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웅, 쿠웅, 쿠웅!

그레이시어 성의 웅장한 돌벽이 아래서부터 거세게 요동쳤다. 지열 파이프가 비명을 지르는 마찰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문 바로 바깥, 광장을 뒤흔드는 강력한 마력 폭풍의 여파였다.

창유리가 잘게 떨리며 자글자글한 비명을 질렀고, 살구빛과 연분홍빛이 아스라이 섞여 있던 북부의 저녁 하늘은 이내 붉고 푸른 마력 불꽃으로 거칠게 찢겨 나갔다.

“무슨 일이지?”

에르하르트가 맹수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으로 늑대 귀를 쫑긋 세웠다. 그의 은빛 머리칼 사이로 삐죽 솟아오른 귀가 사방의 진동을 기민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레오니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커다란 등 뒤로 그녀를 완전히 숨겼다.

레오니는 에르하르트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을 꽉 쥔 채 창밖을 응시했다. 에르하르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화끈화끈한 온기가 레오니의 차갑던 손가락 끝을 부드럽게 녹여 내렸다. 방금 전까지 전신을 얼릴 듯이 찾아왔던 저체온증의 한기가 기적처럼 사그라드는 순간이었다.

‘뜨끈뜨끈해…….’

마치 갓 구워낸 말랑말랑한 커스터드 빵을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온기를 한가롭게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창밖의 광장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하얀 만년설이 두껍게 깔려 있던 그레이시어 성 앞 광장에는 수십 대의 마차와 함께, 번쩍이는 철갑을 두른 기사단이 기세등등하게 난입해 있었다. 그들이 치켜든 깃발 속에는 징그럽게 얽히고설킨 흑장미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벨몬트 자작……!”

수석 보좌관 르네가 한쪽 안경을 치켜올리며 이빨을 사납게 사려 물었다. 그의 단정한 이마에 핏대가 돋아났다.

성문 앞 벌판에 당도한 벨몬트 자작의 사병들은 무력을 과시하듯 마력 폭풍을 일으키며 대공가의 결계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있었다. 위협적인 마력의 파동이 성벽을 때릴 때마다, 지이잉 하는 불쾌한 파열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때였다. 대공성 내부의 깊은 지하에서부터 기묘한 진동이 다시 한번 대지를 타고 올라왔다.

‘어……?’

레오니의 귓가에 웅성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투명한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경고: 벨하르트 대공성 지하 지열 난방 기구의 일시적 압력 수치 급상승!] [지열 냉각석 표면의 미세한 크랙 발생률: 89%] [원인: 외부의 무차별적인 마력 충격으로 인한 마력 순환로 오작동.]

레오니의 연갈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대공성의 지열 시스템은 아주 미세하고 정교한 균형 위에 성립되어 있었다. 벨몬트 자작이 밖에서 쏘아 보내는 무식한 마력 파동이 결계를 흔들면서, 지하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 주던 냉각석에 과부하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지하의 열순환 구조가 꼬여 성 전체가 가마솥처럼 끓어오르거나 결계가 통째로 깨져 버릴지도 몰랐다.

“이 비열한 인간놈들이 감히 어디라고 발을 들이밀어!”

에르하르트가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의 눈동자가 흉포한 야수의 청록빛으로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창문을 깨고 뛰어내려 저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 순간, 성문 바깥에서 마력으로 증폭된 벨몬트 자작의 목소리가 온 영지에 고고하게 울려 퍼졌다.

“벨하르트 대공은 당장 응답하라!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괴수 수인들이 감히 황국의 고귀한 귀족 영애를 납치해 가두다니! 내 가여운 수양딸 레오니를 당장 내놓아라!”

벨몬트의 목소리는 한없이 애틋하고, 자식을 빼앗겨 피눈물을 흘리는 자애로운 아비의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불쌍한 아이가 저 흉포한 맹수들의 굴속에서 얼마나 두려움에 떨며 상처받고 있을지 생각하면 밤잠을 이룰 수가 없다! 벨하르트 대공가여, 황국의 법과 정의가 두렵지 않은가! 죄 없는 아이를 즉각 반환하고 대가를 치러라!”

그 목소리는 마법의 힘을 빌려 성 주변에 모여든 영지민들과 하인들의 귀에 똑똑히 박혀 들어갔다. 성문 근처에서 서성이던 영지민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강제로 데려온 건가?” “아무리 대공가라 해도 황국 귀족의 아이를 납치했다면 큰일인데…….” “저 불쌍한 꼬마 영애가 괴물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다면 어쩌지?”

