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따스한 봄볕 같은 연분홍빛 온기가 온몸을 가득 채우는 느낌은 아주 잠깐이었다.

[ 띠링! ] [ 가문원 ‘에르하르트 벨하르트’와 첫 영구 접촉자 등록에 성공하였습니다! ] [ 대가로 지불된 저체온증이 완화되며, 체온이 정상 범위(36.5℃)로 회복됩니다. ]

망막 위에 떠오른 반짝이는 연두색 알림창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바로 그 찰나였다. 에르하르트의 복슬복슬한 살구색 귀를 만지작거리던 내 손끝에 닿아오던 훈훈한 열기가 무색하게도,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쾅-!

거칠게 문이 열리며 들이닥친 것은 지독한 피비린내, 그리고 그보다 더 살벌하게 날이 선 살기였다.

터벅, 터벅.

대리석 바닥을 짓밟는 무겁고 차가운 가죽 군화 소리가 내 귓가를 짓눌렀다. 젖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은색 제복 코트를 거칠게 휘날리며 들어선 사내. 한쪽 눈에 외안경을 걸친 그의 푸른 눈동자는 마치 한겨울의 빙판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공가의 무자비한 관리자이자 냉혹한 수석 보좌관, 르네였다.

“……지금 여기서 무슨 해괴한 짓을 벌이고 계신 겁니까, 에르하르트 공자님.”

얼음송곳으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목소리가 내 작은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에르하르트가 흠칫 놀라며 나를 안은 팔에 꼬옥 힘을 주었다. 르네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내 조그만 얼굴에 닿았다. 솜사탕처럼 하얗고 가냘픈 꼬마의 뺨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지독한 불신과 경계심이 일렁이고 있었다.

“벨몬트 자작가에서 보낸 첩자일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아이를 이렇듯 품에 안아 기르고 계시다니. 대공 전하께서 아신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일입니다.”

르네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외안경을 차갑게 밀어 올렸다. 그의 등 뒤로 보랏빛 안개 같은 서늘한 기운이 아지랑이치며 피어올랐다.

에르하르트가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시끄러워, 르네! 이 녀석은 첩자 같은 게 아니야! 이렇게 약해빠진 인간 꼬맹이가 어떻게 첩자를 해? 그리고…… 내가 추워 죽어가는 녀석을 특별히 내 자비로운 체온으로 살려준 것뿐이라고!”

“공자님의 그 나이브한 자비가 가문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겁니다.”

르네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틈타기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에르하르트의 품에 안겨 바르르 떠는 시늉을 하면서도, 머릿속의 계산기를 빠르게 두드렸다.

‘이 자식 봐라? 들어오자마자 가스라이팅 시동을 거네. 벨몬트의 첩자 어쩌고 하면서 나를 겁줘서 쫓아내려는 속셈이지? 맹수 수인들이라 다들 뚝딱거리는 줄 알았더니, 이 집사는 머리 깨나 쓰는 냉혈한이잖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나는 살며시 눈을 내리뜨며 내 눈앞에만 보이는 『괴수 교감 장부』를 호출했다.

[ 띠링! ] [ 대상: 르네 (벨하르트 대공가 수석 보좌관) ] [ 현재 정서 상태: 극심한 피로(95%), 영지 겨울 식량 및 물자 부족으로 인한 신경과민(98%), 의심(90%) ] [ 숨겨진 스트레스 요인: 혹한기 마수 사료 및 영지민 보급용 모포 예산 초과로 인한 가계부 파탄 직전. ]

‘어머나.’

장부에 기록된 붉은색 수치들을 보니 웃음이 비죽 나올 뻔했다. 저 차갑고 도도한 얼굴 뒤편에 숨겨진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영지 곳곳에 몰아치는 만년설과 혹한 때문에 물류가 막히고, 마수들과 영지민들을 먹여 살릴 예산이 빵꾸가 나기 일보 직전이라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구나.

르네가 뚜벅뚜벅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가죽 장갑 끝에 묻은 마수의 검붉은 피가 코끝을 찔렀다.

“꼬마 영애. 아니, 벨몬트의 양녀라고 불러야겠군요. 대공가에 입양되었다고 해서 이곳이 따뜻한 인형 놀이터라도 될 줄 알았습니까? 당신이 이곳에 머물며 축내는 빵 한 조각, 따뜻한 물 한 바가지가 지금 우리 영지민들의 목숨줄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군요.”

