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시베리아의 칼바람보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창틀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쌩쌩 울어댔다.

귀를 찌르는 바람 소리에 맞춰 낡은 목조 침대가 삐걱삐걱 비명을 질렀다. 북부 벨하르트 대공가의 가장 높은 탑,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 구석방의 공기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으으…… 추워어…….”

얇은 모포 한 장에 의지한 채 몸을 웅크린 나는 턱을 덜덜 떨었다.

하얗게 얼어붙은 입김이 입술 사이로 흩어질 때마다 생명력도 함께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가냘픈 손가락을 꼭 쥐자, 헐렁한 소맷자락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벨몬트 자작가에서 모진 학대를 당하며 새겨진 지독한 상처들이었다. 시퍼렇게 멍든 보랏빛 자국과 아물지 않아 노랗게 가라앉은 상처들이 앙상한 뼈마디 위에서 얼룩덜룩한 기하학적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전 양부인 벨몬트 자작의 가시 돋친 목소리가 환청처럼 쟁쟁하게 울렸다.

‘너 같은 쓸모없는 고아년은 어디로 가든 결국 버림받을 거다. 북부의 괴물 놈들이 널 따뜻하게 맞아줄 것 같으냐? 뼈째로 씹어 먹히지 않으면 다행이지!’

지독한 가스라이팅이었다. 그 목소리가 귀가 아니라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버림받는다는 것.

그것은 내게 숨이 멎는 것보다 더 무서운 공포였다. 전생에서도, 그리고 이 소설 속 엑스트라 양녀 ‘레오니’에 빙의한 지금도 나는 언제나 내쳐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길 잃은 아기 양에 불과했으니까.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체온 탓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손끝과 발끝의 감각이 마비되며 온몸의 피가 얼음물로 변해가는 감각이 덮쳐왔다. 심장이 쿵쾅쿵쾅 다급하게 경고음을 울렸다. 이대로 가다간 얼어 죽는다. 대공가에 입양되자마자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어 쓸쓸하게 내다 버려질 터였다.

그때였다.

- 띠링!

머릿속을 맑게 깨우는 청량한 종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인과율의 균형이 맞춰졌습니다.] [조건 충족: 극도의 한계 상황 및 생존 의지.] [플레이어 레오니의 고유 능력, ‘괴수 교감 장부’를 각성합니다!]

“……에?”

감기려던 눈이 번쩍 떠졌다.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방을 가득 채운 차가운 어둠을 밀어내며, 은은한 파스텔블루와 솜사탕 같은 핑크빛이 감도는 황금빛 홀로그램 창이 허공에 사르르 내려앉았다.

마치 아기자기한 다이어리나 고급스러운 가계부처럼 생긴 반짝이는 장부였다. 가죽 표지 표면에는 귀여운 아기 동물들의 발자국 모양이 금박으로 콕콕 박혀 있었다.

[★ 괴수 교감 장부 가동 시작 ★] * 보유 포인트: 1,000 P * 활성화 기능: [마수/수인 감정 분석], [정서 치유용 힐링 상점] ※ 주의: 장부의 아이템을 소환하거나 시스템을 조율할 때마다 인과의 대가로 사용자의 체온이 급격히 강하하는 ‘저체온증 제약’이 발동합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고열을 지닌 ‘괴수 가문원’들과의 밀접한 신체 접촉으로 온기를 충전해야 합니다!

장부의 책장이 파르르 넘어가며 정교하게 정돈된 격자무늬 칸들이 나타났다.

그 칸들 위로 아주 정밀하게 연산 된 수치들이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기적에 넋을 잃은 것도 잠시, 내 두뇌는 본능적으로 차갑고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괴수 교감 장부라고? 감정 수치를 실시간으로 보고 힐링 도구를 교환할 수 있는 능력…….’

겉모습은 솜인형처럼 가냘프고 지켜주고 싶게 생긴 대공가의 어린 양녀였지만, 내 본질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떤 계산기든 두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철저한 이성주의자였다.

‘잠깐, 도구를 꺼낼 때마다 체온이 떨어진다고? 지금도 얼어 죽을 것 같은데 여기에서 더 떨어진다면 정말 끝장이야. 하지만…….’

화면 구석에 반짝이는 [초보자 무료 웰컴 패키지] 아이템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 웰컴 패키지: 따끈따끈 미니 핫팩 젤리 (지속 시간: 30분) ★] * 가격: 0 P (최초 1회 무료) * 대가 체온 강하 수치: 0도 (첫 소환 면제 이벤트를 적용합니다!)

“무, 무료……!”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허공의 ‘구매하기’ 버튼을 꾹 눌렀다.

- 스르륵.

허공에서 은은한 복숭아색 빛가루가 흩날리더니, 내 손바닥 위로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젤리 모양의 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손바닥에 닿는 온기가 놀라울 정도로 따스했다. 얼어붙어 가던 손가락 끝부터 시작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달콤한 온기가 찌르르 퍼져나갔다. 살 것 같았다. 얼어 죽기 일보 직전이던 몸에 노란 봄볕 같은 에너지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아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핫팩 젤리를 볼에 가져다 대었다. 볼 위에 발그레한 장밋빛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초라하게 구석방에 처박혀 죽어가던 내게, 이 장부는 신이 내린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가슴 속에서 찌릿한 전율과 함께 짜릿한 해방감이 솟구쳤다.

나를 쓸모없다고 버려두었던 벨몬트 자작가의 인간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내게 이 신비로운 힘이 있다는 걸 안다면 당장 무릎을 꿇고 애원했겠지.

입꼬리가 아주 살짝 위로 호선을 그렸다.

