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컥!
둔탁한 쇠붙이가 맞물리는 파열음이 밀폐된 지하 세탁실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문틈 사이로 새어 들던 미약한 촛불 빛마저 단숨에 차단되며, 공간은 오직 시리도록 푸른 어둠 속에 잠겼다. 클로이의 사주를 받은 하녀의 바쁜 발소리가 멀어지는 소리가 벽을 타고 희미하게 울렸다.
완벽한 감금이었다.
“영하 40도라니, 완전히 사람을 얼려 죽일 작정이었구나, 클로이.”
내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볼 끝이 아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발바닥부터 타고 올라왔다. 가냘픈 아기 양의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내 머릿속 계산기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안광 두 개. 심연의 서리 늑대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개체명: 심연의 서리 늑대] [현재 스트레스 지수: 130% (폭주 및 아사 직전 상태)]
바닥을 적시는 서리 서린 공기 속에서, 내 체온이 순식간에 뚝뚝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턱끝이 덜덜 떨려왔다. 보통의 일곱 살 아이였다면 이 무시무시한 마수와 혹한 앞에서 울부짖었겠지만, 내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아주 확실한 무기가 있었다.
‘머리를 써야 해. 내겐 대공성의 가계부와 설계 도면 데이터가 있으니까.’
뇌리를 스친 것은 지난번 예산 절감 대책을 세우며 머릿속에 각인해 둔 대공성 지하의 구조였다.
그레이시어 성의 지하 지열 난방 기구는 최근 일시적인 압력 수치 상승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특히 이 세탁실 벽면에 매설된 지열 냉각석 표면에는 육안으로 겨우 보일락 말락 한 미세한 크랙이 발생해 있었다.
클로이는 이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극저온의 냉기를 이용해 나를 얼려 죽이려 했겠지만, 내 장부의 실시간 연산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리키고 있었다.
“냉기의 유출 경로가 이 크랙이라면…… 반대로 지열의 압력을 이쪽으로 밀어 넣으면 우회로가 열린다는 뜻이지.”
나는 주머니 속에서 르네가 건네주었던 고대 지열 조절 우회 관로 도면을 떠올렸다. 머릿속 장부 화면에 기계의 내부 구조가 파스텔톤의 민트색과 핫핑크색 선으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벽면에 돋아난 얼음장 같은 미세 균열 부위를 짚었다. 손가락 끝이 쩍쩍 달라붙는 혹한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내 그 바로 옆에 숨겨진 보조 우회 밸브를 찾아냈다.
스르륵, 틱.
밸브를 있는 힘껏 반시계 방향으로 꺾었다.
끼이이이익-!
녹슨 쇠파이프가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세탁실 내부를 가득 채우던 푸른 성에가 거짓말처럼 스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배관 내부에서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보일러실 깊은 곳에서 끌어 올려진 뜨끈뜨끈한 지열 온풍이 세탁실 안으로 화아악 불어닥쳤다.
“끄으응…….”
차가운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서리 늑대가 따스한 바람에 귀를 쫑긋 세웠다. 놈의 붉은 눈동자에 서려 있던 살기가 스르르 풀리더니, 이내 커다란 덩치를 둥글게 말아 내 발치에 툭 기댔다. 마수의 체열마저 따뜻하게 변해가는 순간이었다.
[심연의 서리 늑대 스트레스 지수: 130% -> 45% (안정)] [경고: 우회 조작으로 인해, 냉각실로 향하던 영하 40도의 극저온 냉기 압력이 반대편 복도 배관으로 전량 역류합니다.]
“어머나, 기계가 참 정직하기도 해라.”
나는 배시시 웃으며 따뜻하게 데워진 세탁 바구니 안의 면포를 덮어쓰고 자리를 잡았다. 마치 귤을 까먹기 딱 좋은 온도의 아늑한 방이 완성되어 있었다.
***
같은 시각, 세탁실 밖 어두운 복도.
클로이 영애는 숄을 곱게 두른 채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천박한 복덩이 년, 지금쯤 오들오들 떨며 잘못했다고 빌고 있겠지? 벨하르트의 이름을 더럽히는 고아 따위는 진작 치워졌어야 해.”
클로이는 세탁실 문에 달린 작은 관측창의 밸브를 손대어 내부의 냉기 수치를 한 단계 더 올릴 생각이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몰아붙인 뒤, 자신이 극적으로 구출해 생색을 내며 대공가에서 스스로 나가도록 협박할 심산이었다.
