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르릉…… 빠드득.
날카로운 송곳니가 잇새로 비어져 나오며, 귓가를 찢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에르하르트의 전신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꼬마 사자의 커다란 주먹이 부르르 떨리며 꽉 쥐어지는 순간, 내 눈앞의 민트색 장부창이 붉은 경고등을 가차 없이 번쩍였다.
[★ 경보! 경보! ★] * 대상의 감정 상태 급변! * 분석 결과: ‘동생 지킴 충동’ 수치 급상승! (현재 99.9%) * 내부 연산: ‘이 작고 하찮은 생명체가 나를 무서워하다니,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 당장 안아서 내 냄새를 묻히고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다! 하지만 몸이 굳어서 이빨이 빠드득 갈린다!’ * 경고: 대상의 뚝딱거림이 한계치에 도달하여, 위협적인 이빨 드러내기 오해 행동이 강제 발령됩니다!
‘……세상에.’
나는 눈꺼풀을 잘게 떨며 에르하르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황금빛 머리칼 사이로 삐죽 솟아오른 보들보들한 사자 귀가 사정없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당장이라도 나를 한입에 삼켜버릴 것 같은 포식자의 기세였지만, 실상은 과부하가 걸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버린 꼬마 수인일 뿐이었다.
게다가 저 툭 튀어나온 송곳니 주변의 잇몸이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대상: 에르하르트 벨하르트] * 스트레스 상세: 이앓이(새 송곳니가 자라나는 시기)로 인한 잇몸 통증 82%
‘아프니까 예민한 데다, 나를 보고 긴장해서 침을 흘리지 않으려다 보니 저렇게 험악하게 이빨을 깨물고 있는 거구나.’
벨몬트 자작가에서 굴러먹으며 터득한 생존 본능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주판알을 튕겼다.
겁먹고 비명을 지르면 이 뚝딱이 오빠는 상처를 받고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갈 터였다. 그렇게 되면 내 목숨줄인 ‘체온 충전’의 기회도 영영 날아가 버린다.
지금 내 체온은 장부를 소환한 대가로 급격하게 떨어지는 중이었다. 손가락 끝부터 서서히 푸르스름한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살아야 했다. 이 사나운 아기 사자의 뜨끈뜨끈한 품 안으로 기어들어 가야만 살 수 있었다.
“어, 오빠…… 아파요……?”
나는 이불자락을 꼬물꼬물 움켜쥐며, 세상에서 가장 가냘프고 무해한 아기 토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솜사탕처럼 하얗고 여린 뺨 위로 눈물을 한 방울 톡 떨어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 뭐가 아파! 내가 널 때리기라도 했다는 거야?!”
에르하르트가 억울하다는 듯 빽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삑사리를 내며 갈라졌지만, 워낙 타고난 성대가 웅장한 탓에 방 안이 크게 울렸다.
“이빨…… 이빨이 아야 해요…….”
내가 조심스럽게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뻗어 내 입술 쪽을 톡톡 건드렸다.
그 순간, 에르하르트의 황금빛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렸다.
“너, 너…… 그걸 어떻게…….”
“레오니도 예전에 이빨이 새로 날 때 엄청 아팠어요. 욱신욱신하고, 열나고…….”
거짓말이었다. 벨몬트 자작가에서는 이앓이 따위로 엄살을 부렸다간 지하실에 갇혀 굶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서툰 꼬마 사자의 경계심을 허물기 위한 가장 달콤한 미끼가 필요했다.
“그래서 오빠가…… 나를 아프게 하려고 온 게 아니라, 그냥 이빨이 아파서 화가 난 거라고 생각했어요. 맞죠……?”
나를 짓누를 듯 기세등등하게 뻗어 오던 에르하르트의 커다란 손이 허공에 딱 멈춰 섰다.
붉은빛으로 날뛰던 그의 스트레스 수치가 순식간에 78%에서 50%로 뚝 떨어지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확인됐다.
