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 영애님, 그걸 부숴도 소용없을 텐데요?”
내 손가락 끝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묵직한 열쇠가 짤랑, 맑은 소리를 냈다.
그것은 솜사탕처럼 가볍고 조그만 내 손바닥에 과분할 정도로 커다란 고대 합금 열쇠였다. 수석 보좌관 르네가 아무도 모르게 내게 쥐여주었던 대공성의 절대 기밀. 고대 지열 조절 우회 관로의 보조 비상 키가 차가운 금속성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뭐……? 그게, 네가 그걸 어떻게 가지고 있어?!”
수동 차단기를 내리치려던 클로이의 손이 공중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핏기가 가신 그녀의 얼굴은 마치 하얗게 질린 도자기 인형 같았다.
나는 아빠의 널따랗고 뜨끈뜨끈한 품에 안긴 채,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아빠의 단단한 팔뚝이 내 허리를 소중하게 감싸 안고 있어서 그런지, 지하 사역장의 무시무시한 열기 속에서도 마음이 폭신폭신 안정되었다.
‘바보 클로이.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었을 줄 알았어?’
내 머릿속의 ‘괴수 교감 장부’가 쪼르르 굴러가며 실시간으로 지열 수치를 연산하고 있었다.
[벨하르트 대공성 지하 지열 난방 기구] 현재 압력: 94% (임계점 도달 직전) 지열 냉각석 표면 크랙 발생률: 8.7% (급격히 상승 중!) *경고: 물리 차단기 파괴 시 15초 내에 폭발 연쇄 반응 개시.*
이미 클로이가 몰래 손을 써둔 탓에, 지하 지열 난방 기구의 압력은 위험 수위까지 치솟아 있었다. 냉각실의 취약한 열순환 구조를 노리고 지열 냉각석 표면에 미세한 크랙까지 내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클로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녀가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 대공성을 폭파하려 한들, 이 성의 진짜 설계도와 고대 관로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르네가 건넸던 양가죽 도면의 정교한 금빛 선들이 머릿속에서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르네가 아가씨께 그걸 드렸단 말인가…….”
뒤편에서 대공가의 가신들과 기사들을 통솔하던 집사 르네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신뢰도 수치가 장부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며 99%를 유지하는 것이 보였다. 완벽한 내 편의 든든한 시선이 등을 밀어주는 느낌이었다.
“거짓말하지 마! 그따위 조잡한 쇠붙이 하나로 뭘 바꿀 수 있다는 건데? 이미 이 안의 제어 밸브는 내가 완전히 잠가버렸어! 이제 곧 이 더러운 성과 괴물 놈들은 전부 불지옥에 처박힐 거라고!”
클로이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기어이 무거운 쇠파이프로 수동 차단기를 내리찍으려 했다.
깡-!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차단기의 이음새가 찌그러졌다. 붉은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틈새로 지옥 같은 열기가 사역장을 덮치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고, 에르하르트 오빠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붉은 야수 마력을 뿜어냈다.
“레오니, 내 뒤로 숨어!”
“오빠, 괜찮아. 저건 화만 잔뜩 난 풍선이랑 똑같거든.”
나는 아빠의 품에서 꼬물락거리며 내려와, 바닥에 표시된 고대 문양의 중심부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손에 쥔 고대 비상 키를 바닥의 은밀한 틈새에 꽂아 넣을 시간이었다.
사실 클로이가 저지른 짓은 내 계산 범주 안이었다. 지열 제어 장치 밸브가 강제 폐쇄되어 5초만 지나도 폭발할 위기였지만, 내게는 ‘우회 관로’라는 치트키가 있었다.
철컥-!
묵직한 열쇠가 고대의 톱니바퀴와 맞물려 부드럽게 돌아갔다.
“자, 그럼 압력의 길을 조금 바꿔볼까요?”
내가 열쇠를 끝까지 돌려 젖히는 순간, 장부의 인터페이스가 파란빛을 발하며 경고음을 지웠다.
[고대 지열 조절 우회 관로 작동!] [보조 역분사 우회 압력 밸브 개방 성공.] [압력 흐름 반전율: 100%]
그와 동시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클로이가 부수려던 수동 차단기 쪽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고 흉포한 증기가 순식간에 쏙 들어가며 거짓말처럼 소멸했다. 기구 내부에서 웅웅거리던 폭발적인 진동도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어……? 어째서? 왜 열기가 안 나오는 거야?!”
클로이가 멍한 얼굴로 찌그러진 차단기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열기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내가 설계한 ‘다른 길’로 흘러갔을 뿐이었다.
치이이이이이익-!
“앗, 뜨거워! 이게 뭐야?!”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클로이와 그녀를 돕던 가스라이팅 방조자 무리인 법정 대리인들의 발밑에서 엄청난 기세로 증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 있던 격자무늬 철판 바닥은 대공성 보조 역분사 밸브의 배출구였다.
“꺄아악! 살려줘!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아!”
“아이구, 나 죽네! 숨을 못 쉬겠소!”
