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틈새로 번져 나간 붉은 낙인이 주원의 회색 코트 자락을 무겁게 적셔 가고 있었다.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지는 핏방울은 마치 빗소리와 박자를 맞추듯 기묘한 리듬을 그렸다.
혜수의 시선이 제 손가락 끝에 멎었다. 조금 전 책장 모서리에 긁혀 피가 배어 나오던 상처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살을 째는 듯하던 아릿한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대신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오한이 들이쳤다. 떨리는 숨결을 뱉어내며 주원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진 손을 응시하던 혜수가 참지 못하고 한 걸음 내디뎠다.
"너, 손 꺼내 봐."
목소리가 잘게 갈라졌다. 주원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입가에 걸린 살가운 미소는 박제된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혜수가 그의 침묵을 찢듯 다가가 주원의 성치 않은 오른손을 억세게 잡아챘다.
"……!"
손끝이 닿는 순간, 혜수의 척추를 타고 소름 끼치는 냉기가 수직으로 상승했다. 인간의 체온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얼음장 같은 온기였다. 아니, 온기라는 단어조차 사치스러울 정도의 살을 에는 듯한 빙한(氷寒)이었다.
동시에 혜수의 심장박동이 기묘하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제 가슴속에서 뛰는 심박이 아니라, 맞잡은 주원의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그의 심장 소리였다.
쿵. …… 쿵. …… 쿵.
마치 곧 멈춰 설 시계태엽처럼, 주원의 심박수는 위험 수준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우화 계약의 공명 반응이 폭주하고 있었다. 주원의 몸이 혜수가 느껴야 할 거부 제약의 반동을 모조리 흡수하면서, 그의 맥박이 기괴하게 가라앉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이게 무슨……."
혜수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잡은 손을 놓으려 힘을 주었지만, 주원은 오히려 손가락 마디마디를 얽어쥐며 그녀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의 손아귀 힘은 얼어붙어 가는 육신과 달리 지독할 정도로 단단했다.
"혜수야."
낮게 낮춰진 주원의 목소리가 서점 안의 습한 공기를 갈랐다. 그의 숨결마저 하얗게 서려 흐려지는 듯했다.
"놓아, 서주원. 너 지금 몸이 이상해. 당장 이거 놓으라고!"
"안 놓아."
주원은 혜수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7년 전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고 믿었던 그날의 눈빛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웠으며, 동시에 투명했다.
"7년 동안."
주원의 엄지손가락이 혜수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얼음 같은 감촉이었으나, 그 안에는 뼈를 깎는 듯한 열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어. 네가 숨 쉬는 소리, 네가 아파하던 밤의 빗소리까지…… 전부 다 내 안에 살고 있었어."
"거짓말하지 마. 날 버린 건 너야. 가문의 상속권을 택해서 날 비참하게 만든 건……!"
혜수가 악에 받쳐 쏘아붙였지만, 주원의 손가락은 더욱 치밀하게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얽혔다. 도망치려 발버둥 칠수록 그의 깊은 눈 속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갈증 어린 그의 시선이 혜수의 입술에 머물렀다. 혜수의 회피형 방어기제가 단단한 껍질을 깨고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밀어내야 하는데, 이 손을 놓으면 이 남자가 그대로 바스러져 사라질 것만 같은 기묘한 공포가 그녀를 지배했다.
서점 구석에 서 있던 민우형이 무거운 한숨을 쉬며 약차가 담긴 잔을 내려놓으려던 찰나였다.
부아아아앙!
우경서점의 평온한 빗소리를 깨부수며, 고요한 청우동 골목길을 찢는 듯한 요란한 배기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타이어가 젖은 아스팔트를 긁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새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서점 유리창 바로 앞에 급제동했다. 헤드라이트의 강렬한 상향등이 서점의 어두운 목조 내부를 잔인하게 가르고 들어왔다.
차 문이 열리고, 빗방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증발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보랏빛 양산을 든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은가의 가문 비술로 만들어진 결계 우산이었다. 우산 주변 반경 1미터 안으로는 단 한 방울의 봄비도 침범하지 못했다. 은가의 적통이자 차기 가주 후보, 은 설이었다.
또각, 또각.
명품 구두의 굽 소리가 서점 앞 자갈밭을 밟으며 다가왔다. 서점 문이 거칠게 열리고, 차가운 바람과 함께 은설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우산을 가볍게 털며 서점 내부를 멸시 어린 눈빛으로 훑어내렸다.
