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대강당의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고풍스러운 아치형 천장 아래로 가득 들어찬 신입생들의 화려한 드레스와 제복에서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짙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입학 공식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벌써 사방에서 가문 자랑과 탐색전이 한창이었다.
그 숨 막히는 소음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엘리시아는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표류했다.
‘귀찮아. 집에 가고 싶다. 변방 영지 침대는 지금쯤 얼마나 아늑하게 날 기다리고 있을까.’
그녀의 유일한 인생 목표는 명확했다. 이 시끄럽고 가식적인 아카데미를 무사히, 그리고 아무런 소란 없이 졸업하는 것. 그리하여 저 멀리 남부 변방의 영지로 내려가 평생 동안 하루에 16시간씩 꿀잠을 자며 조용히 늙어 죽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늘 게으른 자의 평화를 가만히 두지 않는 법이다.
띠링!
귓가를 때리는 맑고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엘리시아의 눈앞에 반투명한 에메랄드빛 홀로그램 창이 불쑥 솟구쳤다.
[‘행동 비용 매니저 장부’가 가동됩니다!] [대상자: 엘리시아 폰 로제타] [현재 귀하의 안락한 수면을 위협하는 ‘민폐 분자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본 장부는 귀하가 최소한의 칼로리와 스트레스만을 소모하여 상황을 종결할 수 있는 ‘최적의 방관 루트’를 실시간으로 설계해 드립니다.]
엘리시아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헛것이 보이는 게 분명했다. 눈을 몇 번 비벼 보았지만, 허공에 떠 있는 글자들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 경고: 행동 지침 위반 및 페널티 안내 ★] - 장부가 제시하는 ‘최적 방관 지침’을 무시하고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릴 경우, 혹은 특정 관찰 대상(남주인공 후보군)의 호감도나 관심도가 임계치를 돌파할 경우, 강제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 페널티 내용: [강제 불면증 버프] 가동. - 효과: 일주일(168시간) 동안 그 어떤 마법, 비약, 수면제로도 잠에 들 수 없으며 맑은 정신으로 밤을 지새워야 함. ※ 현재 누적 불면 게이지: 0 / 500 (500 도달 시 즉시 작동!)
“……미쳤나 봐.”
엘리시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한다고? 그것도 나 같은 프로 낮잠러에게 그런 형벌은 단순한 페널티가 아니라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하루에 최소 10시간은 눈을 붙여야 뇌세포가 겨우 가동되는 체질인데, 일주일 동안 강제로 깨어 있어야 한다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로제타 영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군.”
귀를 찌르는 날카롭고 오만한 목소리가 우측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붉은색 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사내 하나가 엘리시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태자, 카일 에르하르트였다.
금빛 머리칼을 뒤로 넘긴 채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확실히 제국의 영웅이라 불릴 만한 수려한 외모였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잘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카일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적색 경고 아이콘과 숫자였다.
[대상: 카일 에르하르트 (제국의 황태자)] - 민폐 유발 가능성: 측정 불가 (최상급 재앙) - 예상 귀찮음 비용: 999 골드 (정신력 파탄 및 가문 멸문지화 급 귀찮음 유발) - 추천 방관 루트: 대화 완전 거부 및 묵비권 행사. 질문에 대꾸할 시 예상 스트레스 비용 999골드 즉시 청구 및 불면 게이지 150 상승.
‘999골드라고?’
엘리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인간과 엮이는 순간 내 평화로운 아카데미 생활은 물론이고, 일주일 동안 눈꺼풀을 강제로 치켜뜨고 밤새 천장만 바라봐야 하는 끔찍한 미래가 확정된다는 소리였다.
카일은 엘리시아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자, 당연하다는 듯 턱을 치켜세웠다. 사교계의 모든 영애들이 자신을 보면 넋을 잃었으니, 로제타 가문의 영애 역시 그럴 것이라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이번 입학식 이후에 있을 신입생 사교 시합 말이야.”
