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열릴 사교제의 모든 파트너를…… 내게 허락해 주겠나?”
카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정원의 고요한 공기를 흔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금박 초대장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였다. 제국 최고의 장인이 마법 은실로 봉인했다는, 황실 주관 대사교제의 파트너십 초대장.
그것은 단순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다. 황태자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차기 황태자비 후보로서의 공식 자격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무거운 족쇄나 다름없었다.
눈을 감고 있던 엘리시아의 한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속눈썹 아래로 비쳐 드는 금빛 광채가 짜증스러울 정도로 찬란했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 황태자가.’
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확 치솟았다. 사교제 파트너? 그 시끄럽고 가식적인 귀족 놈들이 떼거지로 모여서 서로를 헐뜯고 가짜 미소를 흘리는 파티를 나보고 다 참석하라고? 드레스 피팅만 대여섯 시간은 걸릴 것이고, 구두 굽에 발가락이 짓눌린 채 온종일 가짜 웃음을 지어야 할 터였다. 그것은 엘리시아가 꿈꾸는 ‘안락한 꿀잠과 평화로운 은퇴’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대재앙이었다.
그때, 그녀의 닫힌 시야 너머로 익숙한 반투명 장부가 미친 듯이 붉은 경고등을 뿜어내며 뇌리를 때렸다.
[초비상! 황태자의 파트너십 제안 수락 시 귀찮음 비용 99,999 발생!] - 수락할 시: 매주 사교 댄스 연습 10시간, 드레스 피팅 5회, 황실 예법 교육 강제 추가. 낮잠 시간 일 평균 7시간 감소. - 거절할 시: 카일의 거대한 상실감으로 인한 집착 지수 폭등! 즉시 [강제 불면증 페널티] 작동!
[현재 누적 불면 위험 수치: 420 / 500] ※ 경고: 누적 수치 500 도달 시, 일주일 동안 단 일 초도 잠들지 못하는 '강제 무수면 지옥' 버프가 강제 활성화됩니다.
‘420이라고?’
엘리시아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수치가 턱밑까지 차올랐다. 여기서 거절을 냅다 질러서 카일의 집착을 자극했다가는 오늘 밤부터 눈꺼풀에 투명 테이프를 붙여놓은 채 밤새 천장만 바라봐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고 수락하자니 사교계라는 지옥 구덩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었다.
이것은 완벽한 외통수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카일은 대답이 없는 엘리시아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은빛 눈동자에는 긴장감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나올 한마디를 애타게 기다리는 갈망이 서려 있었다. 황태자라는 고고한 지위도 잊은 채, 그는 그저 한 명의 간절한 구원 요청자처럼 그녀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 있던 편안한 자세에서 벗어나, 슬그머니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아주 깊고, 세상의 모든 고뇌를 짊어진 듯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바람 빠지는 소리가 정원에 낮게 깔렸다. 말하기가 너무나도 귀찮고, 이 상황 자체가 끔찍하게 싫다는 영혼의 단발마였다. 사실상 대답을 회피하고 시간을 벌기 위한 꼼수였다.
하지만 카일의 눈에는 그 한숨이 전혀 다르게 비쳤다.
그녀의 깊은 한숨은 세속의 화려한 제안에 귀를 더롭히고 싶지 않다는 성녀의 고결한 탄식으로 치환되었다. 카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
카일이 나지막이 탄성을 질렀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초대장을 쥐고 있던 힘을 풀었다.
“내가…… 내가 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군. 그대의 그 맑고 은은한 침묵에, 사교계라는 더러운 소음과 황실이라는 무거운 족쇄를 들이밀다니. 그 화려한 은실 봉투조차 그대의 눈에는 한낱 시끄러운 먼지에 불과했을 터인데.”
‘아니, 그냥 봉투가 햇빛에 반사돼서 눈이 부셨을 뿐인데.’
엘리시아는 속마음을 꾹 삼켰다. 해명하는 것조차 에너지가 드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카일을 바라보았고, 그 침묵은 카일에게 더 깊은 깨달음으로 다가갔다.
“미안하다, 엘리시아. 그대의 평온은 그 자체로 온전해야 하거늘, 내가 감히 내 욕심으로 그대를 옭아매려 했다. 그대의 침묵이야말로 진정한 대답이었음을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어.”