‘이제 살아날 구멍이 생겼어. 아니, 단순한 생존이 아니야. 이 장부만 있다면 이 무시무시한 북부 대공가에서 내 자리를 확실하게 굳힐 수 있어.’

나는 장부의 페이지를 더 넘겨보았다. 이 성을 지배하는 벨하르트 대공가의 가문원들에 대한 정보가 락(Lock)이 걸린 채 리스트에 올라와 있었다.

[대상: 카엘렌 벨하르트 (벨하르트 대공)] - 잠금 [대상: 에르하르트 벨하르트 (소공작)] - 잠금

그들은 제국의 북부를 지배하며 고대 마수들을 도륙해 온 무시무시한 맹수 수인 가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괴수들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장부의 설명 란에 적힌 시스템의 분석은 전혀 달랐다.

[※ 벨하르트 가문원 특이 사항: 극심한 감정 표현 불능 및 뚝딱거림 증후군 보유. 기쁨, 슬픔, 걱정 등 모든 긍정적 감정이 겉으로는 ‘으르렁거림’과 ‘위협적인 행동’으로 왜곡되어 표출됨.]

“……뚝딱이라고?”

황당함에 눈을 깜빡였다.

그 무시무시한 살육귀들이 사실은 속마음과 겉표현이 다르게 나가는 고장 난 대형견들이라는 소리인가?

게다가 수인들은 본래 체열이 일반 인간보다 몇 배는 높다고 했다. 장부를 쓸 때마다 깎여 나갈 내 체온을 채워줄 거대한 ‘인간 보일러’들이 성안에 널려 있는 셈이었다.

‘접촉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 기어코 저들의 품을 내 침대로 만들어 주겠어.’

결의를 다지며 주먹을 꽉 쥔 순간이었다.

- 쿵! 쿵! 쿵!

묵직하고 거친 발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단순한 인간의 발걸음이 아니었다. 바닥의 돌 정석이 미세하게 진동할 정도로 맹렬한 힘이 실린 발소리였다.

“흐윽…….”

나는 반사적으로 모포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아무리 장부를 얻었어도, 진짜 괴수 수인의 물리적인 위협 앞에서는 온몸의 세포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학대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며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발소리는 내 방 문 앞에서 딱 멈추었다.

- 쾅!!!

부서질 듯 거칠게 문이 열렸다.

매서운 복도의 한풍과 함께 들이닥친 것은, 붉은빛이 감도는 흑발을 대충 쓸어 넘긴 소년이었다.

에르하르트 벨하르트.

대공가의 소공작이자,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아기 사자 수인이었다.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몸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압도적인 맹수의 야성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짙은 호박색 눈동자가 어두운 방 안에서 짐승처럼 번뜩였다.

“야.”

굵고 거친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내리눌렀다.

나는 모포 틈새로 숨을 죽인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르하르트의 미간은 사납게 찌푸려져 있었고,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삐죽 흘러나와 있었다. 금방이라도 나를 한입에 물어뜯을 것 같은 험악한 기세였다.

그가 내 침대 앞까지 서벅서벅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가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가 바람을 타고 느껴졌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화로가 걸어오는 것 같았다. 저 뜨거운 몸에 안겨서 체온을 충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약해 빠진 인간 꼬맹이가 왜 이런 구석 구덩이에 처박혀 있는 거야?”

에르하르트가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말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지만, 내 눈앞에 떠 있는 장부창의 수치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삐빅! 돌발 조우 발생!] * 대상: 에르하르트 벨하르트 (아기 사자 수인) * 호감도: 45 (경계 및 호기심) * 스트레스 지수: 78% (이앓이 및 가문 내 소통 부재로 예민함) * 현재 상태: 동생을 찾아왔으나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과열 상태.

‘어라……?’

생각보다 호감도가 낮지 않았다. 게다가 스트레스 원인이 겨우 ‘이앓이’라니.

나는 모포를 천천히 내리며 그를 향해 맑고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였다. 학대받던 시절 단련된,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가련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면서.

“저, 저를…… 벌 주러 오신 건가요……?”

최대한 가냘프게 젖살이 오른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시큰거리는 콧날을 훌쩍이며 가늘게 떨자, 에르하르트의 전신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뭐? 벌? 내가 왜 너 같은 솜털만도 못한 걸……!”

그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타고난 목소리가 워낙 험악한 탓에, 그 외침은 마치 사냥감을 몰아세우는 포효처럼 들렸다.

- 크르릉…… 빠드득.

에르하르트의 입술 틈새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노출되며 기이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깨를 들썩이며 주먹을 울컥 쥔 그의 눈빛이 극도로 흉포하게 일렁였다.

일반적인 아이였다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 눈앞의 장부창은 완전히 붉은빛으로 깜빡이며 폭발적인 연산을 시작했다.

[★ 경보! 경보! ★] * 대상의 감정 상태 급변! * 분석 결과: ‘동생 지킴 충동’ 수치 급상승! (현재 99.9%) * 내부 연산: ‘이 작고 하찮은 생명체가 나를 무서워하다니,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 당장 안아서 내 냄새를 묻히고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다! 하지만 몸이 굳어서 이빨이 빠드득 갈린다!’ * 경고: 대상의 뚝딱거림이 한계치에 도달하여, 위협적인 이빨 드러내기 오해 행동이 강제 발령됩니다!

“……!”

다가오는 에르하르트의 그림자가 침대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그는 나를 짓누를 듯한 기세로 허리를 숙이며,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난 손을 내 얼굴을 향해 느리게 뻗어왔다. 그의 턱관절이 빠드득 소리를 내며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과연 나는 이 뚝딱이는 사나운 아기 사자 수인의 품속으로 기어 들어가, 얼어붙은 내 몸을 녹일 따뜻한 체온을 무사히 쟁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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