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깨를 짓누르는 손아귀의 힘은 사정없이 무거웠다.

방금 전까지 에르하르트의 온기를 나눠 받아 전신을 채우고 있던 따스한 36.5℃의 체온이, 살갗을 파고드는 차가운 가죽 장갑의 감촉에 찰나 가라앉았다.

새하얗고 폭신한 양털 이불이 코앞에 있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갔다면 복숭아 빛깔로 가득한 이 사랑스러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단잠에 빠져들 수 있었을 텐데.

“……찾았다, 벨몬트의 도망친 강아지.”

귓가를 긁어내리는 목소리는 낮고 음침했다. 눅눅한 지하실의 곰팡이 냄새가 섞인 것만 같은 불쾌한 숨결이 뺨을 스쳤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눈앞에 서 있는 사내는 온통 칠흑 같은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낀 가죽 장갑의 손등 부근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흑장미 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벨몬트 자작가가 자랑하는 가문의 상징이자, 동시에 사교계의 독사라 불리는 클로이 영애의 은밀한 손길을 증명하는 표식이었다.

벨하르트 대공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동쪽 탑의 가장 깊숙한 침실까지 숨어들다니. 클로이 영애가 보낸 밀사의 실력은 제법 쓸만해 보였다. 아니, 어쩌면 벨하르트 가문의 수인들이 지독한 ‘감정 고장’으로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아주 영악하게 틈새를 노린 것일지도 모른다.

사내는 내가 겁에 질려 부르르 떨며 눈물을 터뜨릴 것이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겁도 없이 이런 괴물들의 소굴로 기어들어 오다니. 벨몬트 자작님께서 너를 얼마나 애타게 찾으시는지 아느냐? 당장 나와 함께 돌아가지 않으면, 저 문밖에 있는 야수들이 네 그 가냘픈 목을 단숨에 물어뜯어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이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악의가 가득 찬 가스라이팅이 뚝뚝 묻어났다.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아이의 자존감과 용기를 완전히 무너뜨려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오직 자신들의 손길만이 유일한 구원인 양 믿게 만드는 비열한 수법. 벨몬트 자작가에서 징글징글하게 겪었던 바로 그 짓거리였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무력하고 멍청한 일곱 살짜리 꼬마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 머릿속의 계산기는 이 차가운 위협 속에서도 탁, 탁, 타닥 소리를 내며 번개처럼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벨하르트 가문이 나를 잡아먹을 괴수라고? 웃기지 마. 그 사람들은 그냥 쑥스러워서 으르렁대는 착하고 뜨끈뜨끈한 대형 보일러들이란 말이야.’

나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것은 문밖의 수인들이 아니라, 내 어깨를 쥐고 흔드는 이 비열한 사내와 그 배후들이었다.

그때, 사내가 겉옷 안주머니에서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슥.

사내의 벌어진 주머니 틈새로 낯익은 문양이 인쇄된 편지봉투가 힐끗 보였다. 은색 테두리가 화려하게 박힌 고고한 서식지. 벨몬트 자작이 오직 가문의 중대한 비밀 계약이나 사적인 밀서를 보낼 때만 사용하는 특유의 수입 편지지가 틀림없었다.

‘걸려들었어.’

나는 침묵을 지키며 사내가 흔드는 종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종이의 맨 위쪽에는 ‘양육비 영수증 및 신변 인도 합의서’라는 거창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 벨몬트 자작이 대공가에 레오니를 반환하라고 청구할 때 사용할 위조 서류임이 분명했다.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신비로운 능력이 영리하게 고개를 들었다.

‘괴수 교감 장부, 기동.’

머릿속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리며, 사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반투명한 민트빛 홀로그램 장부가 허공에 부드럽게 펼쳐졌다. 파스텔톤의 따뜻한 빛을 내뿜는 장부의 페이지가 스르륵 넘어가더니, 사내가 쥐고 있는 문서를 향해 다차원 스캔 격자가 붉은 실선처럼 뻗어 나갔다.

[시스템: ‘다차원 정밀 스캔’ 기능을 발동합니다. 대상 문서를 분석합니다…….]

