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의 위대함을 온 세상에 알리라!”
메아리치는 외침이 아카데미 남쪽 숲의 상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엘리시아는 텐트 입구에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바람처럼 사라지는 렌의 뒷모습은 마치 일생일대의 사명을 띤 성전사 같았다. 그가 밟고 지나간 잔디밭 위로 희끄무레한 종이 쪼가리들이 마법의 기운을 타고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종이 한 장이 미풍을 타고 엘리시아의 뺨을 툭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엘리시아는 허리를 굽히는 귀찮은 동작을 감내하며 겨우 종이를 주워 올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학문과 영혼의 위대한 구도자, 엘리시아 로렌샤 영애의 신성한 침묵교시(沈默敎示)] - 제1조: 치렁치렁한 수식과 잘난 척하는 미사여구는 영혼의 소음일 뿐이다. 본질은 오직 침묵 속에서 증명된다. - 제2조: 완벽한 고요를 방해하는 모든 자는 학문적 야만인이자 마탑의 적이다. - 제3조: 스승님의 깊은 명상(낮잠) 시간은 제국 법률보다 우선하는 절대 성역이다. 감히 그 고요를 깨부수려는 자는 8서클 마법의 불벼락을 맛보게 되리라. - 기록자: 마탑의 천재 겸 침대 가드 지망생, 렌 시벨리우스.
“……미친놈이 분명해.”
엘리시아는 종이를 구겨서 저 멀리 던져버렸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그녀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아카데미 중앙 광장 방향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웅웅거리는 벌떼의 날갯짓처럼 숲속까지 흘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망막 위로 차가운 반투명 장부가 요란하게 점멸하며 붉은 경고등을 켰다.
[띵-! 시스템 경고!] [일일 규정 불면 누적 버프 수치: 495 / 500] [※ 경고: 누적 수치가 500에 도달하는 즉시, 제약 사항 ‘강제 무수면 일주일’이 무조건 발동됩니다. 일주일 동안 단 1초도 잠들 수 없는 끔찍한 불면의 형벌을 피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추가적인 사건 개입과 소음을 차단하십시오!]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495라니. 턱밑까지 차올랐다. 단 5포인트였다. 여기서 누군가와 열띤 대화를 나누거나, 감정적인 소모를 단 한 번만 더 겪어도 그녀의 찬란한 낮잠 라이프는 일주일 동안 종말을 고하게 된다. 침대에 누워도 눈이 말똥말똥한 상태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지옥이라니,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잠을 자야 했다. 그녀의 인생 유일한 목표이자 구원은 오직 안락한 꿀잠뿐이었다.
“일단 자자. 자서 이 수치를 초기화시켜야 해…….”
엘리시아가 터덜터덜 텐트 안으로 들어가 거위털 베개에 머리를 파묻으려던 찰나였다.
쿵. 쿵. 쿵.
대지를 울리는 묵직하고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발소리가 아니었다. 고도로 단련된 기사들이 대형을 맞추어 걸어올 때만 발생하는, 철제 갑옷의 위협적인 마찰음이었다.
“엘리시아 로렌샤 영애!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소!”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텐트의 가죽 천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목소리만으로도 고막이 아려오는 성량이었다.
엘리시아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깊은 신음을 내뱉었다.
[띵-!] [돌발 이벤트 발생: 성기사단장의 신성 규율 심판] [대상: 요한 폰 로엔그린 (성기사단장)] [귀찮음 유발 지수: 900 골드] [예상 소음 수치: 데시벨 측정 불가 (폭발적)] [※ 주의: 대치 상황이 3분 이상 지속될 경우, 불면 누적 수치 즉시 돌파!]
‘아, 제발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엘리시아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텐트 밖으로 기어 나갔다.
