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끝내지 않아……! 네가 아무리 황태자와 기사단장을 홀렸어도, 국가의 법과 이단 심문소의 칼날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붉은색 마법 양장 카드가 허공에서 화르륵 타오르며 대의회 행정실로 날아가던 그 극적인 순간, 엘리시아가 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아, 향 가루 날리네. 재채기 나올 것 같다.’
콧구멍을 간지럽히는 매캐한 폭발 향료의 냄새를 맡으며 엘리시아는 조용히 발걸음을 뒤로 옮겼다. 비올레타가 피눈물을 흘리며 “두고 보자!”라고 저주의 독설을 퍼붓든 말든, 사교계의 영예가 나락으로 떨어지든 말든 그것은 엘리시아의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함 폭발 소동으로 인해 빼앗긴 소중한 낮잠 시간을 단 1분 1초라도 빨리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란스러운 사물함 구역을 빠져나와 그녀가 기어들어 간 곳은 아카데미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절대 성역, ‘황혼의 숲’이었다. 고대 결계가 흐르는 이 고요한 숲속의 거대한 오크나무 아래는 엘리시아가 피땀 흘려(사실은 그냥 누워서) 찾아낸 제국 최고의 꿀잠 명당이었다.
바람은 선선하고,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렸다. 엘리시아는 품속에서 카일이 준 ‘은빛 열쇠’와 요한이 참회의 징표로 바친 ‘공명석 펜던트’를 대충 꺼내 오크나무 밑동에 던져두었다. 주머니에 넣어두면 누웠을 때 옆구리가 배기기 때문이었다.
“역시 잠은 나무 그늘 밑에서 자야 제맛이지.”
엘리시아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스스스스-.
숲의 결계 너머에서 심상치 않은 마력의 파동과 함께, 귓가를 자극하는 거친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한 명이 아니었다. 최소 세 방향에서 접근하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에 엘리시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반투명한 시스템 장부가 불길한 붉은 빛을 뿜으며 떠올랐다.
[!경고!] [주변 인물들의 ‘민폐 지수’가 급격히 상승 중입니다!] [소음 유발 구역 진입 감지!] - 황태자 카일 에르하르트 (민폐 예상도: ★★★★☆) - 마탑의 천재 렌 시벨리우스 (민폐 예상도: ★★★★★) - 성기사단장 요한 폰 로엔그린 (민폐 예상도: ★★★★☆)
[현재 일일 규정 불면 누적 버프 시스템 동작 대기 중!] [현재 누적 수치: 420 / 500] [*주의*: 누적 수치가 500에 도달하는 즉시, 대가 페널티 ‘강제 무수면 일주일’ 버프가 즉시 발동됩니다! 일주일 동안 단 일 초도 잠들 수 없습니다!]
‘미친 거 아니야?! 420?!’
엘리시아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은 조기 은퇴를 꿈꾸는 그녀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누적 수치가 500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이 소음을 차단해야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귀찮음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거대한 비용이었다.
그때, 황혼의 숲 입구 결계 장벽 앞에서 세 남자가 정면으로 마주쳤다.
“……비켜라, 하등 생물.”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마탑의 천재, 렌 시벨리우스였다. 그는 푸른빛이 감도는 마법 지팡이를 가볍게 쥐고 있었는데,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주변의 공기를 찌르르 울리고 있었다. 그의 오만한 눈동자는 눈앞의 황태자와 성기사단장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안식을 취하시는 신성한 영역이다. 마법 공식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머리로 이 결계를 넘으려 하지 마라.”
그 오만한 도발에 황태자 카일 에르하르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전신에서 황실 고유의 금빛 투기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렌 시벨리우스. 네가 마탑의 총아라 할지라도 이 선을 넘는 것은 반역이다. 이곳은 내가 엘리시아 영애에게 직접 제공한 황실의 성역이다. 황실의 허가 없이 사사로이 드나드는 네놈이야말로 당장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카일의 목소리에는 황태자로서의 가차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위엄 앞에 당당히 가로막아 선 또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철컥.
은빛 갑옷을 입은 성기사단장, 요한 폰 로엔그린이 거대한 대검을 바닥에 꽂으며 한 걸음 나아갔다. 그의 올곧은 눈동자에는 신념과 깊은 참회의 빛이 서려 있었다.
