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가느다란 숨결이 얽히는 찰나, 주원의 거친 손가락 끝이 혜수의 뺨에 닿았다. 손가락끝을 타고 흐르는 떨림은 단순한 물리적 접촉이 아니었다. 그것은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얼어붙어 있던 감각의 빙벽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신호였다. 그의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그 아래에서 요동치는 맥박은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다.
"혜수…… 야…… 안 돼…… 왜……."
주원의 갈라진 목소리가 젖은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실핏줄이 가득 들어찬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한 사람, 제 고통을 나누어 갖겠다며 매달려 있는 혜수의 얼굴만이 담겨 있었다. 주원은 그녀를 밀어내려 힘을 주려 했으나, 혜수의 자발적인 동기화로 인해 기혈의 절반을 빼앗긴 그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애틋한 평온을 깨부순 것은 천장 구석에서부터 시작된 기괴한 소리였다.
*스스스스…….*
낡은 우경서점의 환풍기 틈새로 스며든 것은 평범한 밤안개가 아니었다. 눅눅하고 불길한 이끼 냄새를 풍기는 검푸른 연기는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 가더니, 이내 먹이를 노리고 기어가는 독뱀의 형상으로 허공을 기어 다녔다. 연기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서점 안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바닥에 놓인 화분 속 청우초가 먼저 반응했다. 푸르던 잎사귀 끝자락이 미세한 진동과 함께 은빛으로 물들어 가며 뻣뻣하게 굳었다. 은가 가문의 피와 주술에만 공명하는 약초가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은창현이 보낸 가문의 침입자가 서점을 에워싸고 숨통을 조여 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가주의 독운(毒雲)이다."
옆에서 두 사람의 상태를 살피던 우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우형은 급히 품에서 침통을 꺼내 들었지만, 서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검푸른 안개의 양은 한두 개의 혈자리를 누르는 것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푸른 독뱀 모양의 연기가 바닥을 쓸며 주원의 발목을 향해 뻗어 나갔다. 연기가 닿는 순간, 서점 내부에 흐르던 온기가 흔적도 없이 사려졌다. 생명력을 가라앉히고 모든 온기를 얼려 죽이는 은가의 비술이었다.
"혜수야, 내 뒤로 가."
주원이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성흔이 검붉은 빛을 발하며 요동쳤다. 주원은 혜수를 제 등 뒤로 거칠게 밀쳐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나, 그의 시선은 오직 서점의 출입문과 열려 있는 창문들로 향했다.
*콰창!*
주원이 다리가 풀려 비틀거리면서도 서점 한구석에 놓인 무거운 참나무 책장을 밀어붙였다. 삐걱거리는 비명과 함께 책장이 미끄러지며 서점의 옆문 단단히 가로막았다. 그의 손바닥이 거친 나무 모서리에 쓸려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주원은 멈추지 않았다. 문틈으로 기어 들어오는 푸른 연기를 차단하기 위해,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닥치는 대로 가구들을 끌어당겼다.
"주원아, 하지 마! 몸도 성치 않으면서 왜 자꾸 혼자……!"
혜수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주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창문을 닫고 빗장을 걸어 잠갔다.
"들어오게 두면 안 돼. 저 연기는…… 네 영혼까지 얼릴 거야."
주원의 목소리는 단호했으나, 그 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가구를 밀어붙이던 그의 양손이 힘없이 바르르 떨렸다. 환풍기를 통해 쏟아진 연기가 이미 서점 내부의 산소를 잠식하고 있었다. 주원의 입술이 급격히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호흡기가 타들어 가는 오감이 혜수의 가슴으로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에 혜수 역시 가슴을 쥐어짜며 주저앉았다.
가문의 거부 제약. 다가갈수록 서로의 생명을 갉아먹는 잔혹한 규칙이 두 사람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혜수는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내쉬는 주원을 바라보았다. 7년 전에도 이랬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주원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오해의 결계에 속아 넘어가 그를 두고 도망쳤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겹겹이 쌓아 올렸던 회피라는 이름의 성벽.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었던가. 주원은 혼자서 그 모든 고통과 반동을 '성흔'으로 짊어진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더는 도망치지 않아.'
혜수의 눈동자에서 흔들림이 사라졌다.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서점 구석, 어지럽게 널브러진 고서들 사이에서 일전에 보았던 구절이 혜수의 뇌리를 스쳤다. ['죽음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 마음이 완전히 동일하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열쇠가 된다.']
"주원아."
혜수가 기어서 주원에게 다가갔다. 차가운 바닥을 기어가는 그녀의 무릎이 붉게 쓸렸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주원은 연기에 질식해 가면서도 혜수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손을 내저었다.
"오지 마…… 혜수야, 제발…… 멀어지라고 했잖아……."
