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창틀에 고인 빗물이 무거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낙수 소리가 고요한 서점 안을 나지막이 흔들 때마다, 민혜수의 손끝은 책 표지 위에 머문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태백산맥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앉은 청우동은 일 년 중 반 이상이 비에 젖어 있는 축축한 소도시다. 벽면을 가득 채운 오래된 목조 책장들 사이로 눅눅한 종이 냄새와 오래된 나무 향이 뒤섞여 밀려들었다.

창밖의 하늘은 먹을 갈아놓은 듯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구름이 산등성이를 집어삼킬 듯 내려앉는 순간, 혜수의 가슴 한가운데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윽……."

나지막한 신음이 얇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혜수는 들고 있던 먼지털이를 놓치고 한 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얇고 날카로운 바늘로 사정없이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허가 된 벌판에 찬 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가슴 안쪽이 시려 왔다.

이 통증은 낯설지 않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이 이질적인 압박감은 기상대에서도 예측하지 못한 비가 쏟아질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날씨를 지배하고 인간의 생을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가문, ‘은가’. 그들이 쳐놓은 보이지 않는 결계와 비술적 감시망이 청우동의 습한 공기를 타고 혜수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은가의 감시에서, 그리고 그 가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 외딴 서점에 스스로를 가두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비가 내릴 때마다 뼈마디를 파고드는 이 가혹한 감각은 그녀가 여전히 가문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혜수는 가 거친 숨을 내쉬며 책장에 몸을 기대었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닿아서야 겨우 흐트러진 정신이 아주 조금 돌아왔다.

타닥, 타다닥.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크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온 서점 안을 집어삼킬 듯이 거세어지는 그 순간, 정적을 깨고 입구의 문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딸랑-.

차가운 바깥바람이 열린 문틈으로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바람에 섞인 진한 물비린내 사이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이질적이고도 뜨거운 체온이 서점 안의 공기를 단숨에 뒤흔들었다.

혜수의 시선이 천천히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온몸으로 비를 맞고 걸어 들어온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던 검은 머리칼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주름 하나 없이 완벽하게 재단된 짙은 네이비색 수트 어깨 위로 빗물이 짙은 얼룩을 남기고 있었다.

서주원.

7년 전, 가문의 상속권을 쥐기 위해 자신을 가차 없이 내팽개치고 차갑게 돌아섰던 남자. 혜수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끝내 파멸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수트 깃 사이로 드러난 그의 목덜미는 거친 호흡으로 들썩였다. 주원의 주위로 비의 냉기와 그의 몸이 발산하는 뜨거운 열기가 부딪치며 미세한 아지랑이를 만들어냈다. 혜수는 숨을 들이쉬는 법조차 잊은 채 굳어버렸다. 그의 존재감이 서점의 좁은 공간을 터질 듯이 채워가고 있었다.

주원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벅, 벅, 젖은 구두가 오래된 목조 바닥을 디딜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혜수의 가슴속에 멈춰 있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격렬한 박동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긴장이나 두려움이 아니었다. 심장의 고동이 주원의 걸음걸이와 완벽하게 싱크를 맞추며 공명하고 있었다.

주원이 세 걸음째 다가왔을 때, 흔들리는 그의 셔츠 깃 너머로 혜수의 시선이 멈췄다. 빗물에 젖어 살 속이 비쳐 보이는 얇은 흰색 셔츠 칼라 아래, 기괴할 정도로 붉고 선명한 문양이 얼핏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불에 타들어 간 듯한 나비 모양의 흉터였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그의 쇄골 언저리를 기어오르는 듯한 붉은 성흔. 7년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이질적이고 불길한 낙인이었다. 주원은 혜수의 시선이 닿은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다급하게 젖은 손으로 셔츠 칼라를 추스르며 흉터를 가려버렸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혜수야."

갈라진 목소리가 비좁은 공기를 가르고 혜수의 귓가에 닿았다. 7년 만에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이전과 달랐다.

혜수는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려 했다. 날카로운 책장 모서리가 그녀의 허리를 아프게 찔렀다. 7년 전, 은가의 냉혹한 결계 속에서 그가 자신에게 내뱉었던 모진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 같은 방계 계집이 내 앞길을 막아서게 둘 순 없어. 그러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 차가운 폭언과 경멸 가득한 눈빛은 7년 동안 혜수의 영혼을 갉아먹는 칼날이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오만하고 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조롱하러 왔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침내 마주한 주원의 눈동자는 혜수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 속에는 분노도, 우월감도 없었다. 오직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한 처절한 슬픔과,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지독한 그리움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혜수의 가슴속으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아……!"

혜수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비장한 슬픔과 숨이 막힐 듯한 애틋함. 그것은 혜수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서주원의 심장에서 뻗어 나와 혜수의 영혼으로 백퍼센트 동기화된, 그의 진짜 감정이었다.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두 사람의 오감과 통증, 감정이 완벽하게 하나로 묶이는 ‘우화 계약’. 7년 동안 잠들어 있던 그 잔혹한 저주가, 청우동의 빗소리와 함께 다시금 깨어난 것이다.

주원의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갈망과 슬픔이 혜수의 모세혈관을 타고 흐르며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주원은 혜수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눈동자를 크게 흔들었다.

"혜수야, 제발……."

