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이이이익-!
동쪽 탑의 튼튼한 대리석 바닥 틈새로 뿜어져 나온 붉은 스팀이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달콤한 복숭아 빛깔로 꾸며져 있던 내 침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욱하고 뜨거운 안갯속으로 잠겨 버렸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후끈한 열기가 뺨을 훅 스치고 지나갔다.
그 무시무시한 혼란의 한복판에서, 벨몬트 자작의 밀사는 기사들의 억센 손길에 짓눌린 채 바닥을 기고 있었다. 사내가 겁에 질려 방을 허둥지둥 뛰쳐나가기도 전에, 성의 복도 저편에서 귀를 찢을 듯한 포효가 대공성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크아아아악-! 저리 치워! 다 꺼지란 말이야!”
에르하르트였다.
그의 외침과 함께 붉다 못해 검붉은 마력이 자욱한 수증기를 가르며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콰앙! 쾅! 단단한 대공성의 석조 벽면이 무참히 긁히고 부서지는 파괴음이 연속해서 고막을 때렸다.
“공자 전하! 고개를 숙이십시오! 마력이 또 폭주하려 합니다!” “난로 조절기가 완전히 나갔다! 지하의 지열 난방 기구 압력이 제어가 안 돼!”
기사들과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했다. 뜨거운 증기 속에서 르네의 이지적인 안경 유리가 하얗게 흐려졌다. 그는 재빨리 옷소매로 안경을 닦아내며 안색을 굳혔다.
“단순한 과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고의로 지열 밸브의 압축 마력선을 건드렸군요. 이대로 두면 동쪽 탑 지하의 냉각석 표면에 발생한 미세한 크랙이 완전히 갈라져 성 전체가 불바다가 될 겁니다.”
르네의 예리한 분석에 내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열 냉각석의 크랙이라구? 르네 아저씨가 저번에 말했던 그 취약한 열순환 구조가 결국 터진 거네. 하지만 이 타이밍에 갑자기?’
이건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벨몬트 자작의 허술한 밀사를 미끼로 던져두고, 뒤에서는 더 거대한 음모가 움직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음모의 가장 첫 번째 희생양은, 지금 열기에 노출되어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인 맹수 소공작이었다.
“으아아아! 이빨이, 이빨이 깨질 것 같단 말이야!”
에르하르트가 제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을 뒹굴었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피부 위로 늑대의 거친 은빛 털이 삐죽삐죽 돋아나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는 평소보다 두 배는 더 길고 날카롭게 자라나 있었는데, 잇몸 전체가 핏빛으로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지열선이 폭주하며 뿜어낸 열기가 늑대 수인의 가장 예민한 감각인 ‘성장기 이앓이’를 최악의 상태로 자극해 버린 것이다.
“공자 전하를 진정시켜라! 쇠사슬을 가져와!” “안 됩니다! 지금 상태의 전하를 억압하려 들면 마력이 역류해 심장이 터질지도 모릅니다!”
호위 기사들조차 에르하르트가 뿜어내는 흉포한 붉은 마력의 기세에 눌려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맹수의 본능이 폭발한 소공작은 이제 아군과 적군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가 바닥을 한번 내리칠 때마다 대리석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대로 두면 에르하르트 오빠가 진짜 위험해.’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내 영혼의 동반자이자 생존 도구인 [괴수 교감 장부]를 눈앞에 띄웠다.
반짝이는 파스텔 핑크빛의 홀로그램 장부가 허공에 조용히 펼쳐졌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오직 나만의 비밀 장부였다.
[대상: 에르하르트 벨하르트] - 스트레스 지수: 99% (임계점 돌파 직전!) - 신체 상태: 극심한 구강 내 열감 및 성장기 영구치 돌출 통증. - 현재 필요한 힐링 도구: ‘빙결 가시를 품은 아이스테라피 마수 전용 이앓이 소형 빗’ (교환 비용: 150 포인트)
[소지 포인트: 180 포인트]
‘포인트는 충분해. 하지만…….’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장부에서 기적의 힐링 도구를 꺼낼 때마다 치러야 하는 대가, 즉 ‘체온 탈취’의 제약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번에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저체온증 때문에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눈앞에서 괴로워하며 울부짖는 은빛 늑대 소년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는 틱틱대면서도 내 손을 꼭 잡아주던, 내 새로운 울타리의 소중한 조각이었으니까.