“어디 구경이나 해 볼까?”
완고한 얼굴로 밸브 손잡이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꺄아악?!”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클로이가 만지려던 복도 배관의 이음새가 엄청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피쉭-! 화아아악-!
배관이 터지며 뿜어져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영하 40도의 초고압 극저온 냉기 폭풍이었다. 공기 중의 수분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으며 사방으로 눈부신 얼음 침이 튀었다.
“어, 어어……?!”
피할 틈도 없었다. 사나운 동토의 칼바람이 클로이의 전신을 사정없이 덮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가 입고 있던 연보라색 고급 울 드레스가 빳빳하게 얼어붙어 판자때기처럼 굳어졌다.
“이, 이게 무슨…… 힉! 히익!”
속눈썹과 머리카락 끝에 새하얀 성에가 다닥다닥 엉겨 붙었다. 뺨은 순식간에 붉다 못해 퍼렇게 질려갔고, 이가 딱딱 맞부딪히며 사시나무 떨듯 몸이 떨렸다.
“추, 추워…… 살려, 살려줘…… 으추추!”
기세등등하던 사교계의 꽃은 온데간데없고, 코끝에 맑은 콧물이 길게 대롱대롱 매달린 처참한 몰골의 생쥐 한 마리만 남았다. 추위에 몸이 굳어 문고리조차 잡지 못하고 바닥을 뒹구는 꼴이 볼만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지하 복도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무거운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레오니-!”
지옥에서 귀환한 사신처럼 사나운 기세를 뿜어내며 나타난 이는 에르하르트였다. 그의 은빛 늑대 귀가 분노로 빳빳하게 서 있었고, 황금빛 눈동자는 붉은 이채를 띠며 이성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에르하르트는 바닥에서 콧물을 흘리며 얼어 죽어가는 클로이를 가차 없이 밟고 지나가 세탁실 문 앞으로 돌진했다.
“비켜!”
콰아앙-!
강철로 보강된 두꺼운 오크나무 문이 에르하르트의 강력한 발길질 한 번에 종잇장처럼 박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비산했다.
“레오니! 정신 차려, 내가……!”
문을 부수고 들어온 에르하르트의 외침이 뚝 멈췄다.
자신이 생각한 비극적인 광경—얼어붙어 숨을 헐떡이는 가냘픈 여동생의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오히려 세탁실 안은 훈훈한 열기가 핑 돌 정도로 따뜻했고, 레오니는 폭신하고 깨끗한 세탁 더미 위에 앉아 뺨을 발그레하게 붉힌 채 졸고 있었다. 발치에는 무시무시한 서리 늑대가 얌전하게 꼬리를 흔들며 개껌을 씹듯 수건 모퉁이를 물고 있었다.
“……응? 오빠아?”
레오니가 조그만 손으로 눈을 비비며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솜사탕처럼 사랑스럽고 평온한 모습에 에르하르트는 맥이 탁 풀린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너…… 안 얼었어?”
“웅. 여기 되게 따뜻해. 오빠도 들어와서 귤 먹을래?”
레오니가 품 안에서 꼼지락대며 꺼내 보인 것은 지열 배수관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따스한 온천 귤이었다.
에르하르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성큼성큼 걸어와 레오니를 통째로 안아 올렸다. 그의 높은 체열이 레오니의 몸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쓸데없이 걱정하게 만들고…… 이 멍청한 꼬맹이가.”
말은 까칠하게 했지만, 레오니를 안은 에르하르트의 팔에는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동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제야 가시는 듯했다.
레오니를 품에 안은 채 문밖으로 걸어 나온 에르하르트의 시선이 바닥에서 바르르 떨고 있는 클로이에게 닿았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괴수의 잔혹한 안광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네년이 감히 벨하르트의 영애를 해하려 했나?”
“으, 으으…… 에르하르트 님…… 저, 저는 오해…… 엣취!”
클로이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변명하려 했지만, 에르하르트의 목소리는 북부의 만년설보다 더 차갑게 내리꽂혔다.
“끌어내라. 이 오만한 침입자를 당장 감옥에 처넣고, 가문의 법대로 다스릴 것이다.”
경비병들이 달려와 사시나무 떨듯 하는 클로이를 가차 없이 바닥에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콧물이 범벅이 된 채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추태의 극치였다.