“두 분 모두 멈추십시오. 엘리시아 영애는 사교계의 더러운 음모와 소음 속에서 고통받고 계십니다. 신의 전사로서, 저는 영애의 영혼이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수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두 분의 사적인 욕심으로 영애의 안식을 방해하려 한다면, 이 검이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 신의 전사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렌이 실소하며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 잘난 신성력으로 소음이나 차단할 수 있나? 스승님의 뇌파를 안정시키는 데는 내 미니멀리즘 마법 장벽이 가장 효과적이다.”
“마탑의 마법은 너무 인위적이고 거칠다.” 카일이 검을 반쯤 뽑아 들며 으르렁거렸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황실 기사단의 철저한 물리적 경계다. 한 마리의 파리도 숲에 들여보내지 않는 완벽한 통제력이지.”
세 남자의 기싸움이 극에 달했다. 금빛 투기, 푸른 마력, 그리고 신성한 은빛 오라가 숲 입구에서 격렬하게 부딪치며 폭발적인 풍압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무기를 맞대고 한판 전쟁을 벌이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띵-!] [위험! 소음 데시벨 한계치 초과!] [불면 누적 수치 급상승: 420 -> 450 -> 480...!]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일주일 동안 눈을 부릅뜨고 밤을 지새워야 하는 대참사가 일어날 판이었다. 엘리시아는 엄습하는 불면증의 공포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서는 것을 느꼈다.
잠을 자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인간들의 주둥이를 닫아야 했다!
결국 엘리시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신경질적으로 잠꼬대를 내뱉었다.
“……아, 진짜 시끄러워 죽겠네…….”
숲속의 고요함을 깨뜨린 것은 그리 크지 않은, 오히려 나른하고 짜증 섞인 한마디였다.
“저리 꺼져요…… 좀 자게…….”
그 한마디가 바람을 타고 결계 장벽을 넘어 세 남자의 귀에 정통으로 꽂혔다.
순간, 세 사람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췄다.
“……!”
카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시끄러워 죽겠다니. 그녀가…… 나의 이 얄팍한 권력 다툼과 소란에 진저리를 치고 계시는구나. 황태자라는 자리가 주는 오만함에 눈이 멀어, 정작 그녀가 바라는 유일한 구원인 ‘평온’을 내가 짓밟고 있었다니!’
렌 역시 들고 있던 지팡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스승님께서 격노하셨다. 하등 생물들과 수준 낮은 기 싸움을 벌이느라 스승님의 고결한 수면 연구 시간을 방해하다니. 나는 마법사로서 실격이다. 아니, 생명체로서 실격이다.’
요한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성녀님께서 나를 향해 꺼지라고 하셨다…… 아니, 이것은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갈구하는 고결한 영혼의 거룩한 격노. 나의 위선적인 정의감이 정작 가장 보호받아야 할 영혼에게 상처를 주었구나.’
[띵-!] [시스템 경보 해제!] [주변 소음 수치가 급격히 하락하여 0데시벨에 수렴합니다.] [누적 수치 상승 중단: 499에서 멈춤! (세이프!)] [안도의 한숨을 쉬셔도 좋습니다.]
엘리시아는 속으로 십년감수했다는 한숨을 쉬며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결계 밖의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사색이 된 세 남자는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아주, 아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거의 들릴 듯 말 듯 한 속삭임으로 그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들었나? 영애께서 극도로 노하셨다.” 카일이 목소리를 모기 소리만큼 줄이며 속삭였다.
“당연히 들었다, 황태자. 네놈의 시끄러운 금빛 마력 때문에 스승님의 청각 세포가 파괴될 뻔하지 않았나.” 렌이 이빨을 갈며 속삭임으로 대꾸했다.
“제 탓이기도 합니다.” 요한이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우리가 이곳에서 영역 싸움을 벌이는 것 자체가 영애에게는 가장 큰 소음이자 죄악입니다. 우리는 영애의 안식을 방해하는 사탄의 소음으로부터 이 성역을 지켜야 합니다.”
세 사람은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한 가지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했다. ‘엘리시아가 잠에서 깨어 짜증을 내면 우리 모두 파멸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뿐이군.” 카일이 품속에서 황실의 상징이 새겨진 고급 가죽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마탑에서 특수 제작한 ‘소음 차단 마법 펜’이었다. 글씨를 쓸 때 사각거리는 소리조차 완벽히 흡수하는 초고가 마도구였다.
