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벨몬트 자작님. 제가 자작가에서 아주 ‘기품 있게’ 자랐다고 주장하셨지요?”

레오니가 상자의 뚜껑을 열며 차갑게 미소지었다.

“그럼, 제가 자작가에서 먹고 자란 진짜 기록들이 담긴 이 ‘지출 장부’부터 영지민 분들과 기사단 여러분 앞에서 아주 투명하게, 한 장씩 같이 검사해 볼까요?”

딸깍, 하는 정교한 철제 잠금장치의 마찰음이 유난히도 시린 겨울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성문 앞에 모여든 수십 명의 영지민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연분홍빛 솜사탕처럼 사랑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는 레오니의 모습은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피어난 한 송이 봄꽃 같았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외양과 달리, 동그랗고 맑은 눈동자 속에는 얼음 송곳처럼 날카로운 빛이 서려 있었다.

벨몬트 자작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이내 비열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코방귀를 뀌었다.

“하! 장부라니? 겨우 열 살짜리 어린애가 가짜로 끄적인 종이 쪼가리를 증거랍시고 내미는 게냐! 참으로 가소롭구나. 벨하르트 대공가가 내 딸을 납치하더니, 아주 해괴한 세뇌를 시켜 놨어!”

그는 망토 가슴팍 속으로 손을 쑤셔 넣더니, 빳빳하게 풀이 죽은 양가죽 서류 한 뭉치를 꺼내 들었다. 사방으로 펄럭이는 서류의 하단에는 벨몬트 자작가 특유의 흑장미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여기 똑똑히 보아라! 이것이 바로 내가 레오니를 벨하르트 가문에 양녀로 보내는 대가로 작성했던 정식 양육 영수 증서와 부당 청구서다! 내가 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매년 수천 골드의 최고급 비단과 최고급 식자재를 소모했다는 증거가 여기 다 적혀 있단 말이다!”

자작이 흔들어 대는 서류를 보며 영지민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귀족들의 복잡한 계약서와 영수증 앞에서는 글을 모르는 평민들이 쉽게 현혹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레오니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사뿐히 걸어 나가며 자작이 쥔 양가죽 서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순간, 레오니의 귓가에 띠링, 하는 맑은 기계음과 함께 오직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반투명한 푸른빛 창이 떠올랐다.

[시스템 알림: ‘괴수 교감 장부’의 정밀 분석 모드가 활성화됩니다.] [대상 문서: 벨몬트 자작가의 양육 합의서 및 영수증] [분석 완료: 해당 문서에 날인된 인장의 성분을 감지했습니다. 납(Pb) 성분이 포함된 특수 유제 잉크. 산화 반응 수치: 0.02% (작성된 지 채 3일이 지나지 않음).]

레오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올라갔다.

자작이 들고 있는 서류 하단, 검붉은 흑장미 형상의 인장은 언뜻 보기엔 아주 오래된 것처럼 낡아 보였다. 일부러 먼지를 묻히고 종이를 구겨서 세월의 흔적을 조작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자작은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자작님.”

레오니가 아기 고양이처럼 나긋나긋하면서도, 광장 전체에 똑똑히 박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양육 합의서와 영수증이 정말로 제가 벨하르트 대공가로 오기 훨씬 전, 그러니까 ‘5년 전’에 작성된 원본이 맞나요?”

“그,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당연히 5년 전에 합의하에 작성된 정식 서류지!”

벨몬트 자작은 턱을 치켜세우며 당당하게 외쳤다.

레오니는 후우, 하고 하얀 입김을 뿜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라벤더 빛깔의 고운 눈동자가 자작의 손가락 끝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상하네요. 벨몬트 자작가에서 대대로 사용하는 공식 인장 잉크는 광산에서 채굴한 납 유제를 혼합하여 만들기에, 시간이 흐르면 공기 중의 수분과 반응해 서서히 푸른 빛깔의 은광(銀光)으로 부식한다고 자작님께서 늘 자랑하셨잖아요?”