카일은 스스로 납득하며 초대장을 품 안으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의 얼굴에는 자책과 함께, 자신을 세속의 탐욕에서 건져 올려 준 엘리시아를 향한 무한한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시스템 알림: 임시 회피 전략 성공!] - 카일의 집착 지수가 일시적으로 '존경과 경외'로 변환되어 대기 상태로 진입합니다. - 단, 황태자의 반경 50m 이내에 머무를 시, 매 10분마다 '사교제 관련 돌발 질문'이 강제 발동할 확률 98%. - 현재 누적 불면 위험 수치: 420/500 (현상 유지)
[장부의 권장 지침: 즉시 물리적 거리를 3km 이상 확보하십시오. 추천 대피소: 아카데미 남쪽 끝 '황혼의 숲'. 예상 귀찮음 소모 비용: 0 gold.]
‘황혼의 숲?’
아카데미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고대 결계가 흐르는 금단의 구역이자 폐허로 알려진 곳이었다. 인적이 아예 끊긴 곳이라 소음 지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은신처.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자락에 묻은 풀잎을 대충 털어내며, 그녀는 카일을 향해 말끝을 흐렸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어디로 가는지 물어도 되겠나? 혹시 내가 또 무례를 범해 자리를 피하는 것이라면…….”
“아니요. 그냥…… 조용한 곳이요.”
엘리시아는 걸음을 옮겼다. 카일은 차마 그녀를 붙잡지 못하고, 그 고고한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이미 그녀의 ‘조용한 곳’이라는 단어가 심오한 철학적 화두로 자리 잡고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엘리시아는 신속하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평소의 흐느적거리던 모습은 간데없고, 오직 숙면을 사수하겠다는 생존 본능만이 그녀를 움직였다.
그녀가 챙긴 짐은 단출했다. 가문에서 가져온 최고급 극세사 침낭, 암막 안대, 그리고 약간의 비상식량. 드레스나 장신구 따위는 가방 구석에도 끼지 못했다.
“완벽해.”
가방을 어깨에 멘 엘리시아는 아카데미의 시끌벅적한 본관을 비껴가며 남쪽으로 향했다. 학생들이 모여 있는 정원과 강의동을 지나칠 때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어머, 저기 봐. 엘리시아 영애야.”
“황태자 전하를 굴복시켰다는 그 침묵의 성녀…….”
“가까이 가지 마. 영애님의 고요한 명상을 방해했다간 황태자 전하의 기사단에게 끌려갈지도 몰라.”
소문은 이미 겉잡을 수 없이 퍼져 있었다. 덕분에 엘리시아의 주변 반경 5미터 안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접근율 0%. 귀찮은 인간들이 알아서 떨어져 나가 주니 이것 또한 장부의 비용 절감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카데미 남쪽 경계를 넘어서자, 울창한 고목들이 하늘을 가려 낮임에도 어두컴컴한 기운이 감도는 ‘황혼의 숲’ 입구가 나타났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를 흔들었고, 바닥에는 이끼 낀 돌 표지판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경고: 고대 마수 결계 구역. 접근 시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음. - 라피스 황실 기사단장]
보통의 영애라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 흉흉한 표지판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표지판을 밟고 지나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목숨이 대수냐. 잠이 대수지.’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자, 거대한 바위가 둥글게 솟아올라 자연스러운 그늘을 만들어낸 명당이 보였다. 바람막이가 되어줄 바위 벽과 햇빛을 적당히 차단해 주는 울창한 잎사귀들. 완벽한 은신처였다.
엘리시아가 바위그늘 아래 멈춰 서자, 눈앞에 장부의 녹색 자막이 기분 좋게 떠올랐다.
[지역 탐색 완료: '황혼의 숲' 바위그늘] - 소음 지수: 0 dB (완벽한 무소음) - 주변 귀찮음 유발자 존재 확률: 0.1% - 예상 귀찮음 비용: 0 gold [판정: 비용 0원의 완벽한 성역 지대입니다. 최적의 낮잠 명당으로 인증합니다.]
“역시 장부 녀석, 쓸모가 있어.”