"여전하네. 이런 곰팡이 냄새 나는 구석진 곳에서 책 먼지나 먹고 살다니."
은설의 날카로운 시선이 혜수에게 꽂혔다. 입가에 걸린 오만한 미소는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민혜수. 가문에서 쫓겨난 방계 주제에,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주원 오빠 옆에 붙어 있는 거야? 7년 전에 그렇게 짓밟혔으면 배운 게 있어야지."
은설은 들고 있던 우산 끝으로 서점 바닥에 놓인 시집 몇 권을 툭툭 쳐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젖은 구두 굽으로 떨어진 책장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이런 쓰레기 같은 책들을 파는 곳이 네 요람이자 무덤이구나. 비참하기도 해라."
혜수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모멸감과 해묵은 상처가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대꾸할 말조차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혜수의 모습을 보며, 은설은 승리감에 도취한 듯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그 오만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원이 천천히 혜수의 손을 놓고 걸어 나갔다. 은설의 눈빛에 기대감이 서렸다. 마침내 주원이 제 손을 잡아줄 것이라 믿는 눈치였다. 그러나 주원의 걸음은 은설의 앞이 아닌, 혜수의 발밑에서 멈추었다.
스르륵.
주원이 무릎을 꿇었다.
가문에서 신성시되는 은가의 가장 고귀한 혈통이자,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서주원이 한낱 방계에 불과한 혜수의 발밑에 주저앉은 것이었다.
은설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주원은 은설의 날카로운 비명 같은 질문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는 자신의 품에서 깨끗하게 접힌 실크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비에 젖고 먼지가 묻은 혜수의 구두를 조심스럽게,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유리구두를 다루듯 정성스레 닦아내기 시작했다.
"더러운 물이 튀었네."
주원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행동은 지극히 공손했다. 그는 가문의 여왕처럼 군림하는 은설을 철저히 투명인간 취급하며, 오직 혜수의 발끝만을 바라보았다.
"내가 닦아줄게, 혜수야. 넌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돼."
"서주원!"
은설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높아졌다. 가문에 대한 배신이자,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은가의 천재라 불리는 남자가 밑바닥 방계의 구두나 닦는 종복을 자처하다니. 신분 반전의 극적인 대비 속에서 은설의 자존심은 갈가리 찢겨 나갔다.
혜수 역시 당혹감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주원의 고개 숙인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모든 존엄을 내려놓았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구두를 모두 닦아낸 주원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혜수의 앞을 커다란 몸으로 가로막으며 은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방금 전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서늘한 살기만이 서려 있었다.
"은설."
주원의 목소리가 영하의 공기처럼 얼어붙었다.
"내가 가문으로 돌아가 위원회와 협상하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인 건, 오직 혜수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 미쳤어? 저년은 그냥 방계일 뿐이야! 가문의 번식을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입 닥쳐."
주원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터지며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극도로 낮아진 체온과 폭주하는 공명 반응을 억누르느라 그의 육신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하지만 그는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이 은설을 압박했다.
"한 번만 더 혜수의 몸에 손대거나, 이 서점을 더럽히면…… 내가 가문을 상대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너희는 상상조차 못 할 거다."
은설의 눈동자가 분노와 질투로 뒤틀렸다. 주원의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그녀는 주원이 혜수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 무리한 주술을 감당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 어디 끝까지 잘해봐."
은설이 이성을 잃고 소리치며 들고 있던 결계 우산을 높이 치켜들었다. 우산 끝에 서린 푸른빛의 마력이 혜수를 향해 매섭게 내리꽂혔다.
"민혜수, 너만 없으면 돼!"
"혜수야!"
주원이 혜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혜수를 뒤에서 강하게 끌어안는 순간, 은설의 결계 우산이 주원의 넓은 등짝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퍽!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혜수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주원의 품에 안긴 혜수는 아무런 물리적 충격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7년 동안 잠들어 있던 붉은 나비 모양의 성흔이 동시에 피어오르며 강렬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낙인의 빛이 두 사람의 심장을 관통하며 타오르는 통증을 유발했다. 맞닿은 살결을 타고 흐르는 건, 피할 수 없는 파멸의 시작이었다.
창밖의 빗소리가 더욱 세차게 울부짖는 가운데, 혜수의 귓가에 주원의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가로등 불빛이 꺼진 서점의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아……!"