[시스템: 분석 완료!] - 문서 종류: 벨몬트 가문 인장이 찍힌 양육 계약 위조서 - 특이 사항: 문서에 사용된 프리미엄 흑장미 인장 잉크에서 고농도의 납(Pb) 성분 검출. - 산화 분석: 해당 납 성분은 산소와 결합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푸른 은광(Silver-blue sheen)으로 부식되는 물리적 특성을 지님. - 현재 산화율: 1.2%. (작성된 지 채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극신천성 위조 공문서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됨. 문서상에 기록된 작성일 ‘5년 전’과 완벽히 불일치.)

장부의 명확한 분석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 내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였다.

벨몬트 자작 특유의 흑장미 인장 잉크 속 납 성분이 시간이 흐를수록 푸른 은광으로 부식되는 이중 위조적 습관. 예전에 자작가의 장부를 몰래 훔쳐보며 파악해 두었던 그 치명적인 결함이, 지금 내 눈앞에서 완벽한 증거로 박제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 가짜 서류로 대공가를 협박해 나를 끌고 가거나 막대한 지원금을 뜯어낼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이 문서가 이틀 전에 급조된 위조품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면, 벨몬트 자작은 사기 및 공문서위조죄로 북부의 법정에서 영원히 파멸할 터였다.

‘아주 좋은 증거를 제 발로 배달해 줬네. 고마워라.’

내 체온이 장부의 정밀 스캔 기능을 사용한 대가로 아주 미세하게 서늘해졌지만, 에르하르트 덕분에 비축해 둔 온기가 워낙 든든해 끄떡없었다.

사내는 내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줄 알고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어떠냐? 자작님께서 서명하신 이 합의서가 있다면, 벨하르트 대공이라 할지라도 너를 지켜줄 명분이 없다. 순순히 내 손을 잡고 이 성을 빠져나가는 게 네 목숨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야. 알겠느냐, 이 멍청한 계집애야?”

그가 나를 향해 사납게 눈부라림을 하며 가스라이팅을 완성하려 들었다.

그러나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스윽.

나는 오히려 어깨를 잡힌 채로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물 한 방울 고이지 않은, 티 없이 맑고 깊은 lavender 빛깔의 두 눈동자가 사내의 일그러진 얼굴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사내의 숨소리 하나까지 다 꿰뚫어 보겠다는 듯이 고요하게 침묵을 유지했다.

“어……?”

사내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잘게 흔들렸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이 타이밍에 자지러지게 울며 살려달라고 빌거나, 제발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매달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내 눈빛은 지나치게 차분했고, 도리어 그의 밑바닥을 조용히 관조하는 듯한 기묘한 압박감을 풍기고 있었다.

침실 안에는 오직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닥, 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평화롭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정적.

숨이 막힐 듯한 이중 침묵이 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사내의 눈을 단 한 순간도 피하지 않은 채,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시간이 흐를수록 사내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장부 위로 표시된 사내의 스트레스 수치가 40%에서 65%, 그리고 80%를 향해 수직으로 상승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자신이 일곱 살짜리 꼬마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을 마주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듯했다.

“너, 너 왜 그렇게 쳐다봐? 내 말이 장난 같은 줄 알아? 당장 소리라도 지르지 못해?!”

사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려던 자가 도리어 상대의 침묵에 잠식되어 스스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아주 가냘프고, 솜사탕처럼 달콤하면서도 오싹할 정도로 명징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저씨.”

“……뭐, 뭐냐?”

“그 종이요.”

내가 사내의 손에 들린 위조 서류를 가리키자, 그가 흠칫하며 종이를 뒤로 숨기려 했다.

“그거, 가짜잖아여.”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건 자작님께서 직접 서명하신 공문서……!”

“어제 만드셨져? 잉크 냄새가 아직도 요렇게 솔솔 나는데여.”

나는 코를 찡긋하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아기 양의 미소였지만, 그 속에 담긴 대사는 사내의 심장을 얼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벨몬트 자작가에서 쓰는 흑장미 잉크는요, 시간이 지나면 파란색 은빛으로 변해여. 근데 아저씨가 들고 있는 건 아주 까맣고 반짝반짝한걸여? 방금 칠한 것처럼요.”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너, 네가 그걸 어떻게……!”

사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벨몬트 자작가의 가장 은밀한 비밀이자, 가문의 회계 장부나 위조문서를 다루는 극소수만이 아는 특성을 이 어린아이가 너무나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사내의 가죽 장갑 낀 손등을 톡톡 쳤다.