‘살기 위해서라도, 저 인간 보일러를 반드시 진정시키고 품에 안겨야 해!’
나는 결연하게 장부의 교환 버튼을 꾹 눌렀다.
[‘빙결 가시를 품은 아이스테라피 마수 전용 이앓이 소형 빗’을 소환합니다.] [-150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주의: 사용자의 체온이 급격히 저하됩니다!]
그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쩍쩍 갈라지는 듯한 혹한의 냉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흐읍……!”
나도 모르게 이가 덜덜 떨렸다. 손끝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질려갔고, 허파로 들이쉬는 숨결마다 하얀 김이 서렸다. 온몸의 피가 얼음물로 변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은 극심한 오한이었다.
하지만 내 고사리 같은 손아귀에는 이미 영롱한 민트빛으로 빛나는 조그만 빗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빗살 끝마다 투명한 얼음 가시 같은 것이 촘촘하게 박혀 있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빗이었다.
[아이템 정보: 빙결 가시를 품은 아이스테라피 소형 빗] - 특이성 기믹: 미세한 자극을 가할 시 ‘수냉 냉각 변환’ 모드가 작동하여 접촉 부위의 온도를 즉각 영하 5도로 동결 마취함. (※주의: 과도한 압력을 가하면 급속 냉각이 발생하므로 섬세한 손길이 필요함.)
나는 이 차가운 빗을 꼭 쥔 채, 덜덜 떨리는 다리로 에르하르트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갔다.
“레, 레오니 영애! 위험합니다! 다가가지 마십시오!”
르네가 깜짝 놀라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여, 르네 아저씨. 에르하르트 오빠는 나를 아프게 하지 않아여.”
내 목소리는 추위 때문에 가늘게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에르하르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크르릉, 목구멍 깊은 곳에서 짐승의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당장이라도 내 가냘픈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기세였다.
“저리 가……! 너 같은 약해빠진 인간 꼬맹이가 올 곳이 아니야! 내 몸이, 몸이 타버릴 것 같단 말이야!”
“오빠, 아프지? 내가 시원하게 해줄게여. 솜솜이 손 믿어바여.”
나는 겁먹지 않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러고는 에르하르트의 거친 은빛 머리타래 사이로 민트빛 빗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첫 빗질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사각-.
얼음 가시가 에르하르트의 두피와 턱밑의 예민한 피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동시에 빗에 내장된 수냉 냉각 변환 기믹이 활성화되며, 미세한 얼음 가시들이 기분 좋은 냉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엇?”
에르하르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항상 불덩이처럼 뜨겁고 욱신거리던 턱관절과 잇몸 주변으로, 마치 얼음 박하사탕을 가득 머금은 듯한 극상의 시원함이 물밀듯이 밀려든 덕분이었다.
사각, 사각.
나는 장부의 수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손놀림을 조율했다.
[대상: 에르하르트 벨하르트] - 스트레스 지수: 80% -> 65% -> 40% (급격히 하락 중!) - 구강 내 열감 수치: 안전 영역으로 진입.
“하아…… 아…….”
에르하르트의 입에서 뜨거운 열기 대신, 깊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흉포하게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마력이 사르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나는 좀 더 대담하게 빗을 움직여 그의 귀 뒤쪽과 목덜미, 그리고 부어오른 턱밑을 살며시 긁어주었다. 짐승들이 가장 좋아하는 급소이자, 열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었다.
“으응…… 갸릉…….”
에르하르트의 입에서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늑대 수인의 자존심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낸 듯한, 완벽한 무장해제의 소리였다.
그의 등 뒤에 꼿꼿하게 서 있던 은빛 꼬리가 좌우로 파닥파닥, 팽팽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바닥을 부술 듯이 날뛰던 거대한 맹수가, 내 손길 한 번에 얌전한 아기 강아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오빠, 시원해여?”
“……시, 시끄러워. 딱히 시원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그냥 네 손이 너무 차가워서 잠시 대주고 있는 것뿐…… 으흐응.”
말은 까칠하게 하면서도, 에르하르트의 몸은 이미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툭.
결국 참지 못한 그가 내 무릎 위로 커다란 머리를 풀썩 얹어왔다. 은빛 털 뭉치가 내 허벅지를 가득 채웠다.
