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설이 쥐고 있던 우산 끝자락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그 끝에 서린 은가 가문의 서슬 퍼런 결계 기운이 혜수의 이마를 향해 사납게 쏟아지던 찰나였다.
탁 하는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거친 숨결이 혜수의 뺨을 스쳤다.
주원이 혜수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단단한 등이 방패처럼 혜수의 시야를 가로막았고, 이내 묵직한 물리적 타격이 그의 척추를 타고 그대로 투사되었다.
“윽……!”
주원의 입술 사이로 짧고 묵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왼쪽 가슴께가 미친 듯이 뜨거워졌다. 얇은 셔츠 원단 위로 붉은 나비 모양의 낙인이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붉은 빛을 토해내며 요동쳤다. 혜수는 주원의 가슴에 뺨을 댄 채,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무섭게 박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우화 계약의 보이지 않는 선을 타고, 등 뒤를 찢어발기는 듯한 결계의 격통이 혜수의 척추로도 고스란히 복사되어 흘러들었다. 눈앞이 순간 하얗게 번쩍였다.
주원은 들이닥치는 격통에 무릎이 꺾이려는 것을 이 악물고 버텨냈다. 그의 전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원은 혜수를 감싸 안았던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제 등 뒤로 안전하게 대피시킨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빗물에 젖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은설을 향한 시선만큼은 맹수처럼 사나웠다.
“나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서점 안의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주원은 비틀거리는 걸음을 억누르며 은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그녀를 서점 문밖으로 밀쳐냈다.
“서주원, 네가 감히 나한테……!”
은설이 빗물 고인 마당으로 밀려나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주원은 그녀의 악에 받친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채, 서점의 육중한 목조 문을 닫아걸었다. 철컥, 둔탁한 쇠붙이 소리와 함께 걸쇠가 걸리는 순간, 서점 안은 세상을 집어삼킬 듯 쏟아지는 봄비 소리 속에 완벽히 고립되었다.
그와 동시에 한층 더 가혹한 징벌이 찾아왔다.
가문의 규율을 어기고 서로를 지키려 밀착했던 대가였다. 귓가에서 삐이- 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두 사람의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며 사지가 급격히 무거워지는 감각이 덮쳐왔다. 기혈이 급격히 쇠약해지고 있다는, 가문이 심어둔 저주의 잔인한 경고음이었다.
주원의 체온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내려앉았다. 그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문고리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혜수 역시 가슴을 옥죄는 질식감에 목을 움켜쥐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얼음 송곳이 찌르는 듯한 통증이 번졌다.
“하아, 하……”
혜수는 서점 벽에 등을 기대며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야가 흐릿한 와중에도 주원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턱끝에서는 여전히 붉은 피가 한 방울씩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두려움이 혜수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감싸 안았다. 주원이 다칠 때마다,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자신 역시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공포를 마주해야 한다는 현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7년 동안 억눌러왔던 방어기제가 그녀의 이성을 사납게 뒤흔들었다. 다가가면 죽는다. 그를 받아들이면 결국 서로를 파멸로 몰고 갈 뿐이다.
혜수는 가슴을 쥐어짜며 주원으로부터 서둘러 발걸음을 물러섰다. 그녀의 시선이 차갑게 어어붙었다.
“그만해.”
갈라진 목소리가 빗소리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줘, 주원아.”
주원의 상체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혜수를 바라보았다. 물기 어린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원망이 아니었다. 그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애달픔이었다.
“너만 없었으면 난 평온했어. 이 작은 서점에서, 비가 내리든 눈이 오든 아무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살 수 있었단 말이야. 왜 다시 나타나서 날 이렇게 흔들어 놓는 건데?”
혜수는 날카로운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처럼 가시 돋친 말들을 마구 퍼부었다. 상처받기 싫어서, 더 이상 고통스럽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비겁한 도망이었다. 그녀는 주원의 가슴에 새겨진 그 기괴한 나비 문양을 애써 외면하며 소리쳤다.
“네가 내 옆에 있을 때마다 난 숨도 제대로 못 쉬겠어. 네가 아픈 게 내 몸으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도 끔찍하고, 이러다 정말 둘 다 죽어버릴 것 같아서 무섭다고! 그러니까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독설이 서점 안을 난폭하게 휘돌았다. 하지만 주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혜수의 폭언을 몸으로 받아낼 뿐이었다.
우화 계약의 끈은 잔인하도록 정직했다. 혜수가 내뱉는 가시 돋친 말 뒤에 숨겨진 극도의 두려움과, 자신을 향한 밀쳐낼 수 없는 연민이 주원의 가슴속으로 여과 없이 흘러들었다. 그녀가 상처를 주려 할수록, 정작 그녀의 영혼이 슬픔으로 부서지고 있다는 감각이 주원의 심장을 실시간으로 난도질했다.
주원은 가슴을 쥐어짜며 비틀거렸다. 밀려드는 반동의 격통에 숨을 쉴 때마다 붉은 낙인이 살을 태우는 듯 타올랐다. 그는 혜수에게 닿아서 그녀가 더 큰 고통을 겪지 않도록, 스스로 거리를 두기 위해 돌아섰다.
