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우경서점의 낡은 함석지붕을 뚫을 기세로 더 거세게 울부짖었다.
창문 유리를 사정없이 때리는 빗소리 사이로, 오직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만이 엉켜 들었다. 혜수의 무릎 위로 무너져 내린 주원의 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방금 전까지 은창현의 독성 구름을 정화하느라 뿜어내던 뜨거운 열기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 그녀의 손끝목덜미에 닿는 그의 살결은 마치 겨울철 계곡에서 건져 올린 성에 낀 돌덩이 같았다.
"주원아……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나 좀 봐, 주원아!"
혜수의 목소리가 젖은 흙바닥처럼 갈라졌다.
그의 입술 틈새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혜수의 하얀 면 소매를 타고 내려와 손목을 적셨다. 비릿하고 무거운 피비린내가 서점 안의 눅눅한 공기 속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주원의 가슴께, 얇은 셔츠 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는 붉은 성흔이 기괴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혜수의 모든 고통과 수명 단축의 반동을 홀로 짊어지겠노라 스스로 새겨 넣었던 그 잔혹한 낙인이, 이제는 주원의 생명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들이는 거머리처럼 붉은 빛을 내뿜으며 요동쳤다.
맥박이 뛰지 않았다. 아니, 너무 미약해서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주원의 눈꺼풀은 굳게 닫힌 채 미동조차 없었고, 길게 뻗은 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방울만이 처연하게 빛났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내가 당신을 살리겠다고,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혜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매번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관계가 깊어질 때마다 뒷걸음질 치고, 스스로를 고립된 서점 안에 가두었던 회피형 방어기제가 거짓말처럼 파스스 부서져 내렸다. 지금 도망치면, 저 눈앞의 남자는 정말로 죽는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반동을 독식한 채, 차가운 시신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급하게 서점 구석, 민우형이 보내왔던 화분으로 향했다.
푸른 잎사귀를 싱그럽게 틔우고 있던 ‘청우초’가 빗물 냄새를 맡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혜수는 주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뉘어놓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화분으로 달려갔다. 주저 없이 청우초의 줄기를 꺾어 쥐었다. 거친 줄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청우초 잎사귀들을 손바닥으로 마구 짓이기기 시작했다. 초록색의 걸쭉하고 진한 즙액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다시 주원의 곁으로 돌아온 혜수는 그의 셔츠 단추를 거칠게 튿어냈다. 굳게 닫힌 그의 가슴팍, 심장 바로 위에 새겨진 붉은 성흔이 모습을 드러냈다. 혜수는 청우초의 즙액이 가득 묻은 손바닥을 망설임 없이 그의 성흔 위에 꾹 밀착시켰다.
"아윽……!"
순간, 혜수의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우화 계약의 공명이었다. 주원의 심장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은가의 치명적인 독성과 잔여 반동의 냉기가, 손바닥의 접촉 면을 타고 혜수의 전신으로 사정없이 역류해 들어왔다. 혈관마다 얼음 송곳이 박히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뼈마디가 마디마디 부서져 나가는 감각에 당장이라도 손을 떼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혜수는 이를 악물었다. 손바닥에 힘을 더 주어, 주원의 성흔을 강하게 압박했다.
"가져가…… 내가 가져갈 테니까, 제발 눈 좀 떠 봐……!"
그녀는 스스로 감각의 통로를 넓혔다. 주원이 자신을 위해 고통을 독식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그의 고통을 나누어 가질 차례였다. 두 사람의 피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날, 오감과 통증을 완벽하게 공유하는 우화 계약의 법칙이 그들의 심장을 하나로 묶었다.
주원의 차가운 심장이 한 번 크게 요동쳤다.
*쿵.*
그 진동이 혜수의 손바닥을 타고 그녀의 심장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동기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혜수의 전신을 돌던 피가 무서운 속도로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체온이 주원의 차가운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주원의 체내에 고여 있던 차디찬 독성이 혜수의 뜨거운 생명력에 밀려 서서히 중화되었다.
"흡……!"
주원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며 그가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투명하게 질려 있던 그의 뺨에 아주 미세하게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맥박이 느리지만 정형적인 궤도를 그리며 뛰기 시작하는 것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혼수상태의 나락에서, 그녀의 피와 온기가 그를 기어코 끌어올린 것이었다.
"하아, 하아……."
혜수는 힘이 풀려 주원의 슴가 위로 엎어졌다. 땀과 빗물로 범벅이 된 이마를 그의 어깨에 기댄 채,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의 심장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성공했구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서점 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어느새 서점 안방의 문을 열고 나온 민우형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정밀한 약재 추출 도구들과 주사기들이 들려 있었다. 우형의 시선은 주원의 가슴 위에 얹힌 혜수의 손, 그리고 그 아래에서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청우초로 향했다.