짧은 신음과 함께 주원의 고개가 혜수의 어깨 위로 무겁게 꺾였다. 그가 혜수를 품에 안은 채 서서히 무릎을 꿇자, 그녀의 몸도 함께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주원의 넓은 등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혜수의 손이 본능적으로 그의 등을 감싸 안았을 때, 손끝에 닿은 것은 옷을 뚫고 나올 듯한 기이한 열기였다. 얼음장처럼 차갑던 그의 체온이, 타격을 받은 부위에서부터 흡사 불덩이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모순된 두 개의 온도가 주원의 육신 안에서 사납게 충돌하는 중이었다.
"오빠, 그만해! 대체 왜 저런 기집애를 위해서……!"
은설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제 타격이 주원에게 고스란히 박힌 것을 보았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걱정보다 질투와 굴욕감이 앞서 있었다. 은설은 다시 한번 우산을 치켜들려 했다. 우산 살 끝으로 서슬 퍼런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 손 거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서점 구석에서 조용히 상황을 관찰하던 민우형이 마침내 움직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한의사 특유의 정적이고 침착한 궤적을 그렸지만, 은설의 앞을 막아서는 기세만큼은 서늘했다. 우형은 은설의 결계 우산 끝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이곳 청우동은 본가의 결계 관할 구역 외곽입니다. 본가의 공식적인 허락 없이 방계 거주지에서 사적인 비술을 남용해 인명을 해치려 한 사실이 위원회에 보고된다면, 차기 가주 후보로서의 가산도 그리 무사하진 못할 텐데요."
"하, 네가 감히 나를 협박해? 한낱 약쟁이 주제에!"
"협박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우형이 턱끝으로 서점 창가 쪽에 놓인 작은 화분을 가리켰다. 화분 속 푸른 잎사귀를 가진 '청우초'가 자그르르 소리를 내며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가벼운 접촉에도 반응하지 않던 잎사귀들이, 은설이 발산한 마력의 파동에 공명하여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은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은가의 비술이 사용되었다는 지울 수 없는 물리적 증거였다.
은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은빛으로 빛나는 청우초의 잎사귀는 가문의 규율을 어긴 증좌가 되어 그녀의 목을 죌 수 있었다. 그녀는 분노로 입술을 짓씹으며 치켜들었던 우산을 천천히 내렸다.
"좋아. 이번 한 번은 그냥 물러나 줄게."
은설이 혜수를 향해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주원, 네가 저 계집의 반동을 언제까지 대신 짊어질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네 스스로 심장을 갉아먹어 가며 저지르는 그 미련한 짓이, 결국 저 계집의 손에 널 죽게 만들 테니까."
독설을 내뱉은 은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점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새빨간 스포츠카가 빗길을 난폭하게 찢으며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점 안에는 다시금 무거운 빗소리만이 들어찼다.
"주원아, 정신 차려 봐. 서주원……!"
혜수가 주원의 어깨를 흔들었다. 주원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은 이미 핏기가 가셔 하얗게 질려 있었고, 턱끝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가 혜수의 셔츠깃을 더럽혔다.
"괜찮아……."
주원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감추듯, 젖은 코트 자락을 여미며 몸을 웅크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빗물과 땀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은 그의 셔츠 너머로 기이한 형상이 비쳤다.
주원의 왼쪽 가슴께, 얇은 셔츠 원단 아래로 붉은 나비 모양의 문양이 기괴하게 박동하며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흉터가 아니었다. 혜수가 고통을 느낄 때마다, 그리고 가문의 거부 제약이 작동할 때마다 주원의 생명력을 실시간으로 갉아먹는 잔혹한 계약의 성흔이었다.
"그거…… 뭐야?"
혜수의 손가락이 주원의 가슴께를 향해 뻗어 나갔다. 닿기도 전에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7년 전, 그가 가문의 상속권을 택해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던 그 오랜 오해의 벽 뒤편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진실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주원은 다급하게 혜수의 손을 붙잡아 제 가슴에서 멀어지게 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혜수를 바라보는 눈동자만큼은 애달프도록 뜨거웠다.
"혜수야, 보지 마……."
그가 힘없이 읖조리며 혜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두 사람을 가둔 서점의 천장 위로 밤새 흐느끼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릴 때마다 두 사람의 심장은 서로의 고통을 나누어 가지며 잔인하게 공명했고, 진실을 감추려는 그의 숨결은 차가운 빗소리 속으로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