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폭풍이 지나가고 평온이 찾아온 새벽녘, 주원의 가슴에서 엄청난 열기가 피어오르며 그의 숨소리가 끊어질 듯 가팔라지자 혜수가 다급하게 그의 밤색 셔츠 단추를 뜯어내렸다.

*투두둑.*

실밥이 튿어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둥근 플라스틱 단추들이 서점의 삐걱이는 목조 바닥 위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혜수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젖어 축 처진 셔츠 자락을 양옆으로 밀쳐내자, 푸르스름한 새벽빛 사이로 주원의 왼쪽 가슴팍이 온전히 드러났다.

혜수의 숨이 턱 막혔다.

그곳에는 7년 전 주원의 매끄러웠던 살결 대신, 기괴하고도 잔혹한 형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붉은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편 채 심장 위를 짓누르고 있는 듯한 문양.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문신이나 흉터가 아니었다. 살가죽을 짓이기고 돋아난 붉은 성흔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기괴하게 요동치며 진물을 흘리고 있었다. 피부 아래에서 붉은 핏줄들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썩어 들어가는 상처처럼 붉게 진물러 터진 성흔의 가장자리는 주원이 숨을 쉴 때마다 파르르 떨렸다.

1화의 그 비 내리던 밤, 그의 젖은 셔츠 사이로 스치듯 훔쳐보았던 기이한 붉은 그림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가문에서 내린 저주를 홀로 짊어지기 위해 제 살을 파내고 새겨 넣은 반동 독식의 낙인.

"이게…… 이게 대체 뭐야……."

혜수의 목소리가 젖은 모래알처럼 갈라져 나왔다. 손가락을 뻗어 그 낙인 주변의 살갗에 살며시 가져다 대려 했지만, 손끝이 닿기도 전에 뿜어져 나오는 초열에 피부가 아려왔다. 주원은 신음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모로 꺾었다.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려 그의 하얀 턱선을 타고 목덜미로 번졌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강제로 이어지는 우화 계약의 공명. 하지만 지금 혜수가 느끼는 고통은 주원이 실제로 겪고 있을 고통의 아주 작은 파편에 불과했다. 가슴이 조금 저릿한 정도의 통증 뒤편에, 이토록 끔찍하게 타들어 가는 죽음의 열기가 도사리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혜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주원의 차가운 손을 움켜잡았다. 그의 체온은 얼음장 같았지만, 심장이 위치한 가슴만은 용광로처럼 끓고 있었다. 이 기괴한 불균형 속에서 혜수의 의식이 주원의 젖은 손바닥을 통해 그의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봄비의 파동을 타고 두 사람의 피가 완벽하게 주파수를 맞추는 순간이었다.

*스우우우.*

귓가를 때리던 빗소리가 멀어지며, 혜수의 눈앞으로 7년 전의 가혹한 풍경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사방이 얼음처럼 차가운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은가의 지하 밀실이었다. 혜수의 시야는 주원의 눈동자가 되어 방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은가의 절대적인 지배자이자 주원의 숙부인 은창현이 냉혹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주원의 무릎 아래로는 차가운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그 천한 방계 계집을 살려 두는 대가치고는 제법 어울리는 형벌이 아니더냐.'

은창현의 목소리가 뇌리를 찌르듯 울렸다. 주원은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가슴을 옥죄는 고통을 견디며 간신히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의 가슴팍에는 붉은 달궈진 쇠붙이로 지지는 듯한 낙인 주술이 새겨지고 있었다. 살이 타들어 가는 비린내가 진동했다.

'내 가슴에…… 이 성흔을 새길 테니…….'

과거의 주원이 피를 토해내며 읊조렸다. 목소리는 갈라지고 끊어졌지만, 눈빛만은 꺾이지 않는 유리 파편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혜수에게 갈 모든 거부 반동을 내가 가져갑니다. 그 애가 가문에서 도망쳐 숨어 사는 동안, 계약의 징벌이 그 애의 목숨을 갉아먹지 않도록…… 내가 다 가질 테니, 그 애에게서는 손을 떼십시오.'

