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철창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비린내를 머금고 있었다.

자정을 가리키는 시계 바늘이 겹치는 순간, 도심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잘려 나갔다. 지하철역 입구를 가로막은 두꺼운 쇠 셔터는 녹슨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발길을 돌렸을 터였다. 하지만 한도진은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쇠지렛대를 꺼냈다.

철컥, 끼이이익…….

적막을 찢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막을 긁었다. 도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지렛대에 체중을 실었다. 부서진 사슬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금속음을 냈다.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는 도진의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동생 서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꼭 일주일째였다. 경찰은 단순 가출이라며 서류를 넘겼지만, 도진은 믿지 않았다. 서진이 마지막으로 남긴 휴대전화 메모장에는 단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자정이 지나면, 승강장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 열차가 들어와.']

편집증에 가까운 집요함으로 서진의 동선을 추적한 끝에 도달한 곳이 바로 이 폐쇄된 지하 역사였다.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차가운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 밑창이 시멘트 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소리가 났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지하인데도 어디선가 축축한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승강장에 들어서자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분명 폐쇄된 역이었음에도 스크린도어 너머의 선로에는 미약한 진동이 흐르고 있었다. 지잉, 하는 기분 나쁜 주파수 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정각 자정 15분.

어둠 저편에서부터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불빛 하나 없는 선로를 뚫고, 녹슬고 찌그러진 전철 한 대가 미끄러지듯 승강장으로 진입했다. 열차 옆면에 갈라진 틈새로 정체 모를 붉은 액체가 말라붙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도진의 코끝을 찔렀다.

스르륵…….

문이 열렸다. 전철 내부의 형광등은 노란빛과 녹색빛이 기괴하게 뒤섞인 채 깜빡이고 있었다. 도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열차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가 완전히 탑승하자마자, 뒤편의 스크린도어와 전철 문이 동시에 거칠게 닫혔다.

쾅!

그것은 단순한 문 닫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곳이 현실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선언하는 단두대의 칼날 소리와도 같았다.

도진은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철 내부는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했음에도 철로를 달리는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직 덜컹거리는 진동만이 발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질 뿐이었다. 바닥에는 검게 변색된 얼룩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그때, 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하얀색 안내판이 도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극히 평범한 서울교통공사의 마크가 찍힌 서류 형태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도진은 천천히 안내판으로 다가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객 안전 수칙] 본 열차를 이용하시는 승객 여러분의 안전한 여정을 위해 아래의 수칙을 반드시 준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본 열차는 종착역인 ‘계선역’까지 멈추지 않고 운행합니다. 도중에 하차를 시도하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됩니다. 2. 각 칸의 이동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으나, 특정 상황에서는 예외가 인정될 수 있습니다. 3. 열차 운행 중 탄내가 나거나 머리카락이 타는 듯한 냄새가 날 경우, 즉시 눈을 감고 제자리에 앉으십시오. 눈을 감고 3분 동안 움직이지 않으면 안전이 보장됩니다. 4. 4B석의 승객이 말을 걸어올 경우……

"이게……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갑작스러운 비명이 고요한 객차 안을 찢었다.

도진은 눈동자만 굴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몇 칸 떨어진 좌석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던 사내였다. 헝클어진 머리에 찢어진 셔츠를 걸친 사내는 극도의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강태식. 도진보다 먼저 이 열차에 타 있었던 모양이었다.

강태식은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며 안내판 앞으로 달려들었다.

"눈을 감으라고? 3분을 가만히 있으라고? 이 미친 괴물 새끼들이 장난질을 쳐놨네! 다 거짓말이야! 눈을 감으면 그 사이에 목을 따버리겠다는 거잖아!"

그는 광기에 휩싸여 손톱이 깨지도록 안내판을 긁어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얇은 종이가 찢겨 나갔다. 강태식은 이성을 잃고 도진이 서 있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야! 너도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도 해봐! 이거 다 사기라고! 나가야 해,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강태식은 도진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며 지나치려 했다. 뜬금없는 폭력에도 도진의 신체는 미세하게 흔들렸을 뿐,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도진은 자신을 밀치고 지나간 강태식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그의 떨리는 손가락, 호흡의 주기, 비상식적인 행동 패턴…….

'트롤러군.'

도진은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 공포에 질려 규칙을 파괴하려는 존재. 이런 자들은 오컬트 괴담의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도태되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저자가 날뛰어 준다면 오히려 진짜 규칙과 가짜 규칙을 구별할 좋은 이정표가 되어줄 터였다.

도진은 강태식의 폭주에 휩쓸리지 않고, 찢어지지 않은 안내판의 3조 문항을 곱씹었다.

'탄내가 날 때 눈을 감으라니……. 전형적인 기만이다.'