매서운 압박이었다. 일반적인 일곱 살 아이라면 이 살벌한 살기와 가스라이팅에 겁을 먹고 엉엉 울며 벨몬트로 돌아가겠다고 자지러졌을 터였다.

실제로 내 손을 꽉 쥔 에르하르트의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고이기 시작했다.

“르네! 네가 감히 내 손님한테……!”

에르하르트가 소리를 지르려던 그때, 내가 그의 옷소매를 꼬물꼬물 끌어당겼다.

“……오빠, 괘안아여.”

나는 일부러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에르하르트의 품에서 쏙 빠져나왔다. 그리고 침대 시트 위로 얇은 두 다리를 내리고 서서, 르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내 은빛 눈동자가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맑게 반짝였다.

“르네 아저씨.”

“……말씀하십시오, 벨몬트 영애.”

르네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이 쓸모없는 입양아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등 뒤로 손을 깍지 끼고 꼬물거리며, 아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저씨, 지금 머리가 아야- 한 건, 창고에 있는 맛난 고기랑 따뜻한 이불이 모자라서 그런 거예여?”

르네의 눈썹이 움찔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어린아이의 어리광을 받아줄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만.”

“어리광 아닌데여? 레오니는 다 알고 있어여. 대공성 지하 2창고에 있는 순록 고기포랑, 5창고에 있는 양털 모포가 엉뚱한 데로 가고 있잖아여.”

르네의 차가운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외안경 뒤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벨몬트 자작가에서 학대당하며 생존을 위해 배웠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장부 훔쳐보기’와 ‘수치 연산’이었다. 게다가 내게는 대공성 내부의 모든 물류 흐름을 수치화해 보여주는 『괴수 교감 장부』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업데이트해 주고 있었다.

“그게 무슨…….”

“대공성 지하 지열 난방 기구의 지열석 주변에 미세한 크랙이 가 있는 거, 아저씨는 모르시져?”

나는 르네가 들고 있던 서류 더미 중 삐죽 튀어나온 ‘영지 물자 수송 계획서’를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콕 짚었다.

“난방 기구가 고장 날까 봐 냉각실 온도를 억지로 낮추느라 마수 전용 얼음 사료를 두 배나 더 쓰고 있잖아여. 하지만 사실은여, 5창고에 있는 양털 모포를 지하 파이프 라인에 감싸서 열 손실을 막고, 냉각실의 수냉 밸브 우회로를 15도만 돌려놓으면 마수 사료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어여!”

“……!”

르네의 입술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멈추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솜사탕처럼 달콤하지만, 칼날처럼 정확한 수치들을 쏘아붙였다.

“그리구여! 성 안의 잔여 사료랑 모포를 그렇게 재배치하면, 이번 달 가문의 영지 보급 예산이 무려…… 음, 31.4%나 절감돼여! 아저씨가 매일 밤 새우면서 계산기 두드려도 안 나오던 돈이 요기서 쏙 나오는 건데, 레오니가 빵 한 조각 먹는 게 그렇게 아까워여?”

방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에르하르트는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바보처럼 바라보고 있었고, 냉혹하기 짝이 없던 수석 보좌관 르네는 아예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의 머리 위로 장부의 알림이 요란하게 깜빡였다.

[ 띠링! ] [ 대상 ‘르네’의 의심 수치가 폭락합니다! (90% -> 35%) ] [ 경악 및 감탄 수치가 한계치를 돌파합니다! ]

르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류 뭉치를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숨을 들이켜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의 시선이 내 작은 몸뚱이 전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방금 전의 무시와 경멸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지독한 학구열과 경외감만이 서린 푸른 눈동자였다.

“……그 계산을, 지금 암산으로 하신 겁니까?”

“네에! 레오니는 숫자 계산 놀이 제일 조아해여!”

나는 날개라도 달린 듯 가볍게 발을 구르며 배시시 웃었다. 파스텔톤의 연보랏빛 레이스 커튼 사이로 흘러드는 희미한 겨울 햇살이 내 은발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르네는 머리를 한 대 얻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지열선의 열 손실률과 수냉 밸브의 압력 공식을 대입해 예산을 도출해 내다니. 이건 제국 고등 학술원의 수석 회계사도 사흘은 밤을 새워야 하는 수치인데…….”