텐트 앞 공터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이는 은백색 전신 갑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눈처럼 하얀 망토를 등 뒤로 휘날리는 사내, 성기사단장 요한 폰 로엔그린이었다.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성기사들이 삼엄한 대형을 유지한 채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요한의 수려한 얼굴은 굳은 결의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대리석 같은 이마에 핏대가 가늘게 솟아 있었다.
“그대의 오만함이 마침내 아카데미의 신성한 규율을 진흙탕에 처박았구려.”
요한이 허리춤에 찬 성검의 자루를 꽉 쥐며 차갑게 읊조렸다.
“침묵교시라니? 마탑의 천재를 꼬드겨 학우들을 협박하고, 스스로를 구도자라 칭하며 나태함을 신성한 철학으로 포장하다니. 이것은 성스러운 기사도에 대한 모독이자, 신전의 가르침을 비웃는 이교적 기만이오!”
엘리시아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사도? 이교적 기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싶었다. 그녀는 그저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하라고 펜을 던졌을 뿐이고, 렌이라는 미친놈이 제멋대로 대자보를 붙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요한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사악한 마녀를 처단할 기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 로엔그린의 이름을 걸고, 그대의 가짜 성녀 행세를 멈추게 하겠소.”
요한이 챙강, 소리를 내며 성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오라가 숲속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나와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오! 그대의 가당치 않은 방조론이 진짜 깨달음인지, 아니면 나태한 악마의 속삭임인지 내 검으로 직접 증명해 보이겠소!”
성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결투를 받아라! 규율을 수호하라!”
숲이 떠나가라 울리는 함성에 엘리시아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머릿속의 장부가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려댔다.
[위기! 불면 누적 수치: 498 / 500] [남은 시간: 30초! 결투에 응하거나 말싸움을 지속할 경우 즉시 무수면 버프 발동!]
‘일주일 동안 못 자면 난 죽어. 진짜로 죽는다고.’
엘리시아의 머릿속은 오직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봐야 하는 끔찍한 형벌에서 벗어나는 법뿐이었다. 결투를 받아주는 순간 칼싸움 소리와 기합 소리로 숲은 난장판이 될 것이고, 수치는 폭발할 터였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정적이었다. 0데시벨의 완벽한 고요.
요한은 검을 치켜들고 엘리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눈에는 한 치의 타협도 없는 고결한 정의감이 서려 있었다.
“왜 말이 없소? 내 검이 두려운 건가? 아니면 그 잘난 침묵의 뒤에 숨은 나태함이 마침내 밑천을 드러낸 것인가!”
요한의 매서운 다그침이 이어졌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귀에는 그 모든 소리가 그저 아득한 소음으로만 들렸다. 극도의 졸음과 불면증에 대한 공포가 겹치며 그녀의 뇌세포들이 가동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품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반쯤 졸도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 만사가 귀찮았고, 이 모든 상황이 그저 흘러가기만을 바랐다.
“하아…….”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아주 길고 나른한, 그리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졸음이 가득 차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요한이라는 존재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모든 소란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극단적인 방관의 빛만이 서려 있었다.
엘리시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귀찮아서 미치겠다는 듯 자장가를 부르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귀찮게…… 왜 그래요.”
“뭐라 했소?”
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엘리시아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처럼, 혹은 세상의 모든 덧없는 투쟁을 가엽게 여기는 성자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 왜 다들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인 건지……. 다들 알아서 살게 둬요. 시끄럽게 굴지 말고…….”
말을 마친 엘리시아는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다는 듯, 텐트 앞 나무 그루터기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거부하겠다는, 완벽한 묵언의 자세였다.
고요가 찾아왔다.
숲속의 바람 소리만이 사락사락 들려오는 정적 속에서, 요한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
요한의 머릿속에서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거대한 종소리가 되어 메아리쳤다.
‘왜 다들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인 건지…….’
그 한마디가 요한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가시를 정확히 찔렀다.
