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수가 발을 뒤로 빼는 순간, 주원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틔어 나왔다. 동시에 혜수의 가슴 정중앙에 거대한 바늘이 가차 없이 꽂히는 듯한 격통이 시작되었다. 7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오감의 통로가 봄비의 가혹한 조율 아래 강제로 열린 탓이었다. 숨을 들이쉴 틈도 없이 폐부를 찔러오는 통증에 혜수의 시야가 하얗게 바래 갔다. 다리의 힘이 스르륵 풀리며 차가운 서점 바닥을 향해 몸이 무너져 내렸다.
"혜수야!"
주원이 찰나의 순간에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그의 단단한 팔이 추락하던 그녀의 어깨와 무릎 뒤편을 부드럽고도 신속하게 바쳐 안았다.
쿵, 하고 그의 가슴과 혜수의 뺨바닥이 맞닿았다. 옷자락 너머로 전해지는 주원의 심장 고동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주원은 혜수를 소중한 유리그릇 다루듯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서점 한구석에 놓인 낡은 가죽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소파에 그녀를 눕히는 동안에도 주원의 손끝은 혜수의 소맷자락을 놓지 못했다. 맞닿은 손가락 끝, 얇은 살가죽을 통해 혜수의 몸 서린 차가운 서리와 공포가 주원의 온몸으로 전율하듯 전도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온도의 전이가 아니었다. 뼈마디를 얼려버릴 것 같은 한빙의 기운과, 가문에서 심어둔 거부 제약의 날카로운 가시가 주원의 혈관을 타고 역류했다.
"하윽……."
주원의 턱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금니를 악물어 신음을 삼켰지만, 혜수의 뺨에 닿은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질려가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혜수의 심장이 공포로 수축할 때마다, 주원의 가슴속 성흔은 그 고통의 배가 되는 반동을 우직하게 흡수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린 우경서점 안에는 오직 서점 외벽을 두드리는 거친 봄비 소리와, 두 사람의 얽힌 거친 숨소리만이 고여 있을 뿐이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혜수는 감겨 있던 눈꺼풀을 느리게 밀어 올렸다. 낡은 천장의 나무 대들보가 시야에 들어왔고, 코끝에는 오래된 책 먼지와 눅눅한 빗물 냄새가 섞여 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짙게 다가오는, 정갈하고도 서늘한 침향(沈香) 냄새.
그녀는 자신이 주원의 단단한 품 안에 반쯤 안긴 채 소파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원은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제 겉옷을 혜수의 어깨 위로 덮어준 채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혜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원의 가슴을 밀쳐내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7년 전의 상처, 그리고 다가갈수록 서로를 파멸로 몰고 가는 이 잔혹한 계약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온몸을 지배했다.
"놓아, 이거 놓으라고……."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가 그에게서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순간이었다.
쿵.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거운 추가 떨어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심장이 좌우로 찢겨 나가는 듯한 반동의 고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시각적 통증이 눈앞을 가려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주원에게서 한 걸음 멀어질 때마다, 가문의 결계가 내리는 징벌의 게이지가 혜수의 영혼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억……."
혜수는 가슴을 쥐어짜며 다시 소파 위로 꺾여 누웠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서로를 향한 마음의 거리가 벌어지려 할수록 계약은 더 잔인한 이빨을 드러냈다.
"움직이지 마, 혜수야. 제발 부디…… 가만히 있어."
주원의 목소리에는 애원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는 밀려나는 혜수를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느끼는 통증의 궤도를 제 몸으로 돌리기 위해, 제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꽉 가로쥐며 스스로의 심장박동을 억제할 뿐이었다. 그의 목덜미를 따라 식은땀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려 셔츠 깃을 적셨다.
"네가 나를 거부하고 밀어낼 때마다, 네 심장이 먼저 상해."
주원은 핏기가 가신 입술로 겨우 말을 이어 붙였다.
"그러니까 차라리 나를 미워하더라도, 내 곁에서 미워해. 도망치지만 마라."
그의 절박한 눈빛이 혜수의 흔들리는 시선과 얽혔다. 도망치고 싶은 방어기제와, 그의 고통을 직감하는 영혼의 공명이 거칠게 충돌하며 혜수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
그때, 서점의 낡은 목조 문이 거칠게 열리며 맑은 풍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받쳐 든 채,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들어선 이는 민우형이었다. 그의 손에는 늘 들고 다니는 침구 가방과 함께, 한의원에서 달여 온 따뜻한 약차 상자가 들려 있었다.
"혜수야!"
우형의 시선이 소파에 누워 신음하는 혜수와, 그 곁을 지키고 선 주원에게로 빠르게 꽂혔다.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아졌다. 우형은 한 걸음에 다가와 주원의 손길을 가볍게 쳐내고는, 혜수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맥이 완전히 뒤엉켰어. 기혈이 역류하고 있어."
우형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서점 구석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았다. 우형이 보냈던 '청우초' 화분이었다. 평소에는 푸른빛을 띠던 넓적한 잎사귀들이, 지금은 마치 살아 있는 촉수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은빛으로 싸늘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보이지? 은가 가문의 피가 이 서점 안에 가득 찬 거야."
