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내딛는 순간, 헤이즈 영애는 물론이고 대의회 사법관들의 목숨줄도 내 장담하지 못한다.”

황태자 카일의 검끝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검푸른 마력이 검신을 타고 넘실거리며 대지를 짓눌렀다.

“스승님의 영역을 더럽힌 대가는 뼈를 깎는 고통으로도 모자랄 텐데. 먼지로 만들어 줄까?” 렌이 들고 있는 마법 지팡이 끝에서 붉은빛의 폭발성 에너지가 파지직 소리를 내며 팽창했다.

“신성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오직 단죄뿐입니다. 물러서십시오.” 요한이 거대한 대검을 바닥에 내리찍자, 묵직한 파동이 사법관들의 발밑을 흔들었다.

비올레타의 등 뒤에 서 있던 대의회 사법관 세 명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들이 들고 있던 철제 구속구가 요란하게 부딪히며 자진모리를 연주했다. 상대는 제국의 황태자, 탑주의 후계자, 그리고 신전의 최강 기사였다. 이 셋 중 누구 하나만 심기를 거슬러도 가문 전체가 지워질 판국이었다.

하지만 비올레타는 눈이 뒤집혀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안개 너머로 사물함 폭발의 굴욕이 스쳐 지나갔다. 보라색 향 가루가 머리칼에 엉겨 붙어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와중에도, 그녀는 체포 고발장을 쥔 손을 바르르 떨며 악을 썼다.

“전하! 아무리 황족이라 하셔도 국가 금기인 이단 마도서 소지 혐의자를 비호하실 수는 없습니다! 대의회의 정식 심의를 거친 체포 명령서입니다! 법을 수호하셔야 할 분들이 어찌 이리 눈이 멀어 가증스러운 범죄자 년의 앞길을 막아서신단 말입니까!”

그녀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숲의 평화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리고 그 소음은, 나무 그늘 밑 침낭 속에서 단잠에 빠져 있던 엘리시아의 고막을 직격했다.

‘아…… 시끄러워.’

엘리시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야 위로, 기다렸다는 듯이 반투명한 에메랄드빛 장부가 번쩍이며 눈앞을 가로막았다.

[경고! 돌발 상황 발생!] [적대자 비올레타의 ‘국가 금기 마도서 소지 유죄 가스라이팅’ 공작 진행 중!] [현재 상황에서 남주 3인이 무력으로 사법관을 제압할 시 발생하는 귀찮음 비용:] - 황태자 카일의 사법권 침해 수습 비용: 200,000 골드 및 호감도 +40 - 마탑 천재 렌의 대의회 폭파 수습 비용: 150,000 골드 및 호감도 +35 - 성기사단장 요한의 신전 규율 위반 변호 비용: 180,000 골드 및 호감도 +38 [예상 총 귀찮음 지수: 530,000 P]

[★초비상 경보★] [현재 일일 규정 불면 누적 버프 지수: 495 / 500] [남주들의 호감도가 임계치를 돌파하거나, 엘리시아 님의 개입으로 소란이 커질 시 누적 수치 500을 초과합니다.] [누적 수치 500 도달 시 페널티 발동: ‘강제 불면증 버프’ (일주일 동안 단 1초도 잠들 수 없음)]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잔다고?’

눈앞의 경고등이 붉은색으로 사정없이 깜빡이자 엘리시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루에 최소 열두 시간은 자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는 그녀였다. 단 하루만 밤을 새워도 영혼이 유체 이탈을 시도하는 판국에, 일주일 동안 무수면 상태로 버텨야 한다니. 그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엘리시아의 뇌세포가 초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침서의 최적 방관 루트가 우측 하단에 조그맣게 떠올랐다.

[최적의 방관 루트 안내] - 남주들의 무력 제압을 저지하고 순순히 기소장을 수령할 것. - 심문실로 자진해서 이동하여 상황의 규모를 축소할 것. - 예상 귀찮음 비용: 50 P (안락한 마차 이동 및 조용한 독방 연금 혜택 발생 가능) - 일일 불면 누적 지수 상승량: 0

답은 정해져 있었다. 기소장을 찢어 발기며 칼부림을 벌이는 남주들을 놔두다간 내일부터 눈을 부릅뜬 채 밤을 지새워야 한다.

엘리시아는 꼬여 있는 침낭 지퍼를 거칠게 내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자, 대치하고 있던 세 남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스승님! 깨우셨습니까? 저 무식한 벌레들이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렌이 안절부절못하며 지팡이를 내렸다.

“엘리시아 영애, 내 불찰이오. 그대의 단잠을 지켜주지 못했군.” 카일이 검을 비스듬히 내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비올레타를 쏘아보았다.