렌이 그 펜을 낚아채며 속삭였다. “내가 적지. 하등 생물의 필체는 스승님의 성역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비키십시오. 기사단의 서약서는 제가 작성하겠습니다.” 요한이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펜을 맞잡았다.
세 사람은 숲 입구에 세워진 무음 결계 칠판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숨을 죽인 채,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칠판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스슥, 스슥. (소음 차단 마법 덕분에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들이 작성한 것은 제국의 역사상 가장 기괴하고도 강력한 초법적 동맹 조약이었다.
[낮잠 수호 연합 (루나 가르디안) 당번 조약]
제1조: 본 연합의 유일무이한 목적은 엘리시아 영애의 안락하고 평화로운 ‘낮잠’을 결사 수호하는 것이다. 제2조: 영애의 수면 시간 동안 반경 50미터 이내의 소음은 철저히 0데시벨로 유지한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제국의 반역자이자 마탑의 공적, 신전의 이단으로 규정한다. 제3조: 효율적인 수호를 위해 다음과 같이 주별 보초 당번표를 지정한다. - 월/수/금: 황태자 카일 에르하르트 (황실 기사단을 동원한 외부 소음 및 물리적 접근 차단 담당) - 화/목/토: 마탑 천재 렌 시벨리우스 (음파 차단 결계 유지 및 수면 유도 마법 향료 공급 담당) - 일: 성기사단장 요한 폰 로엔그린 (안식 신성 결계 가동 및 불청객 정화 담당)
제4조: 당번 수행 중 서로에 대한 사적인 감정으로 소란을 피우는 자는 즉시 당번 자격을 박탈당하며, 영애의 ‘차가운 무관심’이라는 극형에 처한다.
세 제국의 권력자이자 천재들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조차 아끼며 칠판에 적힌 당번표를 확인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이것으로…… 합의된 거군.” 카일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의 꿀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하등 생물들과 손을 잡겠다.” 렌이 오만한 표정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성녀님의 안식을 지키는 길이라면, 그것이 곧 신의 뜻입니다.” 요한이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수호 동맹’이 결성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스락.
숲의 정적을 깨뜨리는, 아주 무례하고도 날카로운 발자국 소리가 결계 경계선 너머에서 들려왔다.
세 남자의 고개가 동시에 번개처럼 돌아갔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침입자를 향한 가차 없는 살기가 넘실거렸다.
숲 입구에 나타난 것은 비올레타 데 헤이즈였다.
사물함 폭발 소동의 여파로 온몸에 묻은 보라색 향 가루와 오물을 대충 닦아내긴 했지만, 그녀의 몰골은 여전히 처참했다. 그 굴욕적인 모습을 숨기기 위해 두꺼운 검은색 베일을 쓰고 있었지만, 베일 너머로 번뜩이는 눈빛만큼은 광기 어린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아카데미 대의회 직속 긴급 징계 사법관 세 명이 무거운 철퇴와 붉은 인장이 찍힌 체포 구속장을 들고 서 있었다.
“거기 있었구나, 엘리시아……!”
비올레타가 억눌린 목소리로 쇳소리를 내며 외쳤다. 그녀는 품속에서 황실 공인 사법 서면 교섭 체포 명령서를 치켜들었다.
“황태자 전하와 여기 계신 분들이 아무리 막아선다 해도 소용없다! 국가 중범죄 사주 혐의에 대한 대의회의 정식 체포 명령이다! 당장 저 가증스러운 범죄자를 끌어내라!”
사법관들이 무거운 철제 구속구를 절렁거리며 숲의 경계선을 향해 한 걸음 선을 넘으려 했다.
그 순간, 카일의 검 끝이, 렌의 지팡이가, 그리고 요한의 대검이 일제히 비올레타와 사법관들의 코앞을 가로막아 섰다.
세 남자의 얼굴에는 이전의 장난기나 기싸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진정한 포식자의 잔혹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조용히 하라고 했을 텐데.”
카일이 나직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황실의 절대적인 권위와 분노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카데미 전체를 흔들 사법 심문의 폭풍이 숲 입구에서 세 남주의 거대한 벽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