'미련한 놈. 은가의 핏줄을 타고난 자가 사랑 따위에 목숨을 버리겠다니. 네가 다가갈수록, 그 계집을 연모할수록 이 낙인은 네 심장을 파먹고 들어가 결국 너를 사멸하게 만들 것이다.'

'상관없어. 혜수만…… 무사할 수 있다면.'

낙인이 완성되는 순간, 주원의 의식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7년의 시간을 거슬러 현재 우경서점에 주저앉아 있는 혜수의 심장으로 고스란히 내리꽂혔다.

"아아아……!"

혜수가 비명을 지르며 주원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숨이 막혔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주원의 젖은 뺨 위로 툭툭 떨어졌다.

7년 전, 주원이 가문의 상속권을 선택하고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었던 모든 기억이 거짓의 결계가 만들어 낸 환영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배신한 것이 아니었다. 가문의 서슬 퍼런 칼날 끝에서 혜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저주의 소용돌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심장을 내던진 것이었다. 혜수가 상처받기 싫어 도망치고 고립을 자처하는 동안, 주원은 이 끔찍한 성흔을 가슴에 품은 채 그녀의 빗속을 묵묵히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같이…… 왜 그랬어……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혜수가 주원의 어깨를 붙잡고 오열했다.

그때, 서점의 낡은 목조 문이 거칠게 열리며 축축한 바람과 함께 누군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혜수야!"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들어온 이는 민우형이었다. 그의 손에는 빗물에 젖은 약상자가 들려 있었고, 서점 구석에 놓아두었던 푸른 잎사귀의 '청우초' 화분이 그의 발끝에 채여 가볍게 흔들렸다. 혜수와 주원의 피가 공명하는 강한 파동 때문인지, 청우초의 푸른 잎사귀 끝이 미세하게 은빛으로 변하며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우형은 바닥에 쓰러진 주원의 처참한 몰골과 그의 가슴에 선명하게 박힌 붉은 나비 성흔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우형은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주원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미친 녀석이…… 결국 여기까지 왔군."

우형이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오빠, 주원이가 왜 이러는 거야? 이 낙인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혜수가 주원의 뺨을 감싸 안은 채 우형을 다급하게 다그쳤다. 우형은 주원의 맥을 짚은 손을 거두며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깊은 분노와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혜수 너, 매 주말이나 비가 올 때마다 가끔 가슴이 가볍게 찌릿하거나 체한 것처럼 답답했던 적 없었니?"

"어……? 그냥 가벼운 통증인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았어. 감기가 오려나 보다 하고……."

"그게 아니야."

우형이 주원의 젖은 셔츠 깃을 거칠게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네가 가문에서 도망쳐 나와 이 청우동에 숨어 사는 동안, 가문의 거부 제약은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었어. 네가 주원을 밀어내고 멀어지려 할 때마다 네 심장을 멈추게 만들 강력한 반동이 매번 가해졌단 말이다. 그런데 왜 네가 멀쩡했겠어?"

우형의 시선이 주원의 가슴 위에서 요동치는 붉은 나비 성흔으로 향했다.

"이 미련한 놈이 매 주말마다, 그리고 비가 내릴 때마다 네가 받아야 할 거부 제약의 반동을 제 가슴으로 전부 끌어갔어. 그냥 가져간 게 아니야. 반동 독식 주술은 대가가 따르지. 상대방의 통증을 완전히 지워주는 대신, 시술자에게는 그 고통이 최소 7배로 증폭되어 전달돼. 네가 가벼운 가슴앓이를 느낄 때, 이 녀석은 심장이 일곱 번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버틴 거야. 심장이 성할 리가 없지. 이미 혈맥은 다 망가졌고, 생명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우형의 폭로는 혜수의 심장에 날카로운 쐐기를 박아 넣었다.

7배의 고통.

