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들이닥친 카엘렌 대공의 거대한 그림자는 온 방 안을 집어삼킬 듯이 압도적이었다. 은빛 머리칼 끝에 맺힌 차가운 서리가 방 안의 열기에 녹아내리며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짐승 같은 붉은 안광이 번뜩이자, 공기마저 팽팽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꺄아아악!”
클로이 영애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그녀가 입고 있던 연분홍빛 드레스 자락이 사정없이 구겨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요란법석한 소란 속에서, 대공의 등 뒤로 허겁지겁 따라온 전령이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전령의 손은 사시나무 떨듯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전, 전하! 벨몬트 자작이 보낸…… 황실 고발장 초안이옵니다! 벨하르트 가문이 부당하게 레오니 영애를 강제 점유하고 있다는 내용이……!”
탁!
비겁한 음모가 가득 담긴 서신이 아늑한 집무실 탁자 위로 사정없이 내던져졌다. 붉은 밀랍 인장이 흉측하게 짓개진 서신은 마치 레오니를 다시 그 끔찍한 지옥으로 끌고 가겠다는 괴물의 아가리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카엘렌 대공의 스트레스 지수가 실시간으로 요동쳤다.
[시스템 돌발 경보!] [개체명: 카엘렌 벨하르트] [현재 스트레스 지수: 152% (분노 수치 임계점 돌파 직전!)]
그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그르릉, 하는 위협적인 지저귐이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벨몬트 자작가의 목을 꺾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그 사나운 눈동자가 에르하르트의 품에 꼭 안겨 있는 레오니의 뺨에 닿는 순간, 기적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레오니를 제 커다란 품에 안아 들고 온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전장에서 막 복귀한 그의 몸에서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피비린내와 매캐한 마수의 열기가 풍기고 있었다.
혹여나 제 가녀린 딸아이가 이 험악한 냄새에 겁을 먹거나 다치기라도 할까 봐, 대공은 커다란 손을 허공에서 꼬물락거리며 뚝딱거렸다.
“……르네.”
그가 쇳소리가 섞인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을 정리해라. 나는 성문의 방어선을 재정비하고 오겠다.”
“존명, 전하.”
대공은 차마 레오니에게 손을 대지 못한 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아이를 한 번 더 흘깃 보고는 바람처럼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폭풍이 한 차례 쓸고 지나간 것처럼 조용해진 방 안에서, 클로이는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갔다.
철컥, 문이 닫히고 집무실에 남은 것은 레오니와 르네, 그리고 여전히 꼬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 경계 태세를 풀지 않는 에르하르트뿐이었다.
르네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탁자 위의 고발장을 집어 들었다. 안경 너머의 냉철한 눈동자가 빠르게 글자를 훑어내려 갔다.
“흠, 과연 벨몬트 자작이군요. 아주 비열하기 짝이 없는 수를 썼습니다. 아가씨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황실에 대공가의 자격 박탈을 논하겠다고 협박하는 동시에, 우리 대공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있어요.”
“아킬레스건이요?”
레오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보슬보슬한 레몬빛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가볍게 흔들렸다.
“그렇습니다. 최근 지하 지열선의 관리 실패로 인해 마수 사료 예산이 폭증하고, 영지 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틈을 타 영지권 자체를 흔들려 하고 있군요. 황실에 대공가가 북부의 지열 통제권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 명분을 제공하려는 속셈입니다.”
르네의 목소리에는 짙은 우려가 깔려 있었다. 그 역시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레오니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괴수 교감 장부’의 정밀한 연산 장치가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띠링, 하는 맑은 효과음과 함께 가상의 투명한 장부가 레오니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벨하르트 대공성 내부 분석 데이터] - 지열 난방 기구 일시 압력 수치: 180% (비정상적 과열) - 지열 냉각석 표면 크랙 발생률: 4.2% (미세 균열 진행 중) - 예산 낭비 요인: 단열재 미비 및 지열 누출로 인한 추가 연료비 지출 (전체 예산의 31.4%)
레오니는 살구빛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생긋 웃으며 르네의 곁으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르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실은 레오니가 가계부를 보다가 아주 재미있는 걸 발견했거든요.”
“가계부…… 말씀이십니까?”
르네가 의아한 표정으로 돋보기를 고쳐 썼다. 레오니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탁자 위에 펼쳐진 영지 재정 장부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 보세요. 매달 마수 사료비랑 난방비가 이만큼이나 늘어났죠? 르네는 마수들이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아니라니요? 그럼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입니까?”
“성 아래에 있는 지하 지열 난방 기구의 압력이 너무 높아서 그래요. 압력이 올라가니까 지열 냉각석 표면에 꼬물꼬물 미세한 크랙이 생긴 거예요. 아주 얇은 얼음판에 금이 가듯이요!”
레오니의 맑고 영롱한 목소리가 집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크랙 틈새로 더운 열기가 다 빠져나가니까, 성 안은 추워지고 마수들은 온도를 맞추려고 더 예민해져서 사료를 많이 먹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크랙만 메우고 단열선 조치를 하면, 예산의 31.4%를 바로 아낄 수 있어요!”