“벨하르트 대공님이 이걸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여? 르네 아저씨는 엄청 꼼꼼해서, 이 서류를 보자마자 자작가를 사기죄로 고발할 텐데.”

“이, 이 맹랑한 년이……!”

사내가 수치심과 공포에 휩싸여 주먹을 치켜들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동쪽 탑 전체가 굉음과 함께 크게 들썩였다.

벽난로 위의 석조 장식들이 덜덜 떨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굳게 닫혀 있던 침실 문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마력의 폭풍이 문틈을 찢고 방 안으로 사납게 들이쳤다.

그것은 이성을 잃어버린 맹수의 포효였다.

“꼬맹이!!! 어디 갔어!!! 당장 나와!!! 내 이빨이!!! 끄아아아악!!!”

에르하르트였다. 극심한 성장기 이앓이와 함께 억눌려 있던 폭주의 기운이 터져 나와 온 성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방금 전까지 나를 협박하던 사나운 밀사는 간데없고, 문밖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괴수의 살기에 사시나무 떨듯 떠는 한 마리 벌레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붉은 마력의 열기를 감지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의 인간 보일러가, 드디어 나를 구하러 오고 있었다.

우르릉, 쾅!

결국 튼튼한 참나무 문이 거센 마력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뜯겨 나갔다.

부서진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온 것은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살구빛 마력의 소용돌이였다. 그 화려하고도 위협적인 빛깔 속에서,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하는 에르하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 질투와 고통으로 팽팽하게 곤두선 늑대 귀와 꼬리. 소년의 입술 사이로 날카롭게 자라난 송곳니가 잇몸을 찌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문 특유의 무시무시한 성장기 이앓이가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 폭발한 것이었다.

“끄응……! 아파, 아프다고! 꼬맹이! 너 어디 있어!”

에르하르트가 고통에 겨워 울부짖으며 발을 구르자, 바닥의 고급 카펫이 화르륵 그슬리며 뜨거운 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압도적인 맹수의 위압감에 밀사는 완전히 넋을 잃었다. 사내의 가죽 장갑 낀 손이 사시나무 떨듯 사정없이 떨렸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사내는 눈을 희번덕이며 내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끄, 끌어안고 인질로 삼으면……!”

비열한 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러나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상황에서 인질극이라니, 맹수들의 생태를 전혀 모르는 하수나 할 법한 짓이었다. 폭주하는 수인의 앞에서 약자를 붙잡고 위협하는 것은, 도리어 그들의 야수성을 극도로 자극해 사지 분해를 자초하는 지름길이니까.

‘게다가 난 지금 오빠의 저 뜨끈뜨끈한 체온이 매우 필요하다구.’

장부를 스캔하느라 살짝 가라앉았던 내 체온을 완벽하게 녹여줄 거대한 인간 보일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나는 밀사가 내 목을 제대로 움켜쥐기도 전에, 꼬물거리는 발가락 끝에 힘을 주어 그의 발등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동시에 앙증맞은 앞니로 그의 손목을 콱 깨물었다.

“아악!”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친 찰나, 나는 망설임 없이 에르하르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두 다리로 타다닥 소리가 나게 바닥을 차고 날아가, 불덩이처럼 뜨거운 소년의 품 안으로 쏙 파고들었다.

“오빠아아-!”

“헉……? 꼬맹이?!”

갑작스럽게 품 안으로 날아든 말랑하고 가냘픈 감촉에, 폭주하려던 에르하르트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내 양볼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소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열과도 같은 열기가 차갑게 식어 가던 내 전신을 순식간에 36.5℃의 완벽한 온도로 채워 나갔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나른한 온기가 뼈마디를 녹이는 기분이었다.

[시스템: 벨하르트 가문원과의 신체 접촉 성공!] - 대상: 에르하르트 벨하르트 - 체온 충전율: 100% (정상 체온 완벽 회복!) -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 95% -> 80% (동생의 포옹으로 일시적 안정)

아직 부족했다. 이앓이의 고통을 완전히 가라앉히지 않으면 에르하르트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다. 나는 품속에서 얼른 장부를 조율해 포인트 상점에서 가장 저렴하면서도 효과적인 힐링 도구를 교환했다.

