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대답해라, 엘리시아.”

카일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대강당의 차가운 바닥을 쓸었다. 검날 끝에 응축된 푸른 마력의 서리가 엘리시아의 속눈썹 바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뒤로 물러선다면, 그대로 이마가 꿰뚫릴 것만 같은 치명적인 거리였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진공 상태가 된 것처럼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숨을 죽인 학우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몇몇 교사들은 이미 뒷목을 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황태자가 입학식 한복판에서 검을 뽑아 들다니, 내일 자 제국 신문 1면을 장식하고도 남을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머릿속은 전혀 다른 의미로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최후 경고! 대상의 폭주 임박!] - 현재 상태에서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거나 비명을 지를 시: ‘약점 노출’로 판단되어 카일의 집착 지수 300% 폭등! 즉시 [강제 불면증 페널티] 발동! -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지: 절대적인 방관 유지. 검날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말 것.

‘미친 장부 놈아, 눈앞에 칼날이 와 있는데 눈을 깜짝하지 말라니.’

엘리시아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몸은 본능적으로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죽음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하루에 최소 열두 시간은 자야 세포가 재생되는 체질이거늘, 무수면 일주일이라니. 상상만 해도 눈 밑이 거뭇해지고 뼈마디가 쑤시는 기분이었다.

‘그래, 차라리 여기서 목이 날아가는 게 나아. 잠을 못 자고 피폐해지느니 깨끗하게 가자.’

진심 어린 귀찮음과 절대적인 수면욕이 빚어낸 기괴한 광기가 그녀의 영혼을 잠식했다.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어둡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천천히 입안에 머금고 있던 껌을 질겅, 씹었다.

스르릉.

카일이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기백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끝까지 그 가증스러운 침묵으로 일관하겠다는 뜻인가?”

“…….”

엘리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것조차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녀는 그저 멍한 눈으로 서늘하게 빛나는 검날을 바라보았다. 은빛 검신에 졸린 눈을 한 자신의 멍청한 얼굴이 비쳐 보였다. 참으로 볼품없는 몰골이었다. 어서 이 영양가 없는 대치가 끝나고 침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콰아앙-!

황태자의 검이 먼지를 가르며 매섭게 내질러졌다. 그러나 검날이 향한 곳은 엘리시아의 목덜미가 아니었다. 그녀의 귀 바로 옆, 대강당의 웅장한 목조 기둥에 은빛 보검 ‘아스트레이’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깊숙이 처박혔다.

쩌적, 쩌적.

단단한 미스릴 기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며 대리석 가루가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기둥에 박힌 검날이 부르르 떨리며 맑은 공명음을 냈다. 엘리시아의 붉은 머리카락 몇 올이 검풍에 날려 허공을 맴돌다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꺄아악!”

“미친, 진짜로 찌른 줄 알았잖아!”

뒤늦게 터져 나온 학생들의 비명 소리가 대강당 천장을 때렸다. 교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황실 시종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카일의 눈치만 살폈다.

정작 폭풍의 핵에 서 있는 엘리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 뺨 옆에 박힌 검날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둥실 떠오른 반투명한 장부를 확인했다.

[행동 비용 매니저 장부 경고 해제] - 현재 움직임 비용: 0 - 추가 귀찮음 수치: 0 - 페널티 대기 상태: 해제됨.

‘휴, 살았다.’

일주일 밤샘이라는 끔찍한 형벌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전신을 감쌌다. 긴장이 풀리자 참을 수 없는 나른함이 밀려왔다.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깊은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녀의 입술 사이로 민트 향이 섞인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가운 검날에 하얗게 김이 서렸다가 이내 스르륵 사라졌다.

카일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을 쥔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제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천재 검사였다. 그가 전력으로 뿜어낸 살기와 기백은 베테랑 기사들조차 무릎 꿇리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귀족 영애라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치거나,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 애원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데 엘리시아는 어땠는가.

그녀는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검이 귀 옆 기둥을 부수며 박히는 순간에도, 마치 귀찮은 날파리 한 마리가 날아든 것처럼 지루한 눈빛을 유지했다. 그리고 제 검날을 향해 하품에 가까운 한숨을 불어넣었다.

‘내 살기가…… 이토록 가벼운 유희에 불과했단 말인가?’

