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육중한 철문이 좌우로 갈라지며 뿜어낸 것은, 단순한 김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지하 깊은 곳에 고여 썩어간 인간의 체취와 비린내가 뒤섞인, 찐득하고 차가운 백색의 수증기였다.
오른쪽 눈에서 흘러내린 피가 뺨을 타고 턱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을 느낄 감각이 없었다. 가이드라인을 위조한 대가로 촉각과 고유수용 감각을 통째로 압수당했기 때문이다. 내 뺨이 젖어 있는지, 손끝이 차가운지조차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세상이 온통 비틀린 흑백의 평면처럼 보였다. 남은 왼쪽 눈 하나만으로 초점을 맞추려 하니, 거리감이 완전히 소실되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아찔한 절벽을 걷는 기분이었다.
"도진 씨! 제발 정신 좀 차려봐요……! 오른쪽 눈에서 피가……!"
민세희가 내 팔을 다급하게 붙잡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입술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귓가에는 째지는 듯한 비명이 고스란히 꽂혔다. 하지만 내 피부는 그녀가 나를 쥐고 흔드는 힘을 손톱만큼도 인지하지 못했다. 마치 타인의 몸을 거울 너머로 관찰하는 듯한 기괴한 괴리감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나는 실족하지 않기 위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세희의 어깨를 짚었다. 그녀의 옷자락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지는 모양새를 왼쪽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내가 지탱하고 있음을 안도할 수 있었다.
"가야 해……."
내 목소리가 메마른 모래알처럼 갈라져 나왔다.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승강장의 공기는 기도를 태울 것처럼 매캐했다. 한쪽 눈을 깜빡이며, 나는 열차의 차장실 문턱을 넘어 마침내 계선역의 승강장 바닥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스스스스…….
발바닥이 닿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시선 끝에서 내 구두 굽이 닿은 바닥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비쳤다.
그것은 평범한 콘크리트 승강장이 아니었다.
바닥 전체에 수만 개의 미세한 배수구 같은 검은 구멍들이 그물망처럼 촘촘히 뚫려 있었다.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숨구멍처럼 기괴하게 뚫린 구멍들. 내 우측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턱 끝에서 떨어져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핏방울이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보통의 공간이라면 미세하게나마 '툭' 하는 마찰음이 들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 구멍들은 소리마저 삼켜버리는 절대적인 무음의 심연이었다. 이전에 전철 안에서 동전을 떨어뜨렸을 때 느꼈던 그 기괴한 무음 현상이, 이곳 계선역 승강장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승강장의 벽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타일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의 늑골과 두개골이었다.
검붉게 변색한 뼈들이 서로 정교하게 맞물려 거대한 기둥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녹슬고 뒤틀린 수천 개의 기차 바퀴들이 기괴한 탑처럼 쌓여 승강장의 천장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이게…… 이게 대체 다 뭐예요……?"
세희의 목소리가 이빨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공포를 이겨내려는 듯 내 옷자락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나 역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왼쪽 눈을 굴려 승강장 저편을 응시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승강장 기둥 너머, 낡고 부식된 이정표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져 나간 표지판에는 흘려 쓴 글씨로 '계선역'이라는 세 글자가 간신히 박혀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는 행정 문서의 형태를 띤 낡은 철판 수칙서가 붉은빛을 뿜으며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 공간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법령이었다.
[귀속 법령 제9조: 한번 역에 내린 혼령은 다음 배차 시까지 전철의 부속품으로 존재해야 한다.]
붉은 글씨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핏줄처럼 꿈틀거렸다.
그 순간, 승강장 구석구석에 기괴하게 쌓여 있던 유골과 기차 바퀴 더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득, 쿠드득…….
뼈마디가 어긋나고 쇠붙이가 마찰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사방에서 웅성거리듯 번져나갔다. 그것들은 단순한 잔해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반쯤 으스러진 승객들의 육신이 쇳덩이와 한데 뒤엉켜 있는 끔찍한 형상들이었다.
가죽이 벗겨져 붉은 속살을 드러낸 얼굴, 열차 차창에 끼여 기형적으로 늘어난 팔다리, 척추뼈 대신 톱니바퀴가 박혀 있는 몸뚱이들이 거미처럼 바닥을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살려…… 줘……."
"나를…… 끼워…… 맞춰……."