그의 손에 들린 깃펜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

‘흐흥, 맹수들의 세상에서는 힘이 전부라지만, 현대의 회계 경영 지식을 가진 나한테는 한 주먹 거리도 안 되지. 예산 30% 절감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보여줬으니, 이제 넌 내 손바닥 안이야.’

르네는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지고, 품에서 양필지와 깃펜을 꺼내 미친 듯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연필 끝이 허공을 가르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양털 모포를 파이프에 감싸 단열 효과를 내고…… 우회 관로의 압력을 조절한다면…… 정말이다. 정확히 30% 이상의 예산이 보존된다. 게다가 마수들의 스트레스 지수도 낮아지겠군.”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나를 ‘당장 내쫓아야 할 벨몬트의 첩자’가 아니라, ‘가문을 구원할 신비로운 보배’로 규정하고 있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레오니 영애.”

르네가 허리를 90도로 꼿꼿하게 숙였다. 그의 차갑고 뻣뻣한 가풍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극진한 예우였다.

“어린아이의 실언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정교하고 위대한 혜안이었습니다. 벨하르트 대공가는 지혜를 가진 자를 굶기지 않으며, 가문에 헌신한 자를 홀대하지 않습니다.”

그가 품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공식 식객으로서의 임시 거처가 아닌, 벨하르트 대공가의 정식 막내 영애를 위한 전용 침실을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동쪽 탑의 가장 따뜻하고 아늑한 방입니다. 그곳은 지하 지열선이 가장 먼저 닿아 하루 종일 봄날처럼 따뜻한 곳이지요.”

“와아! 레오니 따뜻한 방 조아여! 아저씨 최고!”

나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기뻐하는 척했다. 드디어 살을 에어내는 듯한 저체온증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아지트를 확보한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에르하르트가 배가 아픈 듯 콧김을 씽씽 뿜어댔다.

“흥! 르네, 너 태도가 너무 쉽게 바뀌는 거 아냐? 그리고 꼬맹이! 너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는 거야? 나보다 머리가 좋은 것 같잖아! 기분 나빠!”

그의 꼬리가 홱 돌아가며 내 종아리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장부의 호감도 수치는 오히려 쭉쭉 올라가고 있었다. 귀여운 녀석.

“오빠가 벨하르트에서 제일 멋지구 든든하니까, 레오니도 오빠 가문을 위해 머리 쓴 거지여!”

내가 에르하르트의 앞발(손)을 꼬옥 잡으며 배시시 웃자, 그의 귀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하, 참나! 내가 멋진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렇게 말해주니 어쩔 수 없이 봐주지! 가자, 내 동생아! 내가 직접 새로운 방까지 에스코트해 주마!”

에르하르트가 위풍당당하게 앞장섰고, 르네는 정중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우리를 따랐다.

성 복도를 지나 동쪽 탑으로 향하는 길은 아까와는 사뭇 다른 공기가 감돌았다. 시녀들과 하인들이 우리를 보며 수군거렸지만, 르네의 차가운 눈빛 한 번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도착한 동쪽 탑의 침실은 그야말로 천국 같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훈훈한 온기. 방 안은 복숭아 빛깔의 부드러운 실크 벽지와, 구름처럼 푹신해 보이는 하얀 양털 침대로 가득 차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참나무 장작이 은은한 주황빛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우와아…….”

나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벨몬트 자작가에서 곰팡이 핀 지하실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자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드디어 찾았다. 버림받을 걱정 없이, 내 몸을 따뜻하게 녹여줄 완벽한 나만의 울타리를.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영애.”

르네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에르하르트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공자님도 이제 훈련하러 가실 시간입니다.”

“앗! 놔라, 르네! 나 꼬맹이랑 더 놀 거야! 놔!”

버둥거리는 에르하르트를 질질 끌고 르네가 문을 닫고 나갔다.

방 안에는 오직 따뜻한 온기와 나만이 남았다.

나는 길었던 긴장이 풀리며 밀려오는 노곤함에 하품을 작게 했다. 꼬물꼬물 침대 앞으로 걸어가, 구름 같은 양털 이불 속으로 몸을 던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닫혔던 문이 소리 없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문틈 사이로 낯선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스윽.

차가운 손길이 내 어깨를 뒤에서부터 단단히 움켜쥐었다.

“……찾았다, 벨몬트의 도망친 강아지.”

어둠 속에서 푸른빛이 도는 흑장미 인장이 새겨진 가죽 장갑을 낀 사내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공가의 정적이자 사교계의 뱀, 클로이 영애가 보낸 밀사였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