"이것 봐, 혜수야."
우형이 다가와 주원의 가슴 위를 가리켰다.
혜수가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그러자 으깨진 청우초의 잎사귀들이 주원의 피부에 닿은 채, 은은하고 눈부신 은빛으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단순한 초록색 즙액이었던 것이, 주원의 은가 혈통의 피와 공명하자마자 마치 살아 있는 은빛 액체처럼 미세하게 물결치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2화에서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하니? 이 청우초의 잎사귀는 은가 혈통의 피에만 반응해 은빛으로 변한다는 걸."
우형이 핀셋으로 은빛으로 변한 잎사귀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채취해 유리 비커에 담았다.
"은가의 저주는 혈통의 구속력에 기반을 두고 있어. 그들의 피가 가진 특이한 주파수가 우화 계약의 보이지 않는 사슬을 만드는 거지. 하지만 이 변이된 청우초 성분은 그 혈통의 주파수를 교란하고 무력화할 수 있어."
우형은 비커에 담긴 은빛 즙액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두 사람의 합성 혈청을 혼합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의 합성 혈청과 은빛의 청우초 추출물이 섞이자, 부글부거 끓어오르며 이내 투명하고 맑은 은빛의 액체로 안정되었다. 유리관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신비로운 약물이었다.
"완성이다. 가문의 저주 결계를 일시적으로 끊어내고, 너희 두 사람의 생명력 반동을 잠재울 완전한 해독제…… '청우 세럼(聽雨 Serum)'이야."
우형이 세럼이 든 앰플을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눈빛에는 안도감과 함께 깊은 우려가 교차하고 있었다.
"이걸 주입하면 주원의 성흔으로 인한 반동 독식의 고통도, 너를 옥죄는 우화 계약의 징벌도 일시적으로 멈출 거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야. 주원의 가슴에 새겨진 결계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려면, 은창현이 쳐 놓은 태백산맥의 중심 결계를 반드시 파괴해야 해."
우형은 세럼의 일부를 주입기에 옮겨 담아 주원의 팔뚝에 부드럽게 주사했다. 약물이 몸 안으로 들어가자, 주원의 거칠던 호흡이 완전히 안정을 찾으며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우형은 서점 한구석에 꽂혀 있는 오래된 고서를 흘낏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 고서에 적혀 있던 구절대로야. '죽음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 마음이 완전히 동일하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열쇠가 된다'는 말. 너희가 서로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려 했던 그 마음이, 결국 이 세럼을 반응하게 만든 진짜 동력이지."
* * *
밤이 깊어질수록 청우동의 빗소리는 한층 더 차분하고 정적인 리듬으로 변해갔다.
서점 안방의 아담한 침대 위, 은은한 스탠드 불빛만이 방 안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주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기이할 정도로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을 짓누르던 그 무겁고 차가운 바위 같은 압박감이 사라져 있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주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혜수가 침대 맡에 앉아, 그의 손을 꼭 쥔 채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하얀 이마에는 여전히 식은땀 흔적이 남아 있었고, 입술은 살짝 트여 있었다. 주원의 눈에 형언할 수 없는 애틋함과 미안함이 소용돌이쳤다.
그는 혜수가 깰까 봐 숨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차가운 그의 손가락 끝에 닿는 그녀의 살결이 따뜻했다. 그 온기가 너무나 소중해서, 주원의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인기척에 혜수가 부르르 떨며 눈을 떴다.
"……주원아."
혜수의 목소리에 물기가 축축하게 배어 있었다. 그녀는 주원이 깨어난 것을 보자마자,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정신이 들어? 아픈 데는 없어? 가슴은 어떤데?"
"괜찮아, 혜수야. 정말 하나도 안 아파. 네가…… 나를 살려준 거야?"
주원이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아직 낮고 잠겨 있었지만, 이전의 그 위태롭던 쇳소리는 사라져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혜수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져 주원의 손등을 적셨다. 주원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 너도 온몸이 얼음장 같아."
주원이 침대 한쪽으로 몸을 조금 움직이며 자리를 내주었다. 혜수는 잠시 망설였다. 평소 같았으면 감정이 깊어지거나 신체적 접촉이 일어날 때의 반동을 두려워해 뒤로 물러섰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혜수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주원의 곁에 누웠다.
좁은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었다. 주원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혜수 역시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꼭 감싸 안았다.
"앗……."
살이 맞닿는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가문의 거부 제약이 보내는 징벌의 통증이 찌릿하게 일어났다. 서로에게 깊어질수록 생명력을 갉아먹는 잔혹한 규칙이 작동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민우형이 주입한 청우 세럼의 기운이 몸속에서 은빛으로 돌며 그 통증을 부드럽게 억눌렀다.
통증 뒤로, 오직 서로의 체온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가지 마, 주원아. 내 곁에 있어 줘."