그들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녹슨 기계가 헛도는 듯한, 듣는 것만으로도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마찰음이었다. 수십, 수백 명에 달하는 인귀들이 우리를 향해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며 기어왔다.
"도진 씨……! 저기, 저것들이 와요……! 어떡해요, 대피해야……!"
세희가 비명을 지르며 내 팔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남은 왼쪽 눈의 시선이, 그 기어오는 인귀들의 중심부에서 요동치는 유독 거대한 쇳덩이 탑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거대한 주철 기어와 하반신이 완벽하게 융합된 채, 상체만 간신히 드러내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가슴팍에는 정교한 시계 태엽 장치가 살을 찢고 솟아나 있었고, 태엽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척추를 대신해 박힌 쇠창살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살점을 뚫고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서진아."
내 목소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떨려 나왔다.
그것은 내 동생, 한서진이었다.
실종되었던, 내가 이 지옥 같은 전철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게 만든 유일한 이유.
서진이의 두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회색빛으로 탁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오빠인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기계 인형처럼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날카로운 주철 톱니가 솟아나며, 나를 향해 서서히 뻗어왔다.
그녀 역시 이 역의 '귀속 법령 9조'에 묶여, 열차를 굴리기 위한 하나의 부속품으로 동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서진아! 나를 봐! 네 오빠야!"
나는 촉각이 마비된 손을 억지로 뻗어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내 손끝은 허공을 갈랐고, 서진의 차가운 쇠창살이 내 가슴팍을 향해 다가왔다.
"소용없어요……! 이미 영혼이 저 기계에 침탈당한 거라고요!"
세희가 내 허리를 껴안으며 뒤로 잡아당겼다.
"아니, 그럴 리 없어. 내 동생은…… 이딴 고철덩어리가 될 리가 없어!"
내 안의 편집증적인 광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타인을 믿지 않고, 오직 계산만을 신뢰하던 내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성적인 계산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는 차갑게 식어내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 논리적 맹점을 찾아야 했다.
그때, 세희가 자신의 품 안에서 떨리는 손으로 무언가를 꺼내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도진 씨, 이거……! 서진이가 그날 역으로 가기 전에, 제게 맡기면서 했던 말이 있어요……!"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극도로 낡고 때가 탄, 작은 나비 문양이 음각된 은색 펜던트였다. 3화에서 세희가 내게 보여주며 서진이의 이야기를 전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아무리 어두운 곳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잊지 않고 연대한다면…… 반드시 길을 찾을 수 있어.'
서진이가 평소에 늘 입버릇처럼 지니고 다니던 가치관. 타인을 믿지 못하는 나와 극단적으로 대비되던, 그녀만의 따뜻하고 어리석은 신념이 담긴 증표였다.
나는 감각이 없는 손가락을 오직 시각적 인지만으로 통제하며, 세희의 손에서 펜던트를 거칠게 낚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기어오는 서진의 탁한 눈동자 바로 앞에 들이밀었다.
"한서진! 똑똑히 봐! 네가 남긴 쓰레기 같은 신념이 여기 있어!"
나는 서진의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아무리 어두운 곳에서도 서로 손을 잡으면 길을 잃지 않는다며! 네가 나를 두고 이딴 쇳덩어리가 되면, 나는 누구 손을 잡고 나가야 하는데! 대답해 봐, 한서진!"
나비 문양의 펜던트가 승강장의 붉은 형광등 빛을 받아 미세하게 반짝였다.
그 순간.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정교하게 돌아가던 서진의 가슴팍 태엽 장치가, 거친 마찰음과 함께 일시적으로 회전을 멈췄다.
"으…… 으아아……."
서진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탁하던 회색빛 눈동자 속에서, 아주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인간으로서의 영혼이 찰나의 순간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그녀의 눈가에 고인 핏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 빠……?"
그녀가 나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기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승강장 벽면의 귀속 법령 제9조가 더욱 강렬한 붉은 광채를 뿜어내며, 서진의 몸속에 박힌 쇠창살들을 사정없이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아악! 아가아악—!"
서진이 비명을 질렀다. 쇠창살이 그녀의 살점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며 척추를 고철 기어에 고정하려 했다. 역의 시스템이 규칙 위반자를 처단하듯, 그녀의 영혼을 강제로 압수하려는 것이었다.
'한번 역에 내린 혼령은 다음 배차 시까지 전철의 부속품으로 존재해야 한다.'