[시스템: 20포인트를 소모하여 ‘달콤시원 밀크 민트 껌’을 소환합니다.]

손바닥 안으로 쏙 들어오는 크림빛의 작은 사탕 같은 껌이 쥐어졌다. 나는 에르하르트의 목덜미를 꼬옥 껴안은 채, 그 신비로운 약을 소년의 입술 틈새로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오빠, 이거 아앙- 해봐여! 엄청 시원하구 말랑말랑해여!”

“읍……? 우웁……?”

얼떨결에 내 손가락 끝에 닿아 껌을 씹은 에르하르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화아아-.

입안 가득 퍼지는 차가운 민트의 향과 잇몸을 부드럽게 마취하는 마력의 기운에, 소년의 찌푸려졌던 미간이 마법처럼 펴졌다. 붉게 솟구치던 살구빛 마력이 차분한 연분홍빛으로 가라앉으며, 쫑긋 서 있던 늑대 귀가 기분 좋은 듯 파닥파닥 움직였다.

“어……? 안 아파. 이빨이 안 가려워……!”

“그치여? 레오니가 오빠 아픈 거 싹 다 고쳐줄 수 있어여!”

내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자, 에르하르트의 얼굴이 이앓이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로 화끈하게 붉어졌다.

그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광경 뒤쪽에서, 르네와 대공가의 철갑 기병들이 마침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철컥, 철컥!

“아가씨를 보호해라! 침입자를 생포하라!”

르네의 서슬 퍼런 명령과 함께 기사들이 단숨에 밀사를 바닥에 메쳐 눌렀다. 밀사는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신음했다.

르네가 흐트러진 안경을 치켜올리며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감히 벨하르트의 성지이자, 공녀 전하의 침실에 침입하다니. 배후가 누구인지 뼈저리게 가르쳐주마.”

그때, 나는 에르하르트의 품에서 쏙 빠져나와 르네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르네 아저씨, 이 아저씨 품에 나쁜 종이가 있어여. 벨몬트 자작님이 나를 억지로 데려가려구 가짜로 만든 서류예여!”

나의 영리한 고발에 르네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기사들이 사내의 품을 뒤져 아까 그 위조된 합의서를 찾아냈다.

르네는 종이를 펼쳐 들더니,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조잡한 위조품을…… 인장의 잉크가 아직 채 마르지도 않았군요. 납 성분의 산화 수치만 대조해 보아도 최근에 급조된 위조서임이 명백합니다. 자작가 놈들이 기어코 선을 넘는군요.”

“마, 말도 안 돼! 그걸 네놈들이 어떻게 한눈에 알아챈단 말이냐!”

바닥에 짓눌린 밀사가 비명을 질렀지만, 르네는 그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볼 뿐이었다. 내 똑똑한 증언 덕분에 벨몬트 자작가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는 사용해 보기도 전에 화려하게 쓰레기통으로 처박히게 되었다.

완벽한 사이다 해결이었다. 사내는 그대로 지하 감옥으로 질질 끌려 나갔고, 에르하르트는 내 껌 덕분에 아픔이 가셨는지 내 손을 꼭 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모든 위기가 해결되고, 이제 따뜻한 양털 침대에서 단잠을 잘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

바닥 깊은 곳에서부터 기분 나쁜 진동이 다시 한번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에르하르트의 마력 폭주가 아니었다. 동쪽 탑의 바닥을 지탱하는 석조 벽면 사이로, 기이할 정도로 뜨겁고 붉은 스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치이이이익-!

[시스템: 경고! 동쪽 탑 지하의 지열 난방 기구 압력 수치가 임계점을 돌파했습니다!] - 현재 지열 압력: 120% (상승 중) - 위험도: 매우 높음 (지열 냉각석 표면에 미세한 크랙 발생!)

새하얀 수증기가 순식간에 복숭아 빛깔 방 안을 가득 메웠고, 방 안의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에르하르트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팽팽하게 긴장으로 굳어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르네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단순한 기계 고장이 아니었다. 누군가 고의로 대공성의 심장부인 지열 밸브를 건드린 것이 틀림없었다. 자욱한 스팀 안개 속에서, 나는 직감했다.

클로이 영애의 진짜 음모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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