르네의 눈이 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는 허겁지겁 깃펜을 들어 레오니가 지적한 수치들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소름 끼치도록 빠른 속도로 깃펜이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계산이 끝났을 때, 르네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 이건…… 완벽합니다. 정확히 31.4%의 오차가 일치하는군요! 아가씨, 대체 이 정교한 수치와 크랙의 존재를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이건 마법사들도 직접 지하에 내려가 정밀 측정을 해야만 알 수 있는 일인데……!”
르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처음의 의구심과 경계심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경외와 깊은 신뢰만이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인물 호감도 변화!] [수석 집사 르네 -> 레오니] - 신뢰도: 35% -> 85% (적대적 의심에서 절대적 든든함으로 전환!)
“후후, 레오니는 꼼꼼하니까요. 자작가의 그 나쁜 장부들을 맨날 정리하다 보니까 숫자가 다 말해주더라고요.”
레오니는 천연덕스럽게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웃었다. 사실은 시스템 장부의 사기적인 스캔 기능 덕분이었지만, 르네에게는 그저 천재적인 꼬마 영애의 영민함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르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오니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황실의 일류 귀족에게나 올릴 법한, 가장 극진하고 정중한 예우였다.
“아가씨. 제가 아가씨의 영특함을 과소평가했습니다. 당신은 그저 굴러들어온 이방인이 아니라, 멸망해 가던 벨하르트 가문의 재정을 구원할 진정한 보배이십니다.”
그가 품 안에서 아주 오래되고 낡은, 하지만 묵직한 황동 열쇠와 함께 양가죽 지도를 꺼내 레오니의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성 내부의 고대 비밀 지열 조절 통로의 지도와 우회 관로를 열 수 있는 보조 비상 키입니다. 대공 전하와 저, 그리고 오직 후계자에게만 전수되는 일급 비밀이지요. 벨몬트 자작놈들이 무력으로든 법으로든 아가씨를 위협할 때, 이 통로를 통해 언제든 안전하게 피신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템 획득!] - [고대 지열 조절 우회 관로 도면]과 [보조 비상 키]를 획득하였습니다. - 이 도구는 추후 지열 폭발 및 위기 상황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레오니는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황동 열쇠의 감촉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됐다! 르네를 완벽하게 내 편으로 포섭했어!’
성 내부의 가장 내밀한 비밀 구역까지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험난한 북부 대공가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때, 레오니의 머릿속에 장부의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알림: 벨하르트 가문원의 원천 체열과 고대 지열선의 공명 현상 확인.] [가문원들의 비정상적인 고열은 고대 지열 마력의 과부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호스트(레오니)가 이들의 체온을 흡수하는 행위는 단순히 온기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가문원들의 마력 폭주를 진정시키고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정화 작용을 합니다.]
‘엇……?’
레오니는 깜짝 놀라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동안은 그저 자신이 살기 위해, 저체온증으로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이 뜨거운 대형 맹수들에게 억지로 매달려 체온을 ‘강탈’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미안한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내가 그들을 안아주고 쓰다듬어 줄 때마다, 그들의 폭주하는 마력이 진정되고 고통이 치료되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꼬리를 살랑거리며 레오니의 눈치를 보던 에르하르트가 틱틱대며 다가왔다.
“야, 꼬맹이. 너 왜 갑자기 멍하니 서 있어? 추워? 추우면 말을 하던가…….”
에르하르트는 츤데레답게 투덜거리면서도, 슬그머니 자신의 뜨끈뜨끈한 손을 레오니의 작은 손 위로 겹쳐 잡았다. 화르륵, 기분 좋은 온기가 레오니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에르하르트의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레오니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만 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돕고 있었던 거구나.’
버림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계산기만 두드리던 레오니의 마음에, 처음으로 작고 따스한 싹이 트는 기분이었다. 이 맹수들은 무서운 괴물이 아니라, 그저 표현이 서툴러 상처받은 나의 새로운 가족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쿵-!
그레이시어 성 전체가 거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열 파이프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아니라, 성문 밖에서 발생한 강력한 충격파 때문이었다.
창밖으로 붉은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기기묘묘한 마력 폭풍이 소용돌이치며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에르하르트가 본능적으로 늑대의 귀를 쫑긋 세우며 레오니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르네 역시 굳은 표정으로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창밖, 하얗게 얼어붙은 그레이시어 성 앞 광장에는 수십 대의 마차와 함께 철갑을 두른 기사단이 기세등등하게 진입하고 있었다. 그 기사단의 깃발에는 흉측한 흑장미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벨몬트 자작……!”
르네가 이빨을 악물며 중얼거렸다.
고발장을 보낸 것도 모자라, 직접 사병들을 이끌고 성문 앞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광장을 가득 메운 적들의 마력 폭풍이 성의 결계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며 위협해 오고 있었다.
마침내, 지옥의 가스라이팅을 일삼던 전 양부가 레오니를 다시 끌고 가기 위해 이빨을 드러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