혜수가 상처받기 두려워 주원의 전화를 피하고,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서점 문을 걸어 잠그며 도망칠 때마다 주원은 이 어두운 빗속에서 홀로 피를 토하며 심장이 짓겨 나가는 고통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혜수가 쌓아 올린 견고한 회피의 성벽은 주원의 목숨을 갉아먹는 가장 잔혹한 흉기였다.

"내가…… 내가 너를 죽이고 있었구나……."

혜수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주원의 이마를 적셨다.

언제나 주원은 그녀의 곁에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가락을 베였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를 안심시켰던 그의 다정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 다정함의 이면에 숨겨진 피비린내 나는 희생이 혜수의 영혼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하지만 혜수는 더는 도망치던 과거의 약한 계집이 아니었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가문이 설계한 잔혹한 규칙 아래서 비참하게 죽어가야 하는 연인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혜수를 보잘것없는 도망자로 여기며 평생 숨어 살다 파멸하길 바라던 은창현과 가문의 의도를 비웃듯, 그녀의 눈동자에 단단한 결의가 깃들었다.

"더는 도망치지 않아."

혜수가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수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우형이 놀라 혜수를 말리려 손을 뻗었지만, 혜수가 먼저 주원의 피 묻은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하게 깍지를 꼈다.

"주원아."

7년 만에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도망치기 바빴던 세월의 마침표를 찍는 부름이었다.

혜수는 주원의 가슴팍으로 천천히 몸을 숙였다. 타들어 가는 초열을 내뿜는 붉은 나비 성흔. 살가죽이 진물러 터진 그 끔찍한 낙인 위로 혜수가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맞대었다.

*치이익.*

뜨거운 열기가 이마의 살결을 자극하며 극심한 통증이 혜수의 뇌리를 강타했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혜수는 주원의 손을 잡은 손귀에 힘을 더 주며 이를 악물었다.

"은가가 내린 저주 따위에 우리를 내어주지 않아. 네 고통, 이제 나한테 나눠줘. 반이든, 전부든 내가 다 가져갈 테니까."

혜수가 주체적으로 고통을 분담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우화 계약의 공명 주파수가 일순간 거대하게 일렁였다.

두 사람을 옭아매고 있던 거부 제약의 붉은 쇠사슬이 혜수의 자발적인 결합 의지에 부딪혀 팽팽하게 비명을 질렀다. 주원의 몸속에 갇혀 폭주하던 기혈의 절반이 혜수의 몸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지만, 역설적이게도 혼자서 7배의 고통을 짊어지며 죽어가던 주원의 가슴 위 성흔의 핏빛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주원의 기괴하게 치솟던 체온이 급격히 내려가며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터질 것처럼 요동치던 그의 맥박도 서서히 차분한 리듬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혜수야…… 너 미쳤어……! 당장 떨어져!"

우형이 경악하며 소리쳤지만, 혜수는 주원의 가슴에 이마를 맞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원의 고통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의 생명력을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서점 안의 공기를 무겁게 압도했다.

마침내 주원의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얇고 가파르던 호흡이 한결 편안해지며, 깊은 나락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눈을 떴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된 눈동자 속에, 제 가슴에 이마를 맞댄 채 고통으로 신음하는 혜수의 얼굴이 들어왔다. 주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혜수…… 야…… 안 돼…… 왜……."

주원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혜수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그의 거친 손가락 끝이 그녀의 살결에 닿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고통의 파동이 기적처럼 누그러들었다. 고통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얻어낸 짧고도 애틋한 평온이었다.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스스스…….*

낡은 우경서점의 천장 환풍기 구멍을 통해, 불길하고 눅눅한 냄새를 풍기는 검푸른 안개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미세하게 요동치며 서점 바닥으로 내려앉는 안개의 형상은 마치 먹이를 노리고 기어가는 푸른 독뱀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은가의 가주 은창현이 조종하는 음산한 비구름의 연기가 두 사람의 숨통을 조여오듯 사방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창밖의 빗소리가 갑자기 거칠어지며, 서점의 낡은 유리창이 요란하게 덜컹거렸다.

다시 한번 가문의 잔혹한 그림자가 두 사람의 발밑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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