***
소동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을 무렵.
성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아늑하고 엄숙한 대공의 집무실. 타오르는 벽난로 불빛이 붉은 카펫 위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수석 집사 르네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책상 위에 놓인 한 통의 서신을 무거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서신의 봉투 뒷면에는 비열하고 음험한 빛을 품은 흑장미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벨몬트 자작가가 보낸 밀서였다.
서류의 내용을 훑어내려 가던 르네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본 자작가는 귀 가문이 본인의 정당한 양녀인 레오니 영애를 불법적으로 억류하고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는바…… 황실 고발장 초안을 첨부하며…….]
벨몬트 자작이 보낸 공식적인 황실 고발장 초안.
그것은 벨하르트 대공가가 약탈자이자 유괴범이라는 오명을 쓰게 만들 수도 있는, 아주 치명적이고 악랄한 덫이었다.
르네의 손끝이 서류를 쥔 채 가늘게 떨렸다. 성문 밖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폭풍의 전조가 집무실의 고요함을 깨뜨리고 있었다.
“으차차.”
에르하르트는 레오니를 마치 커다란 솜인형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고쳐 안았다. 겉으로는 툴툴대면서도, 단단한 팔뚝은 레오니가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도록 푹신한 각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웅, 역시 오빠 인간 보일러가 최고야.
레오니는 에르하르트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맹수 수인 특유의 뜨끈뜨끈한 체온이 닿자마자, 차가운 냉각실에서 살짝 굳어 있던 손가락 끝에 몽글몽글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극저온으로 떨어졌던 체온 수치가 장부 위에서 레몬 빛으로 밝게 깜빡이며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너, 그렇게 아무한테나 덥석덥석 안기지 마라.”
“에이, 아무한테나 안 안겨요. 멋쟁이 에르 오빠니까 안기는 거지!”
“멋, 멋쟁이……?”
에르하르트의 은빛 늑대 귀가 쫑긋 씰룩였다. 볼때기가 발그레한 복숭아 빛으로 물든 소년은 애써 고개를 돌렸지만, 팽팽하게 솟구치던 꼬리가 기분 좋은 듯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남매가 다정하게(?) 그레이시어 성의 복도를 지나 집무실로 향하는 동안, 주변의 하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한의 세탁실 소동은 클로이 영애의 비참한 ‘콧물 엔딩’으로 끝났고, 이제 성내의 권력 구도가 누구에게로 기울었는지는 지나가던 마수도 알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화기애애하던 공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르네 삼촌?”
레오니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부르자, 책상 위에 마른 서류를 펼쳐놓고 있던 르네가 화들짝 놀라며 그것을 등 뒤로 숨겼다. 그의 안경너머 눈동자가 평소와 달리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레오니 아가씨. 에르하르트 도련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르네, 방금 등 뒤로 숨긴 거 뭐야? 냄새가 아주 고약한데.”
에르하르트가 코를 킁킁거리며 날카롭게 경계 태세를 취했다. 수인의 예민한 후각은 서류 봉투에 찍힌 불쾌한 인장의 냄새를 이미 감지한 모양이었다.
르네는 곤란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제 막 대공가에 마음을 열고 정착하려는 어린 아가씨에게 이런 더러운 어른들의 암투를 보여주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숨긴다고 숨겨질 내가 아니지!’
레오니는 에르하르트의 품에서 가볍게 토끼처럼 뛰어내려 르네의 책상 앞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들고 포동포동한 뺨을 실룩이며 르네의 소매깃을 잡고 늘어졌다.
“르네 삼촌, 레오니도 보여주세요. 나 이제 벨하르트의 씩씩한 막내잖아요. 삼촌이 고민하는 거, 레오니도 같이 고민하고 싶어요!”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부풀어 오른 애교 섞인 목소리에 철혈의 집사 르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저 촉촉한 라일락 빛 눈동자를 마주하고서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성에 아무도 없었다.
결국 르네는 깊은 한숨을 쉬며 등 뒤에 감추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벨몬트 자작가가 황실에 제출하겠다며 보내온 고발장 초안입니다. 아가씨를 강제로 점유하고 학대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내용이지요. 황실의 감사관들이 들이닥치면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고발장?”