“……뭐, 뭐라?”

“진짜 5년 전에 작성된 서류라면, 그 흑장미 인장은 이미 아주 아름다운 은푸른빛으로 변해 있어야 해요. 하지만 자작님이 들고 계신 그 문서의 인장은 어쩜 이렇게 산화조차 되지 않은 새까만 빛깔을 띠고 있을까요? 마치…… 바로 엊그제 급하게 찍어 낸 것처럼 말이에요.”

순간, 벨몬트 자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일시에 싹 가셨다.

그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잘게 흔들렸다. 자작이 소유한 흑장미 인장의 납 성분이 시간이 흐를수록 푸른 은광으로 부식되는 이중 위조 방지적 습관은 사교계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설마 이 조그마한 꼬맹이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 이것은…… 보관을 아주 철저히 밀봉해서 그렇다! 그래, 습기가 차지 않는 마법 상자에 보관해 두었기에 변색하지 않은 것이다!”

자작이 다급하게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레오니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동그란 눈을 가만히 뜬 채 자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꿀꺽.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1초, 2초, 3초…….

레오니는 단 한 마디의 반박도 하지 않고, 오직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서릿발 같은 시선으로 자작의 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것은 열 살짜리 어린아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상대의 얄팍한 거짓말을 바닥까지 꿰뚫어 보고 짓밟아 버리겠다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침묵의 압박이었다.

정적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주변에 모인 영지민들도, 벨하르트가의 기사들도 숨을 죽인 채 자작의 땀방울이 턱끝으로 흘러내리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침묵이 1분을 넘어가고, 2분에 달하자 벨몬트 자작의 이마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시선이 마치 거대한 칼날이 되어 목덜미를 겨누는 듯한 극심한 공포로 다가왔다.

자작은 제 발이 저려 미칠 것만 같았다. 저 맹랑한 계집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증거를 더 쥐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결국, 3분에 가까운 침묵의 심리전 끝에 자작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꽥 질렀다.

“그, 그러니까! 이 영수증은 5년 전뿐만 아니라, 최근에 재발급을 받아서……! 그래, 작년 겨울에 벨하르트가에서 청구서를 분실했다고 해서 내가 친절하게 다시 찍어 준 것이다!”

“어머.”

레오니가 마침내 입술을 떼며 생긋 웃었다.

“자작님, 방금 전에는 5년 전에 작성해서 마법 상자에 보관해 둔 ‘원본’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작년 겨울에 재발급한 서류로 말이 바뀌나요?”

“아, 아니, 내 말은……!”

“게다가 작년 겨울에는 제가 벨하르트가에 입양되기도 전인데, 벨하르트가에서 무슨 수로 청구서를 분실하고 자작님께 재발급을 요청했다는 건가요?”

“……앗!”

벨몬트 자작은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팠다는 사실을 깨닫고 턱을 딱딱 마주쳤다.

“와아아!”

“저 사기꾼 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네!”

“어린 영애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문서를 위조해 온 거야!”

광장에 모인 영지민들 사이에서 일제히 야유와 비난이 쏟아졌다. 벨하르트 대공가의 명예를 더럽히고 고귀한 아기 영애를 모함하려 한 파렴치한 자작을 향해, 성난 영지민들이 바닥의 흙덩이를 던질 기세로 웅성거렸다.

가스라이팅과 날조의 달인이던 늙은 자작이, 고작 열 살 남짓한 레오니의 서릿발 같은 일침과 차가운 침묵 압박에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파멸의 순간이었다.

그때, 레오니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스르륵 밀려오는 지독한 한기를 느꼈다.

‘앗, 장부를 너무 정밀하게 스캔했나 봐…….’

괴수 교감 장부의 사기적인 연산 기능을 과도하게 사용한 대가로, 신체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저체온증이 시작된 것이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손끝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생존을 위해 온기가 필요했다.

레오니는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던 에르하르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털북숭이 소매 자락을 꼬옥 움켜쥐었다.