여론이 요동치는 소리가 성벽 너머로 흘러들어왔다. 벨몬트 자작은 이 사태를 단순한 영지 분쟁이 아니라, ‘야만적인 수인 가문이 가냘픈 인간 아이를 납치해 잔혹하게 학대하는 사건’으로 프레임을 짜서 여론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의 비열하고 뻔뻔한 연극에 에르하르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뭐라는 거야, 저 쓰레기 새끼가……! 감히 누굴 납치했다는 거야? 지들이 학대해서 도망쳐 온 꼬맹이를 우리가 거둬 줬더니 어디서 개소리를 짖어대!”

에르하르트가 발톱을 길게 세우며 성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분노로 인해 그의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탁!

그때, 아주 가냘프고 작은 손 하나가 에르하르트의 펄펄 끓는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에르한 오라버니, 안 돼요.”

레오니였다.

그녀는 연분홍빛 드레스 자락을 꼼지락거리며 에르하르트의 앞을 야무지게 막아섰다. 올려다보는 레오니의 뺨은 솜사탕처럼 뽀얗고 말랑해 보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얼음판처럼 차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꼬맹이 너……! 저 녀석이 밖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저놈이 널 다시 데려가려고 수작 부리는 거잖아!”

에르하르트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레오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라버니가 지금 나가서 발톱을 세우고 으르렁거리면, 저 나쁜 인간이 바라는 대로 되는 거예요. ‘봐라, 저 흉포한 괴수들이 내 딸을 위협하고 나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라면서 더 크게 울어댈 테니까요.”

“그럼 어쩌라고! 그냥 저 도둑놈 말을 듣고만 있어?”

레오니는 대답 대신 조용히 허공을 향해 제 손가락을 까딱였다.

스르륵.

오직 레오니의 눈에만 보이는 투명한 ‘괴수 교감 장부’의 연산 시스템이 공중에 화려한 홀로그램처럼 펼쳐졌다. 장부의 검색창에 외부에 있는 벨몬트 자작의 이름을 입력하자, 그의 감정과 속내를 분석한 수치들이 실시간으로 갱신되며 붉은색 글씨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대상: 벨몬트 자작] [사기 의도: 99% (가식적인 피해자 연기 중)] [정신적 악의 수준: 극상 (레오니를 도구로 취급)] [진짜 목적: 대공가로부터 합의금 명목의 50,000골드 갈취 및 북부 철광산 이권 확보] [현재 스트레스: 15% (대공가가 폭력을 쓰기를 내심 기대하며 몹시 여유로움)]

‘5만 골드에 북부 철광산 이권이라니.’

레오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속에서 서늘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를 끔찍한 방에 가두고 밥도 제대로 주지 않으며 가스라이팅을 일삼던 전 양부가, 이제는 나를 빌미로 대공가의 재산을 뜯어낼 거대한 사기극을 기획하고 있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머릿속에서 완벽한 손익계산서가 도출되었다.

‘감히 내 몸값을 고작 그 정도로 후려치다니. 벨몬트 자작, 당신은 오늘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 할 거야.’

레오니는 제 작은 뺨을 감싸 쥐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르네를 바라보았다. 르네 역시 차가운 눈빛으로 레오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르네.”

“네, 아가씨.”

“제가 자작가에서 나올 때 챙겨두었던 그 상자, 기억하시나요?”

르네의 안경 너머로 예리한 빛이 스쳤다. 그는 레오니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린 듯, 입가에 엷고 영리한 미소를 띠었다.

“물론입니다. 벨몬트 자작가가 숨기려 했던 그 ‘지출 내역서’와 이중 위조 장부들이 보관된 서류 상자 말씀이시군요. 아주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걸 지금 가져다주세요. 그리고 성문을 열어 주세요.”

“뭐? 미쳤어, 꼬맹이!”

에르하르트가 펄쩍 뛰며 레오니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저놈이 널 잡아먹으려고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데, 제가 제 발로 기어 나가겠다고? 절대 안 돼!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내가 널 지킬 거야!”

그의 꼬리가 아주 빳빳하게 서서 좌우로 신경질적으로 흔들렸다. 질투와 걱정이 뒤섞인 맹수의 뜨거운 체온이 레오니의 어깨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레오니는 에르하르트의 커다란 손 위에 제 작은 손을 겹쳐 얹었다. 살포시 힘을 주자, 신기하게도 에르하르트의 떨림이 멈칫하며 잦아들었다.