행정 문서의 탈을 쓴 사악한 덫. 만약 이 수칙을 그대로 믿고 눈을 감는다면,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침입해 육체를 찢어발길 것이 분명했다. 괴이들은 직접적으로 인간을 해칠 수 없기에, 이처럼 교묘한 서술 트릭을 통해 승객 스스로 자멸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때였다.

치이익…….

전철 천장의 환풍구에서 미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단백질이 타는 냄새. 머리카락을 불에 태울 때 나는 지독하고 불쾌한 악취였다.

"헉……! 숨이……!"

강태식이 냄새를 맡고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안내판을 찢으며 소리치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그는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 눈을 감아야 하나? 아니야, 감으면 안 돼…… 하지만 냄새가……!"

강태식의 갈등은 길지 않았다. 사방에서 스며드는 붉은 안개가 열차 칸을 채우기 시작하자, 그는 결국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으아악! 감을게! 감는다고! 그러니까 오지 마!"

그가 수칙의 기만적인 함정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도진은 그 모습을 냉정하게 응시했다. 붉은 안개는 서서히 도진의 발목을 타고 올라와 허벅지, 그리고 가슴까지 차올랐다. 기이하게도 그 안개가 몸에 닿는 순간, 도진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빛 글자들이 떠올랐다.

[가이드라인의 위조 서명 (Forgery of the Guideline)이 개방됩니다.] [당신은 행정 안내문 중 '가짜 규칙'을 인지하고 조작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습니다.] [단, 규칙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통행세를 지불해야 합니다.]

뇌리를 직접 타격하는 차가운 목소리. 도진은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이 지옥 같은 열차에서 살아남아 서진을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자, 자신만의 무기라는 것을.

가이드라인의 위조 서명.

도진의 시선이 찢어지다 만 안내판의 3조 문항으로 향했다. 그 문장의 밑줄이 붉은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괴이들이 쳐놓은 명백한 '가짜 규칙'이라는 증거였다.

[위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대가를 선택하십시오: 최초 사용의 대가로 30분간 '우측 귀의 청각'이 완전히 소실됩니다.]

우측 귀의 청각 상실.

전철 안에서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과 직결되는 치명적인 페널티였다. 사방에서 기어오는 괴물의 발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도진은 단 1초도 주저하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매 순간마다 동생 서진의 목숨이 지옥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저 쓸모없는 트롤러가 옆에서 비명을 지르며 미끼 역할을 해주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저놈이 내 오른쪽을 대신 경계해 주겠지.'

도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타인을 극도로 불신하는 그의 신경질적인 편집증이 가장 효율적인 생존 공식을 도출해 낸 순간이었다.

"승인한다."

도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 순간, 우측 귀에서 삐이이- 하는 이명이 일더니, 이내 모든 소리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오른쪽 반신이 완전히 물속에 잠긴 듯한 기괴한 감각이었다. 고막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적막감.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도진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빛의 스파크가 일었다. 도진은 주저 없이 안내판의 3조 문항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허공을 가로지르며 글자를 지워나갔다.

[3. 열차 운행 중 탄내가 나거나 머리카락이 타는 듯한 냄새가 날 경우, 즉시 눈을 감고 제자리에 앉으십시오.]

도진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가 완전히 지워졌다. 그는 그 위에 새로운 문장을 덧씌우듯 손끝을 움직였다.

['3. 열차 운행 중 탄내가 나거나 머리카락이 타는 듯한 냄새가 날 경우, 절대로 눈을 감지 말고 전방의 붉은 안개를 응시하십시오.']

치이이익!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안내판의 종이가 붉은빛으로 타오르며 현실이 개조되기 시작했다.

사방을 메우던 붉은 안개가 급격하게 요동쳤다.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고, 이내 도진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안개를 노시하는 도진의 강인한 의지 앞에, 괴이들이 설계한 환각의 결계가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어…… 어?"

눈을 가리고 있던 강태식이 슬며시 손가락 틈새로 눈을 떴다. 안개가 걷히고 사방이 고요해지자, 그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내가 살았어! 수칙이 맞았어! 눈을 감으니까 진짜로 살았다고!"

강태식은 도진이 규칙을 위조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기만적인 규칙이 자신을 구원했다고 굳게 믿으며 실성한 듯 웃어댔다. 도진은 그 한심한 꼴을 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진짜 규칙의 맹점을 파고드는 정교한 서스펜스 게임. 이제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하지만 카타르시스도 잠시.

도진의 우측 귀는 여전히 무음의 지옥 속에 갇혀 있었다. 왼쪽 귀로는 강태식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오른쪽은 오직 진공 상태의 고요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불길한 진동이 왼쪽 고막을 타고 넘어와 뇌를 흔들었다.

도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전철의 연결 통로를 바라보았다.

오른쪽 청각이 소실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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