엘리시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서 극세사 침낭을 꺼냈다. 흙바닥의 한기를 막아줄 도톰한 패드를 깔고, 그 위에 침낭을 넓게 펼쳤다. 피톤치드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숲속의 공기는 아카데미의 퀴퀴한 도서관 먼지보다 훨씬 쾌적했다.
침낭 속으로 쏙 들어가 누운 엘리시아는 암막 안대를 이마에 걸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고요한 천국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바스락, 바스락.
숲속의 고요를 깨부수는 불길한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것도 아주 무겁고, 아주 조직적인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철커덕, 철커덕!
‘아, 제발 좀…….’
엘리시아는 침낭 속에서 미라처럼 굳어 눈만 뜬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안대를 내리려던 순간, 바위그늘 너머로 은빛 갑옷을 입은 무리가 숲의 어둠을 가르며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 수가 어림잡아 백 명은 되어 보였다. 황실 근위대의 정예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갖추며 숲을 포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사단의 한가운데에서, 잔뜩 상기되고 초조한 얼굴의 황태자 카일이 걸어 나왔다.
“엘리시아 영애!”
카일의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그는 흙바닥에 침낭 하나만 달랑 깐 채 누워 있는 엘리시아를 발견하자마자,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 이 인간은 네비게이션이라도 달고 다니나?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엘리시아는 속으로 이를 부득 갈았다. 장부를 확인하니 기가 막힌 메시지가 떠 있었다.
[돌발 상황! 카일의 집착 지수 보류 상태 해제. '성녀 보호 본능' 대폭발!] - 주변 소음도 급증. - 단, 카일의 행동으로 인한 귀찮음 비용은 황실 자본으로 대체 청구되어 0 gold로 수렴합니다.
카일은 침낭 속에 누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엘리시아를 향해 다급히 다가왔다. 그의 은빛 눈동자에는 눈물겨운 참회와 감격이 뒤섞여 있었다.
“결국…… 결국 이런 오지까지 도망쳐 온 것인가? 나의 가벼운 갈망이 그대에게 이토록 큰 짐이 되어, 이 추운 금단의 숲으로 그대를 내몰았단 말인가!”
“저기, 전하. 저는 그냥 자려고 오 거라서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카일이 단호하게 은빛 손갑옷을 쥔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그대는 언제나 행동으로 진리를 보여주는 이. 세속의 시끄러운 정치와 사교제의 위선을 피해, 이 험난한 고행의 길을 택한 것이겠지. 스스로를 고립시켜 영혼을 정화하려는 그대의 뜻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진짜 모르는 것 같은데요.’
엘리시아는 대꾸할 기운도 없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굳게 다문 입술은 카일에게 ‘긍정의 침묵’으로 완벽하게 오독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숭고한 고행이라 할지라도, 이 차가운 맨땅과 매서운 숲바람 속에서 그대를 방치할 수는 없다! 내 비록 그대의 침묵을 방해하려 온 것은 아니나, 최소한의 안식처는 마련해 주어야 황태자로서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카일이 뒤를 돌아보며 기사단을 향해 호령했다.
“당장 황실 고유의 ‘아우렐리아 마법 천막’을 전개해라! 온열 마법석을 십 리 밖까지 촘촘히 박고,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도록 삼중 바람막이 결계를 쳐라!”
“예, 전하!”
백 명의 기사단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의 손에는 아카데미 소형 마법진 전개용 도구들이 들려 있었다. 기사들은 엘리시아가 누워 있는 바위그늘 주변을 에워싸고 정교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응!
순식간에 숲 한가운데에 최고급 순백색 실크와 마법 은실로 장식된 웅장한 마법 텐트가 솟아올랐다. 단순한 텐트가 아니었다. 내부에는 마법 온열 장치가 가동되어 봄날처럼 따스한 공기가 감돌았고, 바닥에는 삼중 레이어로 구성된 푹신한 거위털 침대와 최고급 카펫이 깔렸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사들은 숲의 바람 소리마저 차단하기 위해 방음 결계석을 텐트 주변에 꼼꼼히 배치했다.
“낙엽 소리 하나도 영애님의 귀에 흘러들지 않게 하라! 숲의 바람도 방향을 바꾸게 결계를 조정해라!”
기사단장의 외침에 엘리시아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와…… 황실 자본주의 최고네.’