“오라버니.”

레오니가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이제 벨몬트 자작가의 가냘픈 장난감이 아니에요. 벨하르트 대공가의 당당한 막내 영애잖아요. 제 집은 여기예요. 제 집을 더럽히려는 먼지는, 제가 직접 털어내야 해요.”

레오니의 동그랗고 맑은 눈망울 속에서 흔들림 없는 확신이 반짝였다.

에르하르트는 그 올곧은 눈빛에 압도당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약해빠진 인간 꼬맹이인 줄 알았는데, 지금 레오니에게서 풍기는 기세는 그 어떤 맹수보다도 당차고 예리했다.

“……정말 괜찮겠어?”

“응. 나한테 다 생각이 있거든요.”

레오니는 새침하게 윙크를 해 보였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에르하르트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흥, 내, 내가 뒤에서 딱 버티고 서 있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바로 꼬리로 저 인간 대가리를 날려 버릴 줄 알아!”

에르하르트가 츤츤대며 팔짱을 꼈지만, 그의 귀는 여전히 레오니를 향해 쫑긋 세워져 있었다.

잠시 후, 르네가 가죽으로 튼튼하게 감싼 예리한 모서리의 철제 서류 상자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준비되었습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르네. 가요, 우리 가족들을 지키러.”

레오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볍고 통통 튀는 걸음걸이로 그레이시어 성의 거대한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에르하르트가 웅장한 보디가드처럼 그녀의 오른편을 지켰고, 르네가 서류 상자를 든 채 그 뒤를 엄숙하게 따랐다.

쿠구구궁—!

육중한 성문이 마침내 좌우로 열리며 차가운 북부의 바람과 함께 눈부신 설원의 풍경이 드러났다.

광장에는 벨몬트 자작이 이끄는 호위 기사 백여 명이 검을 치켜들고 대치하고 있었고, 그 뒤편 언덕에는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듯 영지의 주민들이 수십 명씩 모여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성문이 열리자, 벨몬트 자작은 기세등등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는 화려한 비단 망토를 두르고, 눈가에 억지로 눈물을 짜내며 가식적인 얼굴을 지어 보였다.

“오! 드디어 문을 여는구나! 내 사랑하는 딸 레오니를……!”

웅성거리던 군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열린 성문 틈으로 쏠렸다.

그곳에서 걸어 나온 것은 끔찍한 학대에 찌들어 울고 있는 가냘픈 아이가 아니었다.

연분홍빛 파스텔톤의 최고급 실크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고, 티 없이 맑고 뽀얀 피부를 빛내며 우뚝 선 어린 영애였다. 아기 고양이처럼 새침하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오는 레오니의 모습은, 마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처럼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의 곁에는 제국 최강의 늑대 수인 소공자 에르하르트가 무시무시한 안광을 뿜어내며 호위하고 있었고, 대공가의 수석 보좌관 르네가 극진한 태도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납치당해 학대받는 아이의 몰골이 아니었다. 오히려 벨하르트 가문의 고귀한 보물로서 지극정성어린 대접을 받고 있는 진짜 영애의 모습 그 자체였다.

벨몬트 자작은 예상치 못한 레오니의 기품 있는 모습과 당당한 기세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레, 레오니……? 너, 너 어찌 그런 옷을…… 아니, 이 비열한 벨하르트 놈들이 너에게 무슨 최면이라도 건 것이냐! 겁내지 마라, 이 아비가 널 구하러 왔단다!”

벨몬트 자작은 다급히 페이스를 찾으며 다시금 양손을 뻗어 가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주 눈물겨운 부성애 연기였다. 군중들 사이에서 다시금 동정 어린 수군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오니는 그 가식적인 눈물을 가만히 응시하며, 입가에 아주 달콤하고도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품 속에서 조용히 손을 뻗어, 르네가 들고 있던 철제 서류 상자의 잠금장치를 딸깍, 소리 내어 풀었다.

싸늘한 겨울바람을 가르고 레오니의 맑고 낭랑한 목소리가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벨몬트 자작님. 제가 자작가에서 아주 ‘기품 있게’ 자랐다고 주장하셨지요?”

레오니가 상자의 뚜껑을 열며 차갑게 미소지었다.

“그럼, 제가 자작가에서 먹고 자란 진짜 기록들이 담긴 이 ‘지출 장부’부터 영지민 분들과 기사단 여러분 앞에서 아주 투명하게, 한 장씩 같이 검사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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