“성녀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 신성모독자들의 주둥이를 당장 다물게 만들겠습니다.” 요한 역시 대검을 고쳐 잡으며 살기를 뿜었다.

‘제발 그 무서운 연장들 좀 치워 주면 안 될까?’

엘리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피곤하고 무해한 표정으로 숲 입구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마치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진 순교자처럼 무겁고도 초연했다.

“엘리시아 영애……?” 카일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시아는 카일의 검날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밀어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말끝을 흐리는 특유의 귀찮은 말투였다.

“……그냥 갈게요.”

“예? 그게 무슨…….” 카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일 키우지 마세요. 시끄러운 건 질색이니까…… 그냥 가서 조사받고 끝낼게요.”

엘리시아는 사법관이 쥐고 있던 붉은 인장의 체포장을 뺏듯이 낚아챘다. 그리고는 비올레타를 유령 보듯 무심하게 지나치려 했다. 그 눈빛에는 어떠한 분노도, 억울함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귀찮으니 빨리 해치우고 자고 싶다’는 열망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는 카일의 머릿속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아…….’

카일의 가슴에 둔탁한 통증이 일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려는 것이었다. 황태자인 자신과 마탑의 후계자, 신전의 기사가 대의회와 무력으로 충돌할 경우 발생할 제국의 정치적 파장을 우려한 것이 분명했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저 더러운 음모의 구렁텅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뜻인가.’

카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시아의 저 무심하고도 초연한 태도는, 제국의 곪아 터진 사법 체계와 탐욕스러운 귀족 가문의 음모를 온몸으로 받아내 고발하겠다는 숭고한 순교 의사로 비쳤다. 스스로 비를 맞음으로써 제국의 더러움을 씻어내겠다는 침묵의 성녀다운 결단.

“엘리시아 영애. 그대의 그 깊은 뜻을…… 내 어찌 모르겠소.” 카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품속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 모르는데? 넌 좀 몰라야 하는데?’

엘리시아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사이, 카일은 품 안에서 황실 전용 마법 도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검은색 실크로 정교하게 짜여진, 황실 문장이 금실로 수놓아진 안대였다.

“이것은 황가 전용으로 제작된 ‘대용량 보온 음성 영구 수면 안대’요. 강력한 차음 결계가 걸려 있어 외부의 그 어떤 음파도 차단하며, 착용자의 뇌파를 안정시켜 깊은 수면을 유도하지. 심문실로 가더라도, 저들의 천박한 주둥이에서 나오는 소음을 들을 필요는 없소.”

[아이템 정보] - 명칭: 황실 전용 ‘절대 침묵의 수면 안대’ - 효과: 외부 소음 100% 차단, 안구 온도 36.5도 유지, 마력 안정을 통한 숙면 유도. - 귀찮음 방지 효율: 극상.

엘리시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런 신기한 물건이 존재했다니. 아카데미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낮잠을 청할 때마다 귀마개를 쑤셔 넣던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저 안대만 있다면 사법관들이 옆에서 꽹과리를 쳐도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사히 쓸게요.”

엘리시아는 잽싸게 안대를 빼앗아 품에 안았다. 마치 대단히 유용한 사은품 자원을 획득한 사냥꾼의 몸짓이었다. 그녀는 미련 없이 침낭을 털어 어깨에 멨다.

“스승님! 정녕 가시겠다면 제가 심문실을 통째로 마법 장벽으로 감싸 소음을 차단하겠습니다!” 렌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성녀님, 제 가슴에 품어둔 이 공명석 펜던트를 가져가십시오. 저들의 간악한 심문 내용이 조금이라도 부당하다면, 이 요한이 온 신전의 군대를 이끌고 징계실을 부수겠습니다.” 요한이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펜던트를 꺼내 엘리시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엘리시아는 요한의 손길마저 귀찮아 대충 펜던트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알았으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

그녀는 품에 넣은 카일의 ‘은빛 열쇠’와 요한의 ‘공명석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사법관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가요.”

비올레타는 승리를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불쾌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죄인이 되어 끌려가는 엘리시아의 태도가 지나치게 당당하고 태평했기 때문이다. 마치 귀찮은 스케줄을 소화하러 가는 대귀족의 유유자적한 걸음걸이 같았다.

“흥, 가식도 여기까지다 엘리시아! 심문실의 매서운 맛을 보고도 그 낯짝을 유지할 수 있는지 보겠다!”

비올레타는 씩씩거리며 앞장섰다.

* * *

아카데미 중앙 광장은 이미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비올레타가 사전에 ‘이단 마도서 소지죄’로 엘리시아를 고발했다는 소문을 대대적으로 퍼뜨린 탓이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사교계의 귀부인들까지 몰려와 수군거리고 있었다.

