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크르르르르.

목구멍 깊은 곳에서 긁혀 나오는 탁한 파동이 귓전을 때렸다. 콧수염처럼 길게 뻗은 바실리스크의 독니에서 떨어진 보랏빛 침방울이 침대 옆 카펫을 치이익 소리와 함께 녹여 들어갔다.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에 눈이 매웠다.

엘리시아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눈앞의 시뻘건 안광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침대 머리맡까지 뱀 같은 주둥이를 들이밀며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귀찮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고작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리는 데만도 세 칸의 행동 에너지가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한숨이 콧구멍을 타고 무겁게 흘러나왔다.

“아, 진짜…… 꺼져요.”

엘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을 쥐었다. 카일이 기사단을 시켜 특별히 공수해다 준 최고급 거위털 베개였다.

그녀는 누운 자세 그대로, 팔꿈치만 살짝 들어 올려 베개를 냅다 던졌다. 정확히는 귀찮음을 가득 담아 옆으로 툭 밀쳐낸 것에 가까웠다.

퍽.

폭신한 베개가 바실리스크의 단단한 콧등을 가볍게 때렸다.

그 찰나, 엘리시아의 목에 걸려 있던 은빛 열쇠가 공명하듯 차가운 빛을 뿜었다. 숲 전체를 감싸고 있던 카일의 기사단 결계가 베개의 깃털 하나하나에 깃든 마력과 맞물려 기묘한 궤적을 그렸다.

치이이이익-!

쿠르릉거리는 천둥소리 대신, 바람 빠지는 소리가 고요한 텐트 안을 채웠다. 바실리스크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붉은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마수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커다란 덩치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혓바닥을 길게 빼 물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했다. 마치 주인의 발치에 누운 시골집 마당개처럼, 녀석은 엘리시아의 침대 끝자락에 턱을 괴고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

엘리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베개 한 장으로 고대 마수가 가축화되는 광경은 그녀의 계산서에도 없던 일이었다.

서둘러 안대를 다시 쓰고 눈을 감으려던 그때, 텐트 입구의 천막이 거칠게 펄럭이며 젖혀졌다.

“대체 이게 무슨 미개한 마력 조화란 말인가!”

귓청을 찢는 하이톤의 목소리가 텐트 안의 고요를 산산조각 냈다.

푸른색 마법사 로브를 대충 걸친 청년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난입했다. 사방으로 뻗친 은발과 오만한 눈빛. 양손에는 기괴한 마법 스크롤을 한 움큼 쥐고 있는 사내, 마탑의 천재라 불리는 렌 시벨리우스였다.

렌은 침대 밑에 얌전히 누워 있는 바실리스크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엘리시아를 번갈아 보며 제자리에서 껑충 뛰었다.

“방금 그 결계 반응은 뭐지? 고대 마수의 뇌파를 완벽히 교란해 가축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정신 간섭계 마법인가? 아니, 마법 공식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어! 그저 베개를 던졌을 뿐이잖아! 하등한 미생물 수준의 물리력으로 마수의 신경망을 차단했다고? 설명해라, 당장!”

엘리시아는 안대를 쓴 채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손해다. 대답을 하는 순간 저 시끄러운 마법사의 주둥이는 두 배 속도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시스템 경보: 돌발 인물 '렌 시벨리우스'의 소음 수치 72데시벨 돌입.] [주변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 지수 급상승!] [일일 규정 불면 누적 버프 작동 대기 중: 현재 누적치 420/500]

반투명한 장부가 공중에 떠올라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였다.

‘미치겠네. 500 넘으면 일주일 동안 진짜 한숨도 못 자는데.’

엘리시아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불면증 버프의 무서움은 이미 겪어봐서 안다. 머리는 깨질 것 같은데 정신은 강제로 또렷해지는 그 지옥 같은 일주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이봐! 듣고 있는 건가, 엘리시아 로렌샤! 황태자가 이 구석진 숲을 봉쇄했기에 뭔가 대단한 마법 실험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고작 침대 위에서 뒹굴며 마수를 애완동물로 길들이고 있었다니! 내 학구열을 모독하지 마라!”