처음에는 짜증이 솟구쳤으나, 완성된 마법 텐트의 아늑함과 거위털 침대의 두께를 보니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솔직히 말해서 가문에서 가져온 침낭보다 백 배는 더 푹신해 보였다.
카일은 텐트 설치가 끝나자,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는 정교한 은빛 열쇠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황실의 고유 문양이 아주 세밀하게 각인된, 묵직한 금속성을 지닌 열쇠였다.
“이것은 황실 고유 특별 면책용 ‘은빛 열쇠’다.”
카일이 엘리시아의 침대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그 손바닥 위에 차가운 은빛 열쇠를 올려놓았다.
“이 열쇠가 걸린 구역은 아카데미의 그 어떤 사법관도, 경비대도 함부로 수색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 황태자인 나의 명의로 보장하는 절대 사법외 구역이지. 즉, 이 황혼의 숲은 이제 오롯이 그대만을 위한 절대 성역이다.”
엘리시아는 얼떨결에 은빛 열쇠를 손에 쥐었다. 차가운 금속 촉감이 손바닥을 자극했다.
[아이템 획득: 황실 면책의 '은빛 열쇠' (검사 거부권)] - 효과: 사법권 및 검사 거부권 100%. 어떤 귀찮은 인물도 이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음. - 복선 해제 준비: 이 열쇠는 추후 거대한 위기에서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시스템 메시지: 최적의 방관 성역 '황혼의 숲' 일차 결계 설치 완료!] - 귀찮음 방어율 +200% 상승! - 소음 차단율 100% 달성!
엘리시아는 마지못해 열쇠를 주머니 깊숙이 욱여넣었다. 귀찮은 황태자가 제 발로 찾아와 완벽한 방음 텐트를 쳐주고, 황실 면책 특권이 담긴 열쇠까지 쥐여주다니. 이 귀찮은 소동의 대가치고는 과분할 정도의 이득이었다.
그녀는 침대 속으로 몸을 묻으며,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그 짧고 성의 없는 한마디에, 카일의 얼굴이 봄날의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감격으로 젖어 들었다.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대의 안식을 위해, 내 기사단 백 명을 숲 외곽에 상시 배치해 소음을 원천 차단하겠다. 그 누구도 그대의 고요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카일은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텐트 문을 닫고 물러났다.
스으으으…….
텐트 문이 닫히자, 외부의 모든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완벽한 고요. 따스한 온기. 거위털 침대의 안락함. 엘리시아는 대만족의 한숨을 내쉬며 안대를 눈 위로 끌어 내렸다.
“아, 드디어 잔다. 이제 진짜 내 세상이야…….”
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 준비를 마쳤다.
스르륵, 사각.
정적만이 감돌아야 할 텐트 안에서, 기이한 마찰음이 아주 미세하게 울려 퍼졌다.
사각, 사각, 슥…….
흙바닥과 마법 천막의 경계선 틈새, 텐트 구석의 어두운 바위그늘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따스했던 텐트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벽난로 역할을 하던 마법석의 붉은 불빛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사방으로 흔들렸다.
엘리시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이마 위로 안대를 슬쩍 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텐트 구석,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바위 틈새에서 시뻘건 침을 뚝뚝 흘리는 거대한 파충류의 아가리가 기어나오고 있는 것을.
크르르르…….
지독한 유황 냄새와 함께 텐트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백 명의 기사단과 이중 결계마저 감지하지 못한, 황혼의 숲 깊은 지하 통로를 통해 기어 올라온 고대 마수였다.
시뻘건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며, 정확히 엘리시아의 침대를 향해 고정되었다. 마수의 벌어진 입 사이로 뚝뚝 떨어진 침이 카펫을 스치자, 치이익 소리와 함께 카펫이 녹아내렸다.
[위기 발생! 고대 마수 '바실리스크' 조우!] - 현재 무방비 상태. 귀찮음 지수 측정 불가. - 숲의 절대 성역 이면에 존재하는 파멸의 포식자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엘리시아는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생각했다.
‘아니, 진짜 나한테 왜 이래?’
그녀의 평화로운 낮잠이 시작되기도 전에, 거대한 파멸의 아가리가 그녀의 코앞에서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