“어머, 정말로 엘리시아 영애가 연행되는 건가요?” “황태자 전하를 굴복시킨 그 침묵의 영애가?”

하지만 광장에 모인 이들의 입은 이내 다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호송 행렬의 모습이, 그들이 생각한 ‘죄인의 압송’과는 우주만큼의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색 철창이 달린 칙칙한 사법 마차 대신, 광장에 나타난 것은 황실의 상징인 금빛 용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황제 전용 VIP 수송 전차였다.

마차의 바닥에는 최고급 양모 카펫이 깔려 있었고, 마차 내부에는 마법으로 온도가 조절되는 푹신한 카우치 쇼파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쇼파 위에는, 엘리시아가 황실 전용 ‘절대 침묵의 수면 안대’를 눈에 얹은 채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저게 죄인의 모습이라고?” 한 학생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니, 호송되는 길조차 도를 닦으시는구나. 저 초연함 수치를 좀 봐. 죽음 앞에서도 잠을 청하시는 저 담대함…… 역시 침묵의 성녀님이야.” “대의회의 얄팍한 압박 따위는 하품 한 번으로 날려버리겠다는 무언의 경고가 틀림없어!”

구경꾼들의 수군거림은 어느새 경외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교계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엘리시아의 이 태도를 두고 새로운 해석이 돌기 시작했다. 법의 강제력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오히려 침묵과 수면으로 부조리한 권력에 저항하는 ‘신성한 방조론’의 극치라는 평가였다.

“엘리시아록에 기록해라. ‘진정한 강자는 소란에 흔들리지 않고 안대를 쓴다’라고.” 어느 영애가 비장한 표정으로 수첩에 깃펜을 놀렸다.

마차 옆을 걷던 비올레타는 사람들의 반응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차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야! 엘리시아! 잠이 오냐? 지금 네가 무슨 죄로 잡혀가는지 알기나 해? 이단 마도서라고! 제국법상 화형까지 처해질 수 있는 중죄란 말이다!”

쾅쾅거리는 소음이 마차 벽을 울렸지만, 엘리시아가 쓴 안대의 차음 결계는 완벽했다. 엘리시아는 그저 몸을 살짝 뒤척이며, 쇼파 옆에 구비된 황실 전용 실크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렸을 뿐이었다.

“저, 저 년이 진짜……!” 비올레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의 뒤에서 마차를 호위하던 카일의 전속 기사들이 차가운 눈빛으로 비올레타의 손목을 잡아챘다.

“헤이즈 영애. 황태자 전하의 명에 따라, 호송 중인 영애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즉각 현장에서 구금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 번만 더 마차를 두드렸간 손가락뼈를 추려내야 할 겁니다.”

기사의 서늘한 경고에 비올레타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엘리시아는 비올레타의 속을 터지게 만들며,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VIP 수송 전차 안에서 달콤한 오수(午睡)를 즐겼다. 일주일 무수면 페널티의 위기를 넘긴 대가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 * *

얼마나 잤을까. 마차가 멈춰 서는 묵직한 진동과 함께 안대 너머로 서늘한 기운이 밀려왔다.

“……영애, 도착했습니다.” 사법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안대 틈새로 스며들었다.

엘리시아는 아쉬움을 가득 담아 안대를 벗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황홀한 마차 내부와는 180도 다른, 음산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대의회 지하실이었다.

사방이 마법 무효화 합금인 미스릴과 철제로 둘러싸인 거대한 원형 심문실. 방 한가운데에는 빛 반사조차 허용하지 않는 둔탁한 검은색 철제 심문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주위로 세 명의 수석 심문관들이 무서운 기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자비라곤 찾아볼 수 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법의 냉혹함이 서려 있었다.

비올레타는 심문실 한구석에 서서 승리감에 도취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황태자가 뒤를 봐준다 한들, 이곳은 대의회 직속의 이단 심문실이었다. 황실의 권력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는 사법의 성역. 이곳에 들어온 이상 엘리시아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엘리시아는 귀찮은 한숨을 내쉬며 철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자가 차가웠다. 엉덩이가 시리니 빨리 끝내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수석 심문관이 차가운 목소리로 정적을 깨뜨렸다.

“엘리시아 데 로스벨트. 그대는 아카데미 내 금기 구역에 보관되어 있던 이단 마도서를 사적으로 유출하고, 이를 사용해 불온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순순히 자백하지 않는다면, 이 방에서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문관들이 탁자 위에 설치된 거대한 취조용 마법 등불 세 개를 동시에 일시에 켜 들었다.

화아아악!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백색광이 엘리시아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살기를 가득 담은 마력의 압박이 숨통을 조여오는 위협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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