주원은 떨리는 손으로 은설이 어지럽혀 놓은 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고서들을 하나씩 주워 올리는 그의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서각 소리와 빗소리만이 고요한 서점을 채웠다.
주원이 책장 구석,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틈새에 떨어져 있던 오래된 양장본 고서 한 권을 집어 올렸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장을 털어내려던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 책장 구석, 누군가 급하게 휘갈겨 쓴 듯한 빛바랜 손글씨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죽음이 극에 달할 때 마음이 동하면 열쇠가 된다.’
주원의 손끝이 그 구절 위를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게 훑었다.
저주를 풀 수 있는 열쇠. 가문이 심어둔 이 잔혹한 수명 단축의 굴레를 끊어낼 유일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구절이었다. 하지만 그 열쇠를 쥐기 위해서는 죽음에 이를 만큼의 치명적인 반동을 견뎌내야 하며, 무엇보다 서로의 마음이 티 없이 온전하게 하나로 맞물려야 했다. 지금 자신을 밀어내기 바쁜 혜수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의 가슴속에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는 듯했다.
혜수는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 주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젖은 셔츠 너머로 희미하게 붉은빛을 뿜어내는 나비 문양. 그것이 자신을 대신해 고통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밀어내야만 하는 현실이 그녀를 옥죄었다. 눈앞이 뜨거운 눈물로 흐려졌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끝에서 툭, 떨어졌다.
주원이 책을 가만히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혜수를 향해 걸어왔다.
“오지 마…….”
혜수가 급히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주원의 걸음이 더 빨랐다.
주원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생명력 소모의 반동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혜수의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뻗었다. 그의 차갑고도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이 혜수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아윽……”
살갗이 닿는 순간, 두 사람의 몸에 강한 전류가 흐르듯 공명이 일어났다.
그 찰나, 혜수의 이성이 멈춰 섰다.
주원의 손끝을 통해 그의 영혼 깊은 곳에 도사린 감정들이 해일처럼 그녀의 가슴속으로 들이닥쳤다. 그것은 단 한 줌의 원망도 섞이지 않은, 오직 혜수를 향한 지독한 갈망과 애절함이었다.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그녀만큼은 살리고 싶다는 처절한 헌신, 그리고 혜수가 자신을 밀어낼 때마다 그의 영혼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리는 깊은 슬픔이 정량화된 수치처럼 혜수의 심장에 직격했다.
‘아…….’
혜수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자신이 뱉어낸 모진 독설들이 정작 주원의 영혼을 어떻게 난도질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향한 그의 심장이 얼마나 터질 기세로 뛰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것은 거부하려야 거부할 수 없는 정서적 대폭발이었다. 혜수 역시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의 슬픔과 사랑이 같은 주파수로 공명하며 서점 안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혜수야.”
주원이 혜수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애달픈 갈망이 가득 차 있었다.
“나한테 어떤 폭언을 해도 좋아. 날 원망하고, 밀어내고, 미워해도 다 받아들일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그의 손가락이 혜수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내었다.
“내 눈을 피해서 도망쳐 숨지만 마. 네가 없는 어둠 속에서 홀로 죽어가는 것보다, 네 옆에서 이 고통을 온전히 느끼며 숨 쉬는 게 나한테는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니까.”
그의 애절한 눈빛이 혜수의 가슴 깊은 곳에 박혀들었다. 하지만 다가올수록 더욱 거세게 가해지는 가문의 거부 제약이 혜수의 호흡을 다시금 가로막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통증에 혜수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며 주원의 가슴을 거칠게 밀쳐냈다.
“싫어…… 싫단 말이야!”
혜수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주원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 서점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문을 향해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도망쳐야 했다. 이 지독하고도 달콤한 고통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정말로 주원의 목숨을 제 손으로 앗아갈 것만 같았다.
뒷문 고리를 향해 혜수의 손이 뻗어 나간 그 찰나였다.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주원의 강인한 팔이 뒤에서 혜수의 허리를 단단하게 낚아챘다.
“앗……!”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려던 혜수의 신체가 주원의 강한 힘에 밀려 중심을 잃었다. 주원은 그녀를 붙잡고 그대로 서점 안쪽에 놓인 간이 침대 위로 몸을 눕히듯 밀어붙였다.
침대 매트리스가 두 사람의 무게를 받아내며 푹신하게 가라앉았다. 주원의 넓은 어깨가 혜수의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았고, 이내 그의 단단한 몸이 혜수의 위를 덮치듯 완벽하게 밀착해 왔다.
지척이었다.
두 사람의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서로의 더운 숨결이 지독하게 얽혀들었다. 주원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차가운 빗방울이 혜수의 목덜미에 떨어져 번졌지만, 그보다 두 사람의 가슴 사이에서 터질 듯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서점 전반을 지배했다.
키스하기 직전의 지척에서 멈춰 선 주원의 깊은 눈동자가 혜수의 입술을, 그리고 흔들리는 두 눈을 집요하게 옭아맸다. 거부할 수 없는 공명의 주파수가 두 사람의 영혼을 가장 잔혹하고도 아름답게 조여오기 시작했다.
창밖의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두 사람의 숨결이 닿은 경계선 위로 차가운 봄비의 냄새가 짙게 고여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