렌은 손가락을 튕기며 허공에 거대한 마법 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는 푸른빛 공중 문자들. 그것들이 회전할 때마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텐트 안을 가득 메웠다.

위이이이잉-!

“시끄러워…….”

엘리시아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흥분한 마탑의 천재에게는 닿지 않았다.

“이것 보라고! 내가 3년 동안 연구 중인 ‘공간 압축 및 차원 제어 공식’의 제4변수다! 방금 네가 보여준 그 기묘한 물리적 간섭이라면, 이 공식의 꼬여버린 마력 흐름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몰라! 자, 봐라! 이 위대한 마법의 정수를!”

[경보: 렌 시벨리우스의 마법 전개 소음 85데시벨 돌입!] [일일 규정 불면 누적치 급증: 450…… 470…… 480!] [위험! 누적치 480 돌파! 임계치까지 단 20 남았습니다!]

눈앞에서 빨간색 숫자가 미친 듯이 올라갔다.

480.

저 시끄러운 마법사가 기합 한 번만 더 넣으면 500을 찍고 엘리시아의 평온한 일주일은 날아간다.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살기마저 뿜어내는 눈빛으로 옆 협탁을 더듬었다. 깃털 펜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아카데미 교수들이 사용하는, 심장부에 마력이 미세하게 흐르는 고대 마도 펜이었다.

“그 입, 제발…….”

엘리시아는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조준조차 하지 않은 채, 귀찮음과 분노를 담아 손에 쥔 마도 펜을 렌의 얼굴을 향해 휙 던졌다.

“닥치라고요.”

스윽.

펜은 렌의 코끝을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가 허공에 띄워놓았던, 수천 개의 푸른색 마법 수식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마법 진형의 정중앙에 꽂혔다.

정확히는, 마법 진형의 한가운데에서 불안정하게 회전하고 있던 ‘제4변수’의 교차점에 마도 펜의 뾰족한 끝이 박혔다.

콰아아앙-!

요란한 폭발음 대신, 잉크가 번지듯 검푸른 마력이 펜 끝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소음을 내뿜던 푸른빛 수식들이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그리고 마도 펜의 몸통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마력이, 꼬여 있던 공식의 연결 고리를 부드럽게 관통하며 재정렬하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텐트 안을 가득 채웠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사방을 진동시키던 마력의 불협화음이 완벽한 무음으로 전환되었다.

[상황 해제: 주변 소음 수치 0데시벨로 급감.] [일일 규정 불면 누적치 삭감: 480 -> 0] [최적의 방관 루트 성공. 귀찮음 비용이 대폭 절감되었습니다.]

장부의 붉은 경고등이 초록색 안심 불빛으로 바뀌며 서서히 사라졌다.

엘리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 살았다…….”

이제 진짜 잘 수 있다. 바람직한 침묵이다.

그러나 텐트 안의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렌 시벨리우스의 영혼이 가출한 듯한 표정 때문에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렌은 허공에 멈춰 선 자신의 마법 진형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중에 꽂힌 마도 펜의 끝에서 흘러나온 잉크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며 수식의 빈틈을 채우고 있었다.

“이…… 이건…….”

렌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안경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차원 압축의 난제…… 제4변수의 마력 역류 현상을…… 단 한 점의 마력 고정핀으로 해결했다고……?”

그는 비틀거리며 마법 진형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3년 동안 마탑의 골방에 처박혀 피를 토하며 연구해도 풀리지 않던 공식이었다. 마력이 얽히고설켜 폭발하기 일쑤였던 그 악마 같은 수식이, 지금 고작 싸구려 마도 펜 하나가 꽂힘으로써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잉크의 흐름은 마치 대자연의 순리를 그대로 받아 적은 듯 우아하고 간결했다. 치렁치렁하던 쓸데없는 변수들이 전부 펜 끝의 무게감에 눌려 소멸해 버린 것이다.