이대로 두면 서진이는 완벽한 고철 부속품이 되어 영원히 이 역의 일부가 된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남은 왼쪽 눈으로 이정표 아래의 수칙판을 쏘아보았다.
내 안의 골든핑거, '가이드라인의 위조 서명'을 발동할 차례였다.
머릿속에서 차가운 수학적 계산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규칙을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단어 하나를 위조하여, 현실의 법적 해석을 완전히 뒤틀어버릴 수는 있다.
'부속품(Accessories)'이라는 단어.
이것이 서진이를 쇳덩이로 만드는 족쇄였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머릿속의 위조 펜이 수칙판의 붉은 글자를 사정없이 긁어내기 시작했다.
[한번 역에 내린 혼령은 다음 배차 시까지 전철의 '지상의 현존 인류 소환 대상자'로 존재해야 한다.]
단어를 고쳐 쓰는 순간, 내 머릿속 전체가 뜨거운 인두로 지져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이것은 영혼의 통행세였다. 능력을 발휘할 때마다 치러야 하는 잔혹한 대가.
"끄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코끝을 맴돌던 썩은 비린내와 매캐한 탄내가 한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후각의 완전한 상실.
그뿐이 아니었다.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승강장의 찐득한 냉기도, 내 오른쪽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피의 온기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뜨거움과 차가움을 인지하는 온각마저 통째로 뜯겨 나간 것이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감각은 오직 반쪽짜리 시계(시각)와, 세희의 비명 소리를 겨우 잡아내는 청각뿐이었다. 온몸이 얼어붙은 얼음덩어리가 된 것처럼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기괴한 상태.
하지만…… 위조는 성공했다.
철판에 새겨진 붉은 글씨가 완벽하게 변형되어 고정되었다.
[한번 역에 내린 혼령은 다음 배차 시까지 전철의 지상의 현존 인류 소환 대상자로 존재해야 한다.]
열차의 사법 시스템이 거대한 모순에 부딪혔다.
소환된 대상자는 '지상의 현존 인류'로 정의되어 있었다. 즉,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열차의 규칙에 따라 서진이의 신분은 이제 '부속품'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으로 강제 재정의되었다.
시스템은 산 자를 함부로 해체하거나 기계 부품으로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열차 스스로가 규정한 불법 행위이기 때문이다.
스스스스…….
서진이의 몸을 옭아매고 있던 녹슨 쇠창살과 가슴팍의 태엽 장치가, 마치 거부 반응을 일으키듯 비명을 지르며 스스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하반신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주철 기어 역시 힘없이 바스러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빠…… 나, 나 몸이……."
서진이의 뺨을 타고 흐르던 피눈물이 멈추고, 맑은 눈물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녀가 마침내 쇳덩이의 속박에서 벗어나 내 품으로 쓰러지듯 엎어졌다. 촉각이 없어 그녀의 무게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내 왼쪽 눈은 그녀가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구했어……."
세희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역시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계산과 룰의 맹점을 파고든 정교한 승리였다.
동생이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제 몸에 박혀 있던 마지막 쇳덩이를 떼어내는 바로 그 찰나.
쿠구구구구구궁—!
승강장 전체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닥의 미세한 구멍들 속에서, 정체 모를 검은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소리 없이 뿜어져 나온 검은 액체는 승강장 바닥을 순식간에 한강처럼 채워 나갔다.
동시에, 천장을 지탱하고 있던 거대한 철제 대들보들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스극, 끄으으윽……!
대들보들이 뱀처럼 뒤틀리며 승강장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려앉았다. 쇳덩이들이 서로 맞물리고 꺾이며,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이루어 가기 시작했다. 높이만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철제 거인의 형상.
그것은 이 기괴한 열차의 규율을 수호하는 철도 공무단, 그 정점에 선 존재.
'차장'의 또 다른 외양이었다.
어둠 속에서, 대들보로 만들어진 거인의 몸체 곳곳에 박힌 수십 개의 붉은 기차 전조등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우리를 겨냥했다. 차장의 기괴하고 거대한 눈동자들이 뿜어내는 붉은 광채가, 반쯤 눈이 먼 내 왼쪽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규칙의 기만은…… 사법 처분의 대상이다…….]
승강장 전체를 뒤흔드는 웅장하고 냉혹한 목소리가 우리를 포위하듯 짓눌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