바로 이때였다. 내 몸을 지배하던 지독한 영하의 추위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가고 눈앞이 가물거렸다.
‘지금이야! 온기 충전 타임!’
나는 자연스럽게 빗을 내려놓고, 내 무릎 위에 누운 에르하르트의 커다란 귀를 두 손으로 꼬물꼬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온몸을 밀착시켰다.
“앗, 뜨거워라…… 에헤헤, 오빠는 진짜 따뜻해여.”
“무, 무슨 짓이야! 갑자기 왜 안고 난리야!”
에르하르트가 얼굴을 붉히며 버둥거리려 했지만, 나는 그의 귀를 살짝 꼬집으며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화아아아-.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열의 체온이 내 얼어붙은 심장과 혈관을 타고 빠르게 스며들었다. 파랗게 질렸던 내 뺨에 다시 발그레한 복숭아 빛 생기가 돌아왔다.
[시스템: 온기 충전 완료!] - 현재 체온: 36.5℃ (정상 회복) - 등록된 보호자 ‘에르하르트’와의 스킨십을 통해 저체온증이 완벽히 해소되었습니다.
살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에르하르트의 부드러운 귀를 조물조물 만졌다.
“오빠 귀는 말랑말랑하구 따뜻해서 조아여. 평생 내 전용 난로 해줘여.”
“뭐, 뭐래는 거야, 이 바보 꼬맹이가! 비켜! 부끄럽지도 않냐!”
에르하르트는 귀까지 빨개진 채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꼬리가 너무 빨리 흔들려서 방 안의 안개가 바람을 타고 날아갈 지경이었다.
이 믿을 수 없는 극락의 전경을 지켜보던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도망치려던 시녀들은 입을 벌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섰고, 칼을 뽑아 들었던 기사들은 무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성 최악의 성질머리를 자랑하며 툭하면 폭주하던 소공작 에르하르트가 아니던가. 그 무서운 늑대가 고작 대공가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된 조그만 아기 영애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꼬리를 팽팽하게 흔들며 만족의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 말이다.
르네는 안경을 고쳐 쓰며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참…… 대공가의 미래가 아주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군요. 아가씨의 그 빗은 대체 어디서 난 것인지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싶지만…… 일단 소공작 전하를 저토록 온순하게 길들이시다니,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르네의 눈빛에 나를 향한 경외심과 신뢰가 한층 더 깊게 새겨졌다. 나는 내심 콧노래를 불렀다.
‘흥, 맹수 가문이라고 해서 겁먹을 필요 전혀 없다니까? 장부로 취향 파악하고 밀당만 잘하면 다 내 발아래 댕댕이가 되는 거지!’
벨몬트 자작의 위조 서류 음모도 가뿐하게 짓밟았고, 에르하르트 오빠의 폭주도 완벽하게 막아냈다. 완벽한 승리였다.
지열 폭주로 후끈해진 방 안에서 에르하르트의 따뜻한 털을 만지며, 나는 이제야말로 평화로운 단잠을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각, 사각.
그때, 자욱했던 안개가 완전히 걷힌 침실 문턱 너머로, 기분 나쁘도록 선명한 구둣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각-. 또각-.
규칙적이고 오만한 기품이 서린 발소리였다.
내 무릎에 누워 있던 에르하르트의 귀가 쫑긋 서더니, 이내 꼬리 흔들기를 멈췄다. 그의 눈빛이 다시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 여자가 왜 벌써 온 거지?”
르네의 얼굴에서도 방금 전의 훈훈한 미소가 지워지고, 철혈의 집사다운 냉혹한 표정이 들어찼다.
열린 문틈 사이로, 화려한 보랏빛 실크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신 금발을 높게 틀어 올리고, 입가에는 한없이 자애로운 듯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뱀처럼 차갑게 식어 있는 여인.
벨하르트 대공비의 자리를 노리며 사교계를 피로 물들여온 음험한 정적, 클로이 영애였다.
그녀는 난장판이 된 내 침실과, 에르하르트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있는 나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싸늘하게 비틀어 올리며 내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왔다.
“어머나, 성안이 아주 소란스럽다 했더니…… 더러운 쥐새끼 한 마리가 대공가의 고귀한 핏줄을 기만하고 있었군요.”
클로이의 독사 같은 시선이 내 얼굴에 꽂히는 순간, 등줄기로 기분 나쁜 전율이 쫙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