪽 어깨 위로,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 하나가 부드럽게 얹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