“미니멀리즘 마법 제어…….”

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공식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본질을 보지 못할 때, 당신은…… 단 한 번의 투척으로 가장 군더더기 없는 해답을 제시한 건가?”

그는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웅크려 누워, 귀찮다는 듯 안대를 고쳐 쓰고 있는 영애. 그녀는 이 위대한 발견 앞에서도 하품을 쩍 하고 있었다.

어떠한 흥분도, 어떠한 오만도 없다. 그저 당연한 진리를 당연하게 행했을 뿐이라는 듯한 저 초연한 태도.

쿵.

렌은 무릎을 꿇었다. 마탑의 천재이자 차기 마탑주로 촉망받는 사내가, 일개 영애의 침대 밑바닥에 이마를 댈 기세로 허리를 굽혔다.

“스승님.”

침대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엘리시아의 발가락이 굳었다.

“……네?”

엘리시아가 안대를 슬쩍 올렸다. 귀찮음보다 황당함이 앞선 눈빛이었다.

“방금 뭐라고요?”

“제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스승님!”

렌이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 톤이 다시 올라가려 하자, 엘리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렌은 깜짝 놀라며 급히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가, 아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소음을 싫어하셨지……. 죄송합니다. 스승님의 고요한 명상을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공식은…… 제 인생의 구원입니다. 3년 동안 저를 괴롭히던 학문적 지옥에서 저를 끄집어내 주셨습니다.”

“아니, 저는 그냥 시끄러워서 던진 건데요.”

“알고 있습니다! 말로 설명해 주시는 것조차 시간 낭비라 여기시고, 직접 행동으로 깨달음을 주신 깊은 뜻을 어찌 제가 모르겠습니까! ‘치렁치렁한 수식은 집어치우고 본질에 집중하라’는 스승님의 채찍질, 뼛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엘리시아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 인간도 카일 못지않은 중증 착각 환자였다. 왜 이 아카데미의 천재들은 하나같이 남이 던진 쓰레기에서 인생의 진리를 찾는단 말인가.

“스승님,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스승님의 연구 조수로서, 아니, 이 침대 밑을 지키는 하수인으로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스승님이 영지로 내려가신다면 저 또한 마탑을 버리고 따라가겠습니다!”

렌이 바실리스크의 옆에 나란히 엎드리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바실리스크조차 렌이 동료인 줄 알았는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비벼댔다. 은발의 마탑 천재와 고대 마수가 엘리시아의 침대 밑에서 나란히 엎드려 있는 광경은 가히 엽기적이었다.

“하아…….”

엘리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마음대로 해요. 제발 조용히만 해줘요…….”

“감격스럽습니다, 스승님! 이 기쁜 소식을 당장 아카데미 전체에 알려야겠군요!”

렌이 벌떡 일어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광적인 존경심이 서려 있었다.

“학문과 영혼의 위대한 구도자, 엘리시아 로렌샤 영애의 신성한 가르침을 대자보로 작성해 광장에 붙이겠습니다! 감히 스승님의 고요를 방해하는 자들은 제 마법으로 전부 침묵시키겠습니다!”

“잠깐, 뭐라고요? 대자보라니, 야, 이 미친놈아-!”

엘리시아가 이불을 걷어차며 소리쳤지만, 렌은 이미 감격의 눈물을 흩뿌리며 바람처럼 텐트 밖으로 뛰어나간 뒤였다.

멀리서 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의 위대함을 온 세상에 알리라!”

텐트 안에는 꼬리를 살랑거리는 바실리스크와, 굳어버린 엘리시아만이 남았다.

머릿속에서 장부가 다시 한번 요란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관계 변화와 함께, 상상조차 하기 싫은 거대한 귀찮음의 파도가 저 멀리서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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