카일이 가볍게 검자루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대의 가문이 대대로 황실의 검을 보좌해 왔으니, 이번 시합에서 내 파트너로 나와 승리를 보좌하는 영광을 주지. 어때?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대강당의 주변 소음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황태자가 직접 파트너를 청하는 광경에 주변 귀족 영애들의 눈에서 질투와 시기의 불꽃이 튀었다. 특히 저 멀리서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비올레타 데 헤이즈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독약을 탈 것처럼 살벌했다.
그 시선들을 느끼는 순간, 엘리시아의 머릿속 장부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붉은 빛을 깜빡였다.
[경보! 경보!] - 황태자의 제안에 ‘네’라고 대답할 시: 사교계의 질투 독점, 추가 퀘스트 ‘황태자의 검 보좌하기’ 강제 수락, 예상 귀찮음 비용 5,000골드 돌파! - ‘아니오’라고 정중히 거절할 시: 황태자의 자존심을 건드려 ‘집착의 서막’ 유발, 예상 귀찮음 비용 3,000골드! - 최적의 방관 지침: 무대응. 존재 자체를 지워라. 대꾸하지 말고, 시선도 주지 말 것.
‘좋아, 아주 훌륭한 가이드라인이야.’
엘리시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장부의 지침은 명확했다. 대답을 해도 망하고, 거절을 해도 망한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엘리시아는 카일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니, 정확히는 카일의 콧등 위에 얹힌 투명한 공기 입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완만하게 고개를 돌려 창밖의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영애?”
카일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자신의 제안을 들은 영애가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는 순간 자신이 말을 너무 작게 했나 의심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 사교 시합에서 내 파트너가 되라는 뜻이다.”
엘리시아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소매 안에서 슬그머니 손을 움직였다. 아침 식사 후 입가심을 위해 챙겨 두었던 민트향 껌을 꺼내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뭉근하게 씹기 시작했다.
쩝. 쩝.
원래 귀족 영애라면 대중 앞에서 껌을 씹는 등의 천박한 행동은 삼가야 마땅했다. 하지만 지금 엘리시아에게 그런 사교계의 예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머릿속 장부의 비용을 제로로 유지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방관 성공률 상승 중!] - 현재 소모 비용: 0골드 - 카일 에르하르트의 인지 부조화 지수: 45% 상승
카일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국 최고의 권력자이자 천재 검사인 자신을 눈앞에 두고, 이 영애는 대답은커녕 창밖을 보며 껌을 씹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느긋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카일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황족 특유의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주변의 신입생들이 그 위압감에 움츠러들며 침을 삼켰다. 대강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평온했다. 오히려 민트향이 입안 가득 퍼지자 기분이 상쾌해질 지경이었다.
‘음, 역시 아카데미 매점 껌이 맛있단 말이지. 남부 영지 내려갈 때 좀 사 가야겠어.’
그녀는 카일의 살벌한 질문을 완전히 한 귀로 흘려보냈다. 머릿속에서는 오직 남부 영지에서의 낮잠 계획표를 수정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월요일에는 오크나무 아래에서 자고, 화요일에는 계곡 옆 정자에서 자고…….’
“로제타 영애!”
카일이 결국 참지 못하고 엘리시아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엘리시아는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젖히며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카일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완벽한 물리적 회피 성공!] - 보너스: 귀찮음 비용 10골드 추가 절감! - 카일 에르하르트의 자존심 손상 수치: 극대화
카일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철저한 무시였다. 그것도 사교계에서 조용하기로 소문난 로제타 가문의 영애에게 마주한 이 상황은, 그에게 신선함을 넘어선 기묘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주변의 귀족들은 이제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저 영애, 미친 거 아니야? 황태자 전하를 저렇게 대하다니…….” “로제타 가문이 황실을 등지려는 건가?” “아니, 표정을 봐.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어. 오히려…… 전하의 도발을 하찮게 여기는 듯한 저 여유는 대체 뭐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엘리시아의 귀에 닿았지만, 그녀는 그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찮게 여기는 게 아니라 그냥 귀찮은 건데요.’
말을 섞으면 귀찮아지고, 엮이면 불면증에 걸린다. 이보다 명확한 생존 법칙이 어디 있겠는가. 엘리시아는 반쯤 감긴 눈으로 카일을 응시하며, 입안의 껌을 반대쪽 어금니로 옮겨 씹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너는 짖어라, 나는 졸리다’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듯했다.