[삐빅! 대상의 심리적 저항선 붕괴 조짐!] * 내부 연산: ‘내 아픔을 알아채 주다니……! 이 약해빠진 인간 꼬맹이는 천사인가? 아니, 바보인가? 내가 그렇게 무섭게 으르렁거렸는데 왜 안 울지? 왜 나를 걱정해 주는 거지?’
“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내가 왜 너 따위한테 걱정을 받아야 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르하르트의 양 볼은 이미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귀 끝까지 붉어진 채 꼬리를 팽팽하게 세운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귀여움을 감상할 여유는 그리 길지 않았다.
스으으으.
뼛속까지 시려오는 혹독한 한기가 심장 부근을 옥죄어 왔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 가고, 내쉬는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 경고! 실시간 체온 저하! ★] * 현재 체온: 영하 3.5도 (한계치 임박) * 경고: 3분 이내에 고열의 수인과 물리적 접촉을 하지 않을 경우, 급성 심정지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흐릿해지며 세상이 보랏빛으로 번져 보였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짱구를 굴리는 대신, 몸을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아…… 추워…….”
일부러 허약한 목소리를 내며 이불을 걷어찼다. 그리고 침대 끝으로 기어가, 다짜고짜 에르하르트의 두껍고 단단한 앞발목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덥석!
“헉?!”
에르하르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뒤로 뺐지만, 나는 이 악물고 그의 팔을 품에 안았다.
와, 진짜 따뜻하다.
마치 한겨울에 뜨겁게 달궈진 벽돌을 품에 안은 것 같았다. 수인 특유의 터무니없이 높은 체열이 내 얼어붙어 가던 손가락 끝을 타고 빠르게 스며들었다. 살 것 같았다.
“이, 이거 안 놓아?! 어디서 감히 맹수의 몸에 손을 대는 거야!”
에르하르트가 펄쩍 뛰며 나를 떼어내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내 손아귀 힘은 생존 본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녀석은 내가 다칠까 봐 억지로 힘을 쓰지도 못하고 있었다.
[대상의 ‘동생 지킴 충동’ 100% 돌파!] * 내부 연산: ‘으아악! 닿았어! 엄청 차갑잖아! 이 꼬맹이, 몸이 왜 이렇게 얼음장 같지? 이대로 두면 죽는 거 아냐?! 안 돼, 내가 온기로 녹여줘야 해! 하지만 먼저 안아주기엔 내 자존심이……!’
머릿속에서 자존심과 본능이 치열하게 싸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찬스를 놓치지 않고, 에르하르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얼굴을 그의 부드러운 털옷에 비비며 한껏 가련하게 웅얼거렸다.
“오빠…… 너무 따뜻해요……. 따뜻한 거, 정말 오랜만이에요…….”
학대받던 시절의 트라우마가 섞인 진짜 감정이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따뜻한 울타리를 갈망하던 내 진심이 찰나의 순간 툭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 진심이 꼬마 사자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했나 보다.
스르륵.
나를 밀쳐내려던 에르하르트의 손에서 힘이 완전히 빠졌다. 오히려 커다란 앞발이 내 작은 등을 엉거주춤하게 감싸 안았다.
“……쳇. 약해빠진 인간 꼬맹이가 쓸데없이 추위는 많이 타가지고.”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달리, 나를 감싸 쥔 그의 팔에는 한 치의 틈도 없이 든든한 온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내 귓가에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딸랑! 체온 동기화 성공!] * 현재 체온: 영상 15도…… 28도…… 36.5도 정상 범주 진입 완료! * 특전 가동: 첫 영구 접촉자 ‘에르하르트 벨하르트’ 등록 성공! * 보상: 괴수 교감 장부의 ‘일시 힐링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성 내부의 정밀 진단 모드가 가동됩니다.
지독했던 한기가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갔다. 온몸의 세포가 따뜻한 봄볕을 맞은 것처럼 노곤 노곤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내 시야 한구석에 떠오른 장부의 시스템 화면 위로, 번개 같은 속도로 붉은색 진단 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레이시어 성 내부 정밀 진단 결과] * 구역: 지하 지열 난방 기구 B-3 구역 * 상태: 가습 난방 통기구 표면에 미세한 크랙(균열) 발견. * 경고: 현재 압력 수치 정상 범위를 이탈하여 서서히 상승 중. 10일 이내에 적절한 압력 배출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성 내부의 특정 냉각실 구역에서 열순환 이상이 발생할 수 있음.