카일의 머릿속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는 언제나 완벽해야 했다. 황태자라는 왕관의 무게는 그의 목을 옥죄었고, 주변의 모든 인간은 그의 힘을 두려워하거나 이용하려 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향해 꼿꼿이 고개를 드는 엘리시아의 가면을 벗기고 싶었다. 그녀의 본색을 끌어내어, 자신과 같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엘리시아의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함은 가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칼날이나 무력의 위협 따위로는 감히 흔들 수 없는, 영혼의 절대적인 평온이었다.

“그대는…….”

카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검자루를 잡은 손에서 마력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두렵지 않은 건가? 내가 정말로 그대의 목을 쳤을지도 모른다.”

엘리시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치려면 치고 말려면 말지, 말이 왜 이렇게 많아. 졸려 죽겠는데.’

그녀는 대답 대신 아주 느리게 고개를 까딱였다. ‘어련하시겠어요’라는 무언의 조소였다. 말대꾸하는 것조차 숨이 차서 귀찮았다.

그러나 카일의 눈에는 그 무심한 고갯짓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다.

‘아…….’

카일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고요한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칼끝으로 나를 위협해 얻는 것이 무엇이냐. 그 조급함과 두려움이 너의 본질이냐.’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도사린 고독과 열등감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맑은 시선. 카일은 가슴을 둔기로 얻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황태자라는 껍데기 뒤에 숨은, 상처 입고 불안해하는 어린아이의 존재를 그녀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리석었군.”

카일이 스르륵 검을 거두었다. 기둥에서 빠져나온 검이 맑은 쇳소리를 내며 검집으로 들어갔다.

“그대의 그 무거운 성찰의 깊이를 감히 헤아리지 못하고, 내 얄팍한 자존심으로 무례를 범했다. 엘리시아 폰 로제타.”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태양이자 황태자가 고작 공작가의 영애에게 머리를 숙이는 광경에 대강당은 다시 한번 경악으로 뒤덮였다.

“그대의 침묵은 내게 가장 아픈 회찍질이었어. 앞으로 내 행동을 삼가도록 하지.”

엘리시아는 껌을 질겅이며 생각했다.

‘뭐래는 거야, 진짜. 미친놈인가?’

하지만 눈앞의 장부는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아주 긍정적인 숫자를 뿜어내고 있었다.

[황태자 카일의 적대감 수치: 99 -> 5로 급감!] [예상 귀찮음 비용: 5,000 -> 80으로 대폭 감소!] [업적 달성! '황태자를 굴복시킨 침묵의 성녀' 소문이 전파됩니다. 주변 인물들의 접근 난이도가 상승합니다.]

‘오, 이건 좀 이득인데.’

시끄러운 소문 덕에 귀찮은 파리들이 꼬이지 않는다면 대환영이었다. 엘리시아는 미련 없이 가방을 어깨에 메고 대강당 문을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카일이 숭배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채였다.

***

사흘 뒤.

라피스 제국 아카데미의 오후는 평화로웠다. 적어도 정원 구석, 울창한 가로수 아래 누워 있는 엘리시아에게는 그러했다.

“역시 여기가 최고야.”

그녀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잔디밭에 몸을 뉘었다.

학기 초의 소란스러움은 사흘 만에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입학식 날 황태자가 엘리시아에게 검을 겨누었다가 도리어 고개를 숙였다는 괴소문이 아카데미 전체에 퍼진 덕분이었다.

이제 학생들은 엘리시아를 ‘건드리면 황태자에게 목이 날아가거나, 혹은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는 무서운 침묵의 괴수’로 인식하고 있었다. 덕분에 반경 10미터 이내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오늘의 방관 리포트] - 주변 민폐 유발자들의 접근율: 0% - 소음 지수: 12데시벨 (바람 소리 및 나뭇잎 스치는 소리) - 현재 안락함 지수: 98%

장부의 쾌적한 리포트를 확인한 엘리시아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최고급 가죽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웠으나, 가방 모서리가 목덜미를 찔러 조금 불편했다.

‘음, 베개가 좀 딱딱한데. 푹신한 담요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귀찮아서 그냥 눈을 감으려던 찰나, 바스락거리는 무거운 발소리가 정막을 깨뜨렸다.