그의 목소리가 젖은 빗소리에 섞여 들어왔다. 7년 전, 얼음처럼 차갑게 돌아서며 자신을 밀어냈던 그 서주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오직 상처받은 짐승처럼 애처롭게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주원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빗물에 젖어 차가울 것이 분명한 그의 손가락 끝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배회했다. 혜수의 뺨에 닿을 듯 말 듯, 아주 미세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선 그의 손끝이 심하게 흔들렸다. 혜수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고 싶어 하는, 차마 숨기지 못한 애틋함이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 지독한 다정함과 갈망이 공명을 타고 혜수의 심장에 박혔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혜수의 살결에 닿기도 전에, 두 사람의 영혼은 이미 서로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주원의 눈가에 맺힌 것이 빗물인지, 아니면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일그러진 미소 속에 담긴 진심만큼은 오해의 장벽을 넘어 혜수의 가슴을 아프게 두드렸다.

그 애틋함이 두려웠다. 다가갈수록 서로를 파괴하고 생명을 갉아먹는 은가의 저주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혜수는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상처받기 전에 자신을 고립시키려는 회피형 방어기제가 그녀의 이성을 흔들었다.

"……오지 마."

혜수는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뻗어오는 그의 손을 피해 한 발자국 뒤로 발을 뺐다.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윽……!"

주원의 입술 사이로 짧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하며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혜수의 가슴속 깊은 곳에 거대한 대못이 사정없이 박히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날카로운 바늘 수천 개가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시야가 거칠게 흔들리며 주변의 풍경이 흐릿하게 멀어졌다.

우화 계약의 통증 공유.

그가 느끼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 실시간으로 혜수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다리가 풀린 혜수의 몸이 그대로 바닥을 향해 쓰러져 내렸다.

어둠이 밀려드는 시야의 끝에서, 자신보다 더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뻗어오는 주원의 처절한 눈동자가 보였다.

창밖의 빗소리는 더욱 요란하게 서점을 두드리고 있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짧은 찰나, 귓가를 때리는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마음의 벽이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 속에서, 혜수는 눈을 감았다. 차가운 목조 바닥에 부딪힐 준비를 하던 그녀의 몸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멈춰 섰다.

"……!"

단단하고 뜨거운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비에 젖어 서늘하면서도, 동시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뜨거운 체온이 혜수의 얇은 셔츠를 뚫고 쏟아져 들어왔다. 서주원이었다.

그의 품에 닿는 순간, 두 사람을 옭아맨 우화 계약의 보이지 않는 사슬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파지직, 뇌리를 스치는 불꽃 같은 통증에 혜수의 손가락이 거칠게 오그라들었다. 살을 맞대는 스킨십은 가문의 제약을 자극하는 가장 치명적인 방화쇠였다. 들이쉬는 숨결마다 허파가 얼어붙는 것 같은 빙결의 고통이 밀려와 혜수는 주원의 어깨를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녀의 온몸을 찢어발기던 그 가혹한 통증이,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주원의 몸 쪽으로 쏠려 가기 시작했다. 주원의 가슴팍에 새겨진 붉은 나비 문양이 그의 얇은 흰 셔츠 너머로 붉고 선명한 빛을 뿜어냈다. 마치 살아 있는 낙인이 주원의 살점을 갉아먹으며 피를 갈구하는 형국이었다.

"아, 윽……!"

주원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목줄기에 푸른 힘줄이 돋아나고, 혜수를 안은 그의 팔이 비정상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혜수는 멍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숨통을 조이던 고통의 태풍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 틈새로 붉은 핏방울이 배어 나와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대신 가져간 것이다.

가문이 내린 형벌의 대가를, 닿는 순간 밀려드는 사멸의 반동을, 서주원이 홀로 온전히 뒤집어쓰고 있었다.

"너…… 왜……."

혜수의 목소리가 젖은 낙엽처럼 흔들렸다. 7년 전 자신을 버리고 가문의 권력을 택했던 냉혈한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고통의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간 남자의 처절한 얼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주원은 피가 흐르는 입술을 비틀어 정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무모하고도 헌신적인 미소가 혜수의 가슴을 더 아프게 후벼 팠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혜수의 뺨을 미세하게 스치듯 쓸어내렸다. 손끝에 닿는 그녀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다는 듯, 그의 손길은 지독하리만치 조심스럽고 애틋했다.

"괜찮아."

주원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지워질 것처럼 낮고 위태로웠다.

"내가 다 감당할 테니까, 너는 아프지 마."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지독한 슬픔과 맹목적인 갈망이 공명을 타고 혜수의 영혼을 세차게 뒤흔들었다. 도망쳐야 한다고, 더 깊어지기 전에 이 남자를 밀어내고 문을 걸어 잠가야 한다고 그녀의 방어기제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주원의 눈동자에 담긴 처절한 진심을 마주한 순간, 혜수의 발끝은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였다.

서점 유리창을 때리던 봄비의 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잦아들었다. 자연적인 비가 그친 것이 아니었다. 대기 중의 습기가 일순간 얼어붙으며, 서점 안의 온도가 급격하게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쩍,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서점 입구의 유리문에 하얗고 날카로운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은가 가문의 추적자들.

그들의 차가운 기운이 청우동의 빗줄기를 타고 우경서점의 문턱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주원의 품안에서 혜수의 눈동자가 공포로 크게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서점 구석에 놓인 민우형의 화분 속 '청우초' 잎사귀가 가르릉 소리를 내며 은빛으로 빠르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가문의 기운에 반응하는 불길한 전조였다.

주원은 혜수를 제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안으며, 성에가 끼어가는 문밖의 어둠을 향해 살기 어린 시선을 던졌다.

잡아 쥔 주원의 손등 위로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하는 그 순간, 혜수는 그의 가슴속에서 멎어 가던 심장이 다시금 기괴한 속도로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다가오는 파멸을 알리는 경종이자, 결코 멈출 수 없는 잔혹한 무대의 시작이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