혜수가 그의 품에 더 깊숙이 파고들며 속삭였다.
"안 가. 절대 안 가. 네가 가라고 밀어내도, 나 여기 있을 거야."
주원은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팔에 힘을 더했다. 창밖에는 차가운 봄비가 세상을 적시며 내리고 있었지만, 차디찬 정서의 밤을 건너는 두 사람의 침대 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봄날의 햇살이 머무는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호흡에 의지해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아침, 빗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잦아들었을 때였다.
혜수는 눈을 떠 옆자리를 보았다. 주원은 깊고 평온한 잠에 빠져 있었다. 세럼의 효과 덕분인지 그의 얼굴에는 완연한 생기가 돌고 있었다. 혜수는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서점 로비로 나왔다.
서점 안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매일 아침 한의원 문을 열기 전 서점에 들러 따뜻한 약차를 건네주던 민우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빠?"
혜수가 나직하게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때, 서점 정문 유리창 너머 목재 우편함에 꽂혀 있는 붉은색 봉투 하나가 혜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혜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문을 열고 나갔다.
우편함에서 봉투를 꺼낸 순간, 그녀의 손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봉투의 모서리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찢고 내용물을 꺼냈다. 거칠고 빳빳한 한지 위에, 서슬 퍼런 먹향과 함께 은창현의 오만하고 냉혹한 필체가 적혀 있었다.
[가문의 피를 더럽힌 불효한 것들아. 너희가 발버둥 치며 만든 그 하찮은 비술의 결과물은 가문의 자산으로 회수한다. 의원 놈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세럼의 배합 주술법을 들고 태백산맥의 결계 중심부로 직접 찾아오거라. 해가 지기 전까지 오지 않는다면, 그놈의 영혼은 한빙결계의 제물이 될 것이다.]
"안 돼……!"
혜수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형의 비밀 연구실이 습격당한 것이었다. 은창현은 세럼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연구 자료를 훔치기 위해 우형을 인질로 납치해 간 것이 분명했다. 혜수의 가슴이 무서운 속도로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분노가 가슴속에서 뒤엉켜 폭발했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며 주원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혜수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손에 든 피 묻은 편지를 보고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은창현이…… 우형 형님을 데려갔군."
주원의 목소리에 서리가 내렸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세럼이 기혈을 완전히 회복시키지 못해 몸이 성치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내가 갈게, 혜수야. 이번에는 내가 끝내고 올게. 너는 여기 있어."
주원이 혜수의 어깨를 잡으며 밀어내려 했다. 또다시 그녀를 지키기 위해 홀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려는 그의 고집이었다.
하지만 혜수는 가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혜수는 주원의 차가운 손을 두 손으로 단단히 꽉 쥐었다. 힘을 꽉 쥔 그녀의 손끝이 부르르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같이 가."
"혜수야, 거긴 가문의 심장부야. 결계의 압박이 상상을 초월할 거라고. 네가 가면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주원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의 눈에 서린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은 오직 혜수의 안위만을 향해 있었다.
혜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주원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단호하게 말했다.
"7년 동안 도망쳤어. 무서워서, 상처받기 싫어서, 당신이 날 배신했다고 믿으면서 비겁하게 숨어 있었어. 재회한 뒤에도 당신 뒤바라지만 받으며 피하기 바빴지. 당신이 내 겪을 고통을 다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것도 모른 채."
혜수의 입술 끝이 가볍게 떨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목소리는 서점 안을 가득 채울 만큼 묵직하고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이젠 안 피해. 내 가족도, 내 사랑도 내가 지킬 거야. 그러니까 주원아…… 이번엔 내가 먼저 당신의 우산이 되어줄게."
늘 보호받기만 하던 작은 새 같던 그녀가, 마침내 스스로 날개를 펴고 폭풍우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마친 순간이었다. 주원은 그녀의 눈에 깃든 형언할 수 없는 강인함에 압도되어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혜수는 주원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서점 벽면에 걸려 있는 낡은 우산으로 다가갔다.
7년 전, 비참한 이별의 날에 두 사람이 나누어 썼던, 손때 묻고 군데군데 해진 검은색 우산이었다. 그들의 상처와 눈물, 그리고 억압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물건.
혜수가 그 우산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바래질 정도로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으며, 가문을 향한 거대한 의지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서점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주원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푸른 뇌전의 불꽃이 파르르 스파크를 일으키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완벽하게 일치하자, 억눌려 있던 우화 계약의 힘이 저주가 아닌 강력한 힘의 파동이 되어 그들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가문을 향한 주원의 차가운 살기가 푸른 불꽃이 되어 빗속으로 뻗어 나갔다.
그들의 머리 위로, 마침내 거대한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천둥소리가 청우동 하늘을 가르며 길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