에르하르트가 이빨을 으드득 갈았다. 당장이라도 벨몬트 자작령으로 달려가 그 비열한 자작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하지만 레오니는 울거나 당황하는 대신, 맑은 눈을 빛내며 책상 위의 서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머릿속 장부의 ‘스캔 기능’이 발동하며 서류의 구석구석을 정밀 연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편지봉투 뒷면에 선명하게 찍힌 검붉은 ‘흑장미 인장’이 레오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 이 인장, 뭔가 이상해.’
가냘픈 손가락으로 인장 부분을 슥 문지르자, 미세하게 묻어나는 잉크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레오니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벨몬트 자작가는 예로부터 가문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납 성분이 다량 함유된 수입 잉크를 고집했다. 그런데 이 잉크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기 중의 수분과 반응해 붉은빛이 부식되면서 극미세한 푸른 은광(銀光)을 띠며 변색되는 성질이 있었다.
장부의 돋보기 화면이 인장의 단면을 100배로 확대해 보여주었다.
[분석 결과: 해당 인장 잉크의 부식 진행률 0.5%. 작성된 지 채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최신 위조 인장으로 추정됨.]
‘빙고!’
레오니의 입꼬리가 보이지 않게 싹 올라갔다.
벨몬트 자작은 레오니를 벨하르트 가문에 넘겨주며 작성했던 ‘양육권 영구 포기 합의서’의 존재를 무력화하기 위해, 이 고발장의 날짜와 서명들을 과거의 시점으로 조작해 황실을 기만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멍청한 이중 위조 습관이 담긴 이 잉크는 최근에 급조되었다는 결정적인 과학적 증거를 스스로 품고 있었다.
“르네 삼촌, 영지 창고에 벨몬트 자작이 예전에 보냈던 다른 공문서들도 보관되어 있죠?”
“예? 그렇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 문서들에 찍힌 흑장미 인장이랑, 이 고발장에 찍힌 인장을 빛에 비추어 대조해 보세요. 옛날 서류의 인장은 푸른 은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고발장의 인장은 아주 시뻘겋죠?”
레오니의 영민한 지적에 르네의 눈이 등잔만 하게 커졌다. 서둘러 돋보기를 꺼내 두 인장을 대조해 보던 르네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 이건……! 잉크의 부식 속도를 이용해 문서의 위조 시점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군요! 아가씨, 귀족들조차 모르는 이 정교한 야금학적 특성을 대체 어떻게……!”
“헤헤, 레오니는 가계부 정리하는 걸 좋아하니까요. 자작가의 지출 장부에서 그 비싼 잉크 수입 내역을 본 적이 있거든요.”
레오니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방긋 웃었다. 계산기 머리를 풀가동해 적들의 목줄을 쥘 패를 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그 비열한 자작 놈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리는 일뿐이었다.
‘감히 나를 다시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끌고 가겠다고? 장부의 회계 데이터로 네놈의 전 재산과 명예를 아주 박살을 내주마.’
레오니의 속마음은 차가운 복수극의 서막을 올리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무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갭 차이를 모르는 에르하르트는 동생이 그저 기특해 죽겠다는 듯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그레이시어 성의 가장 높은 첨탑에서, 대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뿔나팔 소리가 세 번 연속으로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순한 경보가 아니었다. 오직 성의 주인인 대공이 전장에서 완전히 승리하고 개선할 때만 울리는, 귀환의 신호탄이었다.
쿵쾅쿵쾅!
바깥 복도에서 수많은 기사들의 철갑 부딪히는 소리와 긴박한 발소리가 폭풍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대공 전하께서……! 전하께서 지금 성문에 도착하셨습니다!”
헐떡이는 전령의 외침과 함께, 집무실의 묵직한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차가운 눈바람과 함께 피비린내와 압도적인 마력을 풍기며 들어서는 거대한 그림자.
마침내 전쟁터에서 귀환한 북부의 폭군, 카엘렌 벨하르트 대공이 그 위압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붉은 안광이 집무실 안을 차갑게 훑더니, 이내 에르하르트의 품에서 내려와 서 있는 작은 레오니에게로 고정되었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 속에서, 대공이 무거운 걸음을 한 보 내딛는 순간—
[시스템 돌발 돌발 경보!] [가장 강력한 괴수의 감정 상태가 감지되었습니다.] [개체명: 카엘렌 벨하르트] [현재 스트레스 지수: 150% (극도의 분노 및 불안 폭주 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