‘어라……?’
스치듯 지나간 정보였지만, 내 매서운 눈빛은 그 크랙 정보를 놓치지 않고 뇌리에 새겨두었다.
성의 난방 기구에 균열이 가고 있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 복잡한 기계 장치보다 내 눈앞의 꼬마 사자가 더 시급했다.
“흐응…….”
내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자, 에르하르트의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그리고 엄청난 반전이 일어났다.
- 살랑, 살랑살랑살랑!
에르하르트의 엉덩이 뒤에 달린 금빛 꼬리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을 탁탁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방 안에 울렸다.
얼굴은 여전히 “귀찮게 굴지 마라”는 듯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의 꼬리는 주인의 거짓말을 전혀 대변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선풍기 날개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에르하르트의 호감도 수치 급상승!] * 현재 호감도: 75 (매우 만족 및 소유욕 발생) * 내부 연산: ‘후후, 역시 이 형님이 없으면 이 약한 인간 생명체는 얼어 죽을 수밖에 없군! 내 품이 그렇게 좋나? 아주 딱 달라붙어 있네. 귀여운 녀석. 평생 내 품에서 안 나줘도 상관없지만…… 큼큼!’
‘어머나, 꼬리 흔들리는 것 좀 봐.’
살인마로 소문난 북부의 사나운 늑대와 사자 가문이라더니, 실상은 이렇게나 단순하고 사랑스러운 대형견들이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에르하르트의 목덜미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동안 벨몬트 자작가에서 받아온 설움과 학대의 상처들이, 이 뜨끈뜨끈한 꼬마 사자의 온기 속에서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나만의 완전하고 안전한 울타리를 찾은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오빠, 고마워요…….”
내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자, 에르하르트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귀를 양옆으로 활짝 눕히며 웅얼거렸다.
“내, 내가 좋아서 안아주는 게 아니라…… 네가 하도 얼음장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내 자비로운 온기를 나누어 주는 것뿐이야! 오해하지 마!”
“웅, 레오니는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조아요…….”
적절한 아양은 경영의 기초다. 내 달콤한 속삭임에 에르하르트의 꼬리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방 안에 귀여운 꼬리 바람이 씽씽 불어올 지경이었다.
이대로 이 귀여운 맹수 오빠를 완벽하게 길들여서, 대공성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에르하르트의 품에서 느껴지던 따스함과는 전혀 다른, 피비린내 나고 살벌한 살기가 문밖에서부터 스며들어 왔다.
터벅. 터벅.
무겁고 차가운 철제 군화 굽이 대리석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내 등 뒤의 소름이 쫙 돋았다.
쿵!
거칠게 문이 열렸다.
문턱을 밟고 선 남자의 키는 비정상적으로 컸으며, 그의 늘씬한 몸을 감싼 검은색 제복 코트 자락에는 채 마르지 않은 붉은 마수의 피가 튀어 있었다.
한쪽 눈에 차가운 외안경(Monocle)을 쓴 사내.
벨하르트 대공가의 수석 보좌관이자, 이 성의 실질적인 모든 살림과 가풍을 통제하는 냉혹한 집사, 르네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방 안의 풍경을 싸늘하게 훑었다. 침대 위에서 엉겨 붙어 있는 나와 에르하르트를 발견한 그의 눈썹이 칼날처럼 비스듬히 치켜 올라갔다.
“……지금 여기서 무슨 해괴한 짓을 벌이고 계신 겁니까, 에르하르트 공자님.”
얼음송곳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의 단숨에 얼려버렸다. 에르하르트가 움찔하며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르네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와, 내 조그만 얼굴에 머물렀다. 그 눈빛은 마치 굴러들어온 해충을 박멸하려는 듯한 지독한 불신과 경계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