엘리시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평화로운 낮잠을 방해하는 불청객의 등장이었다. 실눈을 살짝 뜨자,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금발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카일이었다.

그는 평소의 오만한 걸음걸이 대신, 마치 신성한 신전에 발을 들이는 사제처럼 아주 조심스럽고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황실 고유의 문장이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붉은 실크 망토가 걸쳐져 있었다.

“엘리시아.”

카일이 그녀의 옆에 멈춰 섰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흙먼지가 묻은 잔디밭에 주저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황태자가 일개 영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는 모습은 그 자체로 기해한 광경이었다.

“방해하려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대가 이곳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사과의 뜻을 전하러 왔다.”

엘리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커녕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에너지가 아까웠다.

다만, 목 뒷덜미가 잔디 풀독 때문인지 자꾸 가려웠다. 가죽 가방은 너무 딱딱해서 목뼈가 아팠다. 그녀는 눈앞에서 살랑이는 카일의 붉은 망토 자락을 바라보았다. 황실 최고급 실크로 짜여 보기만 해도 보드랍고 폭신해 보였다.

‘어차피 저 인간, 나한테 미안하다고 싹싹 빌고 있잖아.’

그렇다면 이 정도 편의는 제공받아도 되지 않을까.

엘리시아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머리를 까딱였다. 슥, 하고 그녀의 머리가 가죽 가방에서 벗어나 카일의 무릎 위에 걸쳐진 붉은 망토 자락 위로 안착했다.

부드럽고 시원한 실크의 감촉이 뺨에 닿았다. 엘리시아는 만족스럽게 뺨을 비비며 턱을 망토에 깊숙이 묻었다. 아주 훌륭한 턱받침이자 베개였다.

“……!”

그 순간, 카일의 전신이 돌처럼 굳었다.

그의 호흡이 멈췄다. 은빛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흔들렸다.

자신의 무릎 위에, 자신의 황실 망토 위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머리를 얹고 누워버린 영애.

그녀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고, 얼굴은 지극히 평온했다. 그것은 남녀 간의 얄팍한 수작이 아니었다. 황태자인 자신을 권력의 상징이 아닌, 그저 ‘기댈 수 있는 편안한 나무’처럼 대하는 무욕의 태도였다.

‘나를…….’

카일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늘 황궁의 더러운 음모와 암투 속에서 살아가며, 모두가 자신의 망토를 탐내고 그 아래 엎드리려 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달랐다. 그녀는 그저 지친 몸을 뉘이기 위해 그의 망토를 베개로 삼았을 뿐이다. 그 어떤 사심도, 탐욕도 없는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신뢰의 표현.

‘이토록 깊은 신뢰를 내게 보여주다니.’

카일은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늘 고독했던 그의 영혼에 따스한 구원의 빛이 내리쬐는 기분이었다.

“엘리시아…….”

카일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그대의 이 거룩한 평온을 깨뜨리는 모든 소음을 내가 막아주겠다. 그대가 원한다면, 이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들의 입을 닫아버릴 수도 있어.”

그는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금박이 화려하게 장식된 봉투를 꺼냈다. 제국 최고의 장인이 마법 은실로 봉인한, 황실 주관 대사교제의 파트너십 초대장이었다. 제국의 모든 영애들이 가문의 명운을 걸고 얻고자 하는, 황태자의 유일한 사교계 동반자 자격증.

카일은 가슴을 깊이 쓸어내리며, 떨리는 손으로 그 화려한 초대장을 엘리시아의 코앞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앞으로 열릴 사교제의 모든 파트너를…… 내게 허락해 주겠나? 그대의 그 깊고 고요한 침묵을, 내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평생 수호하고 싶다.”

눈을 감고 있던 엘리시아의 한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뭐? 사교제 파트너? 그 시끄럽고 귀찮은 파티를 나보고 다 참석하라고?!’

그녀의 눈앞에 있는 장부가 다시금 미친 듯이 붉은빛을 뿜어내며 경고등을 켰다.

[초비상! 황태자의 파트너십 제안 수락 시 귀찮음 비용 99,999 발생!] - 거절할 시: 카일의 거대한 상실감으로 인한 집착 지수 폭등! 즉시 [강제 불면증 페널티] 작동!

엘리시아의 평화로운 낮잠 계획 위에 초대형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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