"싫어."
혜수가 주원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얼음판처럼 차가운 그의 뺨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파르르 떨렸다. 주원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혜수는 그의 차가운 뺨을 더 깊숙이 부여잡으며, 물러설 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마침내 제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 보였다.
"나 안 도망쳐.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죽어도 너랑 같이 아플 거야."
그것은 가문에 대한 반역이자, 자신을 옭아매던 회피형 방어기제에 대한 종언이었다.
혜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술이 주원의 갈라지고 차가운 입술 위로 허물어지듯 겹쳤다.
*화아악!*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서점 안의 공기가 일순간 멈춰 섰다.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영혼을 완전히 개방하고, 상대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겠다는 절대적인 서약이었다. 우화 계약의 공명 주파수가 한계를 향해 치솟기 시작했다. 100%에 머물던 심장 동기화 비율이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상승하며 200%에 도달했다.
"윽……!"
우형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눈을 가렸다.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고 푸른 주술적 빛무리가 서점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실선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가문이 그들을 구속하기 위해 영혼 깊숙이 심어두었던 '우화 제약'의 붉은 쇠사슬과 통제 물리선들이 공중에 시각화되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촘촘한 그물망 같은 선들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건…… 제어선이 과부하로 터지려 하고 있어!"
우형의 목소리에 경악이 서렸다.
가문이 설계한 저주는 두 사람이 서로를 밀어내고 고통받을 때만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각오한 채 완벽하게 하나로 공명하자 시스템 자체가 파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지직! 쩡!*
공중에 떠오른 붉은 사슬들이 유리창이 깨지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하나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원의 심장 부근에서 눈이 멀 것 같은 푸른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주원의 성흔이 뿜어내는 푸른 빛은 더 이상 고통의 흔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주의 사슬을 녹여버리는 거대한 해방의 열기였다.
"아아아아윽!"
주원의 입에서 뜨거운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그의 손은 이제 혜수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혜수 역시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입술을 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심장이 완벽하게 같은 리듬으로, 같은 크기로 맥박질했다. 쿵. 쿵. 쿵. 서점을 가득 채운 빗소리조차 두 사람의 심장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주원의 심장에서 솟구친 푸른 불꽃이 거대한 파동이 되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화르르륵!*
푸른 불꽃의 파도가 서점 내부를 쓸고 지나갔다. 환풍기를 통해 기어 들어와 생명력을 갉아먹던 검푸른 독뱀 모양의 연기들이 그 불꽃에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하얗게 기화되었다. 은창현이 조종하던 독성 구름이 단 한 줌도 남지 않고 완전히 정화되어 허공으로 날아갔다.
서점 정문을 가로막고 있던 가구들 너머, 빗속에서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은가의 사제들과 결계 병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끄아악!" "결계가 역류한다! 주술이……!"
서점 외곽의 어둠 속에서 붉은 옷을 입은 은가의 인형들이 차례로 바닥에 쓰러졌다. 두 사람의 완벽한 공명이 만들어낸 과부하의 충격파가 저주 통제선을 타고 역류하여, 그것을 조종하던 가문의 적대자들에게 고스란히 직격타로 떨어진 것이다. 그들은 가슴을 움켜쥐고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빗속으로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문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올린 저주의 물리선이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처참하게 조각났다.
서점 안을 가득 채웠던 음산한 기운이 걷히고,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빗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혜수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녀의 입술 끝에 주원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주원의 성흔에서 뿜어 나오던 붉은 빛도 잠잠해져 있었다. 마침내 가문의 억압을 걷어내고 승리했다는 안도감이 혜수의 전신을 감쌌다.
하지만 평온은 찰나에 불과했다.
"주원아? 주원아, 정신 차려 봐……."
혜수가 주원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주원의 몸은 기이할 정도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피부는 핏기가 완전히 가셔 투명한 유립처럼 변해 있었다.
"……혜수, 야."
주원의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났다.
그가 겨우 입을 열어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한 순간이었다.
*울컥.*
주원의 얇은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붉은 피는 혜수의 하얀 소매와 그녀의 무릎 위를 처참하게 적셨다. 정화의 과정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체내에 갇혀 있던 은가의 치명적인 독성과, 저주 통제선이 끊어지며 발생한 잔여 반동의 물리적 충격이 그의 오장육부를 단번에 찢어발긴 것이었다.
"주원아! 안 돼, 주원아!"
혜수의 비명이 서점의 침묵을 찢었다.
주원은 혜수의 무릎 위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감겨오는 눈꺼풀 사이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혜수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빗소리가 다시 거세어지는 서점 안, 차갑게 식어가는 주원의 몸을 껴안은 혜수의 손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봄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지독한 어둠이 다시 그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