화르륵.

에르하르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인 특유의 터무니없이 뜨거운 열기가 레오니의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얼어붙던 심장이 단숨에 녹아내리며 온몸이 노곤노곤해졌다.

에르하르트는 레오니가 제 옷자락을 붙잡자, 짐짓 귀찮다는 듯 콧바람을 씽 내뿜으면서도 슬그머니 레오니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바람을 막아 주었다.

“약해빠진 인간 꼬맹이가, 춥지도 않은데 왜 난리야? 쳇, 꽉 잡아라. 넘어지지 말고.”

새침하게 툭 내뱉는 에르하르트의 꼬리가 뒤에서 파닥파닥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레오니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대공성의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쿠구구궁…… 하는 미세한 진동이 대지를 타고 흘러나왔다.

평민들은 그저 마차라도 지나가는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예민한 수인의 감각을 지닌 에르하르트와 수석 보좌관 르네의 미간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벨하르트 대공성 지하의 핵심 지열 난방 기구의 일시적 압력 수치가 급격히 상승하며, 지열 냉각석 표면에 미세한 크랙이 발생하고 있다는 징후였다. 이 성의 지열 제어 장치에 심각한 과부하가 걸리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레오니는 그 진동의 원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미 장부를 통해 성 지하의 취약한 열순환 구조와 클로이 영애가 꾸미고 있는 음모의 단초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스테라피 마수 전용 이앓이 소형 빗의 수냉 냉각 매뉴얼을 미리 숙지해 두길 잘했어. 지열이 폭등해 마수들이 폭주하게 되면, 그 빗의 냉각 기믹을 사용해 한 번에 진정시켜야 하니까.’

레오니는 속으로 침착하게 다음 계획을 점검했다.

한편, 영지민들의 거친 야유와 비난에 직면한 벨몬트 자작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그는 부들부들 떨며 레오니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모든 사기 행각이, 고작 자신이 학대하고 무시했던 입양아 계집애의 입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 버렸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자작가는 파멸할 것이고, 사교계에서 그의 이름은 영원히 매장당할 터였다.

극도의 분노와 수치심이 그의 뇌를 지배했다.

“이…… 이 사악한 가짜 년이……! 감히 아비를 모함하고 가문을 배신해?! 네년만 없었어도 벨하르트의 막대한 보상금을 뜯어낼 수 있었는데!”

벨몬트 자작의 눈이 시뻘갛게 뒤집혔다.

그는 이성을 상실한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며, 화려한 비단 소매 안쪽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서릿발 같은 은빛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그것은 마수조차 단숨에 마비시킨다는 비열한 독이 발린, 맹수 퇴치용 특제 은장 단검이었다.

“죽어라, 이 배은망덕한 년!”

미처 기사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광기에 휩싸인 벨몬트 자작이 번뜩이는 단검을 치켜들고 레오니의 얇고 하얀 목덜미를 향해 매섭게 돌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레오니의 맑은 눈동자에 번쩍이는 은빛 궤적이 비쳤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살구색 뺨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려 가던 그 찰나.

“캬아아악-!”

지축을 울리는 사나운 표효와 함께, 밤하늘을 닮은 거대한 흑색 그림자가 레오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카아앙-!

날카로운 쇠붙이가 부딪쳐 사방으로 불꽃이 튀는 굉음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에르하르트였다.

그의 단단한 흑색 발톱이 자작의 은장 단검을 정확히 맞받아쳐 튕겨 냈다. 엄청난 충격에 은빛 칼날이 허공에서 처참하게 부러져 나갔다.

하지만 기뻐할 틈은 없었다. 부러진 칼날 끝에 묻어 있던 검붉은 독액이 에르하르트의 손등에 스치듯 묻어났다.

“크윽……!”

에르하르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불길한 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솟았다. 주변의 눈밭이 순식간에 녹아내려 질척한 진흙탕이 될 정도였다. 맹수 퇴치용 은장 단검에 발려 있던 비열한 독이 그의 마수 핵을 자극해 폭주를 유도하고 있었다.