카일은 입술을 짓씹었다. 언제나 가식적인 미소와 아첨으로 가득 찬 사교계에서, 엘리시아의 이 안하무인하면서도 철저하게 고요한 태도는 이질적이다 못해 기이했다. 자신을 황태자가 아닌, 그저 길가의 돌멩이 보듯 하는 저 무심한 눈동자.
그 눈동자 깊은 곳에 담긴 기묘한 평온함이, 오히려 카일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고독과 피로를 건드렸다.
‘나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군.’
카일의 머릿속에서 오해의 톱니바퀴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권력도, 황태자라는 지위도, 내 무력도…… 저 영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가? 사교 시합 따위의 유치한 장난질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무언의 경고인가?’
[황태자 카일의 오해 수치: 80% 돌파!] [상태 변경: ‘불쾌함’ → ‘경외감 섞인 의구심’] - 귀찮음 비용 절감 성공! 누적 불면 게이지 상승 차단.
엘리시아는 장부의 알림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침묵은 금이었다. 말을 섞지 않으니 비용도 들지 않고 페널티의 위험에서도 멀어졌다. 이대로 입학식만 조용히 끝나면 완벽했다.
그러나 카일의 오해는 엘리시아의 예상보다 훨씬 깊고 무거웠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엘리시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벽안에 기묘한 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완벽주의자로 살아가며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던 황태자에게, 세상의 모든 소란을 차단한 채 홀로 고요함 속에 서 있는 엘리시아는 마치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보였다.
“재미있군.”
카일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것은 사교계의 가식적인 미소가 아닌, 진정한 흥미를 느낀 맹수의 미소였다.
“내 제안을 이토록 완벽하게 씹은 인간은 그대가 처음이다, 엘리시아 폰 로제타.”
‘아니, 제발 이름 부르지 마세요. 엮이기 싫다고요.’
엘리시아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유지했다. 여기서 반응을 보이면 장부의 경고등이 다시 켜질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저 턱을 괴고 껌을 씹는 데 집중했다.
스릉-.
갑자기 대강당의 두꺼운 대리석 바닥을 긁는 차가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카일의 손이 그의 허리에 차고 있던 황실의 보검, ‘아스트레이’의 검자루를 꽉 틀어쥐었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검집에서 드러난 푸른 검신이 서늘한 마력을 뿜어내며 빛났다.
주변의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황태자가 대낮에, 그것도 아카데미 입학식 대강당에서 검을 뽑아 들다니. 이는 단순한 위협을 넘어선 살인 미수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아무리 로제타 영애가 무례했다 한들, 검을 뽑으시는 것은……!”
황실 시종들과 교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달려왔지만, 카일은 그들을 가볍게 한 손으로 제지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엘리시아의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카일이 검을 완전히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검날이 엘리시아의 코앞, 단 몇 센티미터 거리에서 멈춰 섰다. 차가운 마력의 바람이 엘리시아의 앞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대답해라, 엘리시아.”
카일의 목소리에는 억누를 수 없는 집착과 살기가 동시에 어려 있었다.
“이 검 앞에서도, 그대의 그 건방진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보고 싶군.”
일촉즉발의 상황. 검날 끝에 맺힌 서리가 엘리시아의 뺨을 차갑게 식혔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떠 있는 장부에는, 붉은색 글씨가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최후 경고! 대상의 폭주 임박!] - 현재 상태에서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거나 비명을 지를 시: ‘약점 노출’로 판단되어 카일의 집착 지수 300% 폭등! 즉시 [강제 불면증 페널티] 발동! -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지: 절대적인 방관 유지. 검날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말 것.
엘리시아는 천천히 입안의 껌을 질겅 씹으며, 코앞의 검날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오직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해 피폐해질 자신의 몰골만이 그려지고 있었다.
‘잠을 못 자느니, 그냥 여기서 목이 날아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
진심 어린 귀찮음과 수면욕이 빚어낸 광기가, 그녀의 눈동자를 그 어느 때보다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