요한은 스스로를 가혹하게 채찍질해 온 사내였다. 신전의 부패와 사교계의 더러운 암투를 보면서도, 성기사단장이라는 직위와 책임감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매일 밤 죄책감으로 고문했다. 정의를 수호하겠다는 명목하에 매 순간 검을 뽑아 들고 세상을 바꾸려 버둥거렸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무력감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소녀는 너무나도 담담하게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니…….’
요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성검을 쥐고 있던 손귀에 힘이 빠졌다.
그녀의 눈빛은 분노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맹목적인 규율에 갇혀 칼을 휘두르는 가엾은 죄인을 바라보는 깊고 고요한 연민의 눈빛이었다.
검을 뽑아 들고 결투를 신청하며 스스로의 정의로움을 뽐내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얄팍하고 오만했는지, 요한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신조차 품지 못한 인간적 연약함을, 그녀는 그저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한마디로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
요한의 입술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스스로를 얽어매던 가혹한 사슬이 단 한마디의 묵언에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것인가.”
요한이 스르륵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은백색 갑옷이 바닥의 흙더미에 닿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성기사들은 단장의 난데없는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수군거렸다.
“단장님? 왜 그러십니까!”
“조용히 하라!”
요한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큰 목소리가 엘리시아의 정적을 깨뜨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극도의 송구함이 서린 눈빛으로 그루터기에 머리를 묻고 있는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엘리시아 영애. 제 교만이 눈을 가려, 당신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파란빛이 감도는 보석 펜던트를 꺼냈다. 신전의 비보이자, 무제한으로 주변의 음성을 녹음하고 신성한 방어막을 형성하는 성물 마도구 ‘공명석 펜던트’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펜던트를 엘리시아가 앉아 있는 그루터기 아래, 마치 신단에 제물을 바치듯 겸허하게 밀어 넣었다.
“이것은 제 참회의 징표입니다. 이 공명석은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오직 진실한 목소리만을 담는 성물입니다. 당신의 고요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 펜던트가 그들의 사악한 소음을 막아줄 것입니다.”
엘리시아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띵-!] [위기 극복 성공!] [상대방의 극단적 감화로 인해 돌발 이벤트가 조기 종결되었습니다.] [불면 누적 수치: 495 -> 100 (대폭 감소!)] [보상: 성기사단장의 경외 및 성물 ‘공명석 펜던트’ 획득!]
‘살았다! 드디어 잘 수 있어!’
엘리시아는 당장이라도 만세를 부르고 싶었지만, 지금 움직였다가는 요한이 또 무슨 거창한 착각을 할지 몰라 철저히 묵언을 유지하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은 잠에 빠진 척 고르게 숨을 쉴 뿐이었다.
요한은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경외심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모욕하고 결투를 신청한 나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침묵으로 용서하시다니…….’
이 얼마나 숭고하고 자비로운 성녀인가.
요한은 바닥에 꽂아두었던 성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그의 눈빛은 이전의 맹목적인 분노가 아닌, 무언가 거룩한 사명을 띤 기사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시아의 텐트를 등지고 섰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성기사들을 매서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들으라, 로엔그린의 기사들이여.”
요한이 나직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오늘부로 엘리시아 영애의 안식을 방해하는 모든 소음은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대죄로 규정한다.”
“예, 예? 단장님, 그게 무슨……?”
“감히 이 성소에서 목소리를 높이거나, 사악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다면…….”
요한이 성검을 바닥에 묵직하게 내리꽂았다. 검끝이 돌바닥을 뚫고 들어가며 차가운 쇠소리를 냈다.
“내 검이 그들의 혀를 침묵의 이름으로 벨 것이다.”
그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 섞인 맹세의 기운이 온 숲을 엄숙하게 뒤덮었다.
그루터기에 머리를 묻고 있던 엘리시아는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을 억누르며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니, 벨 것까지는 없잖아요……. 그냥 집에 가라니까, 이 미친 기사놈아…….’
그러나 이미 기사단장의 눈에는 광적인 신념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또 하나의 거대한 착각의 괴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