띠링! 띠링! 띠링!

레오니의 시야에 붉은색 경고 창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위험! 에르하르트 벨하르트의 마력 폭주 지수: 97%!] [체온 이상 상승! 이대로 폭주할 경우, 대공성 지하의 불안정한 지열선과 공명하여 대폭발이 일어납니다!]

‘안 돼……! 오빠를 잃을 순 없어!’

레오니의 작은 주먹이 꼭 쥐어졌다. 비록 살아남기 위해 철저히 계산하고 다가간 가족이었지만, 자신을 위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진 에르하르트를 이대로 둘 순 없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괴수 교감 장부’를 호출했다.

[‘아이스테라피 마수 전용 이앓이 소형 빗’의 ‘수냉 냉각 모드’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소모 포인트: 150)] [※주의: 소환 시 사용자의 체온이 영하 15도까지 급격히 떨어집니다. 극심한 저체온증이 발생합니다!]

‘상관없어, 당장 소환해!’

파앗!

레오니의 작은 손바닥 위로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민트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안에서 영롱한 얼음 가시가 돋아난 소형 빗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레오니의 온몸을 찢는 듯한 지독한 한기가 덮쳐왔다. 파르르, 턱끝이 사정없이 떨렸고, 긴 속눈썹 위로 순식간에 새하얀 서리꽃이 피어났다. 심장이 그대로 얼어붙는 것만 같은 극심한 고통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하지만 레오니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열기로 인해 이성을 잃고 으르렁거리는 에르하르트의 뜨거운 손을 꼬옥 잡았다.

치이이익-!

얼음 빗을 그의 상처 부위에 대자, 시원한 민트향과 함께 은빛 냉기가 에르하르트의 몸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타오르던 독기가 얼어붙어 바스러지고, 그의 붉던 눈동자가 서서히 본래의 맑은 황금빛으로 돌아왔다.

“……레, 오니?”

에르하르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품으로 무너지듯 쓰러지는 것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레오니였다.

“야! 너 몸이 왜 이래?! 왜 이렇게 차가워!”

놀란 에르하르트가 서둘러 레오니를 두 팔로 안아 제 가슴팍에 가두었다. 그의 터무니없이 뜨거운 체열이 전달되자, 레오니는 겨우 가쁜 숨을 내쉬며 그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살기 위해 인간 보일러의 온기를 필사적으로 흡수하는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그 사이, 르네와 대공가의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던 벨몬트 자작을 제압했다. 자작은 차가운 돌바닥에 처박힌 채 짓눌려 소리쳤다.

“이거 놓아라! 나는 제국의 귀족이다! 대공이 없는 틈을 타 나를 해치려 하다니!”

“입을 닥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자작.”

르네의 목소리는 평소의 정중함을 완전히 잃은 채, 불타는 지옥의 업화처럼 서늘했다. 그의 손끝이 자작의 목덜미를 파고들 듯 굳어졌다.

상황이 정리되는 듯싶던 바로 그 순간.

쿠구구구궁-!

방금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진동이 그레이시어 성 전체를 흔들었다. 성벽의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광장 한가운데의 대지가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붉다 못해 검푸른 빛을 띠는 마력 지열 스팀이 거센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숨이 막힐 듯한 열기가 순식간에 광장을 가득 채웠다.

띠링!

[경고! 지하 지열 핵심 제어 장치의 밸브가 누군가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습니다!] [열순환 구조 붕괴 중. 5분 내로 우회 관로를 열지 않으면 성 전체가 폭발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지열 폭등에 자극받은 지하 심층의 고대 마수 ‘켈베로스’가 포효하며 깨어납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갈라진 대지의 틈새, 붉은 수증기 너머에서 대지를 찢는 듯한 무시무시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불타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마수의 안광이 얼어붙은 레오니를 일직선으로 겨누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