우형이 청우초의 은빛 잎사귀를 가리키며 주원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두 사람의 피가 같은 주파수로 공명하고 있어. 7년 전 그 지옥 같은 계약이 다시 깨어난 거라고. 서주원, 네가 여기 나타나면 혜수의 수명이 어떻게 깎여 나갈지 몰라서 이래?"
주원은 우형의 비난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반박하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숨을 몰아쉬는 혜수의 뺨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내가 감당합니다."
주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반동은 내가 다 안고 갈 겁니다. 혜수에게는 한 줌의 통증도 가지 않게 할 겁니다."
"말은 쉽지."
우형이 코방귀를 끼며 주원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아 맥을 짚었다. 맥을 짚은 우형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주원의 맥박은 이미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다가도, 일순간 완전히 멈춘 듯 고요해지는 기괴한 불협화음. 그것은 혜수가 느껴야 할 거부 제약의 반동을 제 위독한 성흔으로 전부 빨아들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우형은 복잡한 눈빛으로 주원을 바라보았다. 미련할 정도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이 남자의 헌신을, 혜수는 아직 다 알지 못하고 있었다.
***
"다들 나가 줘."
소파에서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혜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뱉어냈다. 그녀의 시선은 주원의 얼굴을 비껴가 바닥의 어느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빠도, 너도…… 전부 나가. 나 혼자 있을래."
"혜수야, 너 지금 혼자 있으면 위험해."
우형이 걱정스레 만류하려 했으나, 혜수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서서히 차올라 오는 감정의 범람을 감당할 수 없었다. 주원이 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았고, 동시에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7년 전의 애틋함이 되살아나 스스로를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나가라고 했잖아!"
혜수가 소리를 지르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연필꽂이를 거칠게 밀쳐냈다. 투두둑, 소리를 내며 필기구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 와중에 혜수가 모질게 굴려 부러뜨린 흑단 연필의 날카롭고 뾰족한 단면이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검지손가락을 길게 굵고 지나갔다.
"아……!"
붉은 피 한 방울이 혜수의 손가락 끝에서 맺혀 나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정작 비명을 지른 것은 혜수가 아니었다.
"윽……!"
가슴을 쥐어짜며 바닥으로 무릎을 꺾은 것은 주원이었다. 피는 혜수의 손가락에서 났는데, 칼날로 살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스러운 비명은 주원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우화 계약의 공유 법칙. 하지만 주원이 스스로에게 걸어둔 '반동 독식'의 성흔 탓에, 혜수가 느껴야 할 찰과상의 아픔은 백 배, 천 배로 증폭되어 주원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주원은 바닥을 짚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닳아 없어질 정도로 힘을 주며 고통을 참아내려 했다. 그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고, 입술 사이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주원아!"
혜수가 놀라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 걸음 다가서려 하자, 주원은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제지했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혜수야."
주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문에서 자신들을 감시하는 보이지 않는 눈들을 떠올렸다. 은가 가문의 결계는 두 사람의 감응이 깊어질수록 더 가혹한 형벌을 내릴 터였다. 그는 이 잔인한 고통의 사슬을 혜수가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원은 우형의 눈을 피해, 바닥에 떨어진 연필꽂이 조각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의 파편을 남모르게 손바닥 안으로 감추어 쥐었다. 그리고 혜수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제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그 날카로운 단면 위로 깊숙이 그어내렸다.
서걱.
살점이 갈라지는 차가운 감각과 함께 주원의 손가락에서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졌다.
"……!"
그 순간, 혜수의 손가락 끝을 지배하던 아릿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사라졌다.
주원이 제 몸에 더 큰 상처를 스스로 내어, 계약의 공명 주파수를 강제로 자신 쪽으로 쏠리게 만든 것이었다. 고통의 총량을 제 육신으로 완전히 끌어와 독식해 버리는, 가혹하고도 비밀스러운 주술의 발동이었다. 주원의 고의적인 자해 덕분에 혜수는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은 채 평온을 되찾았다.
"이제…… 안 아프지?"
주원은 피가 흐르는 제 오른손을 등 뒤로 슬그머니 감추며, 혜수를 향해 평온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지독하리만치 차분해서, 오히려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혜수는 제 손가락 끝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통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주원을 바라보았다.
"너……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비가 와서…… 잠깐 우리 감각이 엉켰나 봐."
주원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혜수의 시선을 피하며 감추었던 오른손을 주먹 쥐어 코트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숨기려 할수록 진실은 틈새를 타고 흘러나오는 법이었다.
주머니 속으로 사라지던 주원의 손가락바닥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코트 자락을 검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주먹을 쥔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비정상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점 안의 공기를 가득 채우던 따스한 온기가 주원의 주변에서부터 급격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그의 체온이 얼음장처럼 비정상적으로 급락하는 것을, 혜수의 예민한 감각은 놓치지 않았다.
혜수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원의 감추어진 주머니 속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서점의 나무 바닥 위로 툭, 툭 떨어지며 붉은 얼룩을 남겼다.
창밖의 빗소리는 더욱 거세어져만 가고, 물기 머금은 바람이 두 사람의 발밑을 차갑게 적셔 가고 있었다. 봄비가 내리는 우경서점의 중심에서, 얼어붙은 시간은 다시금 파멸을 향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