축축하고 뜨끈뜨끈한 천연 한증막식 증기가 가차 없이 그들을 덮쳤다. 그 증기는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대공성 지하 깊은 곳의 마력 지열선에서 끌어올린, 청량하면서도 밀도 높은 공명 에너지가 가득 섞인 특수 증기였다.
연한 살구빛과 파스텔톤의 분홍빛이 감도는 몽환적인 스팀이 순식간에 사역장 구석을 꽉 채웠다.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아늑해 보이는 핑크빛 안개였지만, 그 안에 갇힌 클로이 일당에게는 지옥의 사우나나 다름없었다.
“흐아아앙! 화장이…… 내 머리가!”
클로이의 화려하게 부풀려진 드레스가 순식간에 땀과 수증기로 푹 젖어 볼품없이 가라앉았다. 얼굴에 정성스럽게 바른 하얀 분말과 붉은 연지가 땀방울을 타고 흘러내려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함께 음모를 꾸몄던 법정 대리인들도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고급 실크 코트를 허겁지겁 벗어던지며 바닥에 볼품없이 엎어졌다.
“더, 더워……! 제발 이 밸브 좀 잠가다오! 물, 물을 줘!”
그들이 서 있는 구역만 정확하게 조준된 초고온 찜질실이었다.
나는 그 장엄한 광경을 감상하며, 품에서 ‘아이스테라피 마수 전용 이앓이 소형 빗’을 꺼내 가볍게 흔들었다.
“클로이 영애님,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 빗에는 수냉 냉각 변환 특이성 기믹이 들어 있다고요. 마수들의 과열된 잇몸을 치료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성의 넘치는 열기를 흡수해 청량한 마력으로 치환하는 기능도 하죠.”
나는 빗의 작동 매뉴얼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점검하며, 빗등에 새겨진 작은 룬 문자를 톡 눌렀다.
비비빅-!
빗의 빙결 가시에서 은은한 민트색 냉기가 흘러나와 사역장 전체를 감싸 안았다. 폭주하던 지열이 빗의 매커니즘과 완벽하게 공명하며, 대공성 지하의 난폭한 마력들이 순식간에 차분하고 맑은 에너지로 정화되었다.
공기 중에 떠돌던 붉은 열기가 한순간에 흩어지고, 대신 상쾌하고 시원한 숲속의 바람 같은 기운이 사역장을 가득 채웠다.
“우와…… 시원해.”
에르하르트 오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앓이와 지열 폭등으로 욱신거리던 그의 붉은 귀가 편안하게 내려앉았다. 지하 심층에서 으르렁거리던 고대 마수 켈베로스의 기운조차 이 청량한 공명 속에서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완벽한 정화였다.
반면, 핑크빛 증기 감옥에 갇힌 클로이와 정적들은 전력 상실 상태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반항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비참한 몰골이었다.
“레, 레오니…… 네 이년…….”
클로이가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독하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조차 이미 공포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발치로 천천히 다가갔다. 대공가의 막내 영애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으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장 자비롭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클로이 영애님. 아직도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으, 으윽…….”
“벨몬트 자작가가 꾸민 가짜 서류에 동조하신 것도 모자라, 이렇게 대공성의 핵심 기밀인 지열 제어권을 탈취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시다니. 제국 반역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아실 텐데요.”
나는 슬쩍 품에서 또 하나의 증거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이전에 벨몬트 자작이 들이밀었던 위조 양육 합의서와 똑같은 흑장미 인장이 찍힌 밀약서였다.
“자작이 쓰던 특유의 흑장미 인장 잉크에는 납 성분이 아주 많이 들어있답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푸른 은광으로 부식되는 이중 위조적 습관이 있지요. 그런데 영애님이 자작과 결탁해 가져오신 이 밀약서의 인장은 어떤가요?”
나는 밀약서를 클로이의 콧날 앞까지 들이밀었다.
“어머나, 전혀 부식되지 않고 아주 쨍한 검은빛이네요? 최근 몇 시간 전에 급하게 날조되었다는 아주 명확한 증거지요. 제 장부의 과학적인 데이터 분석은 언제나 한 치의 오차도 없거든요.”
“아…… 아아…….”
클로이의 입에서 쓸쓸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가 준비한 모든 음모와 덫이, 고작 여덟 살짜리 꼬마 아가씨의 치밀한 가계부 분석과 완벽한 지열 조절 능력 앞에 추풍낙엽처럼 바스러진 순간이었다.
“이, 이 괴물 같은 년……!”
클로이는 절망 어린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었다.
“르네, 당장 저 범죄자들을 포박하십시오.”
아빠 카엘렌 대공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사역장을 울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더 이상 망설임도, 뚝딱거림도 없었다. 오직 내 딸을 해치려 한 적들에 대한 차가운 분노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예, 대공 전하. 즉시 지하 감옥 최하층으로 압송하겠습니다.”
르네가 냉정한 미소를 지으며 수하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기사들이 들이닥쳐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클로이와 법정 대리인들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이거 놓아라! 나는 후작가의 영애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고 무사할 줄 아느냐!”
클로이가 마지막 발악을 하며 기사들의 손을 뿌리치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이미 권력의 저울추는 완전히 나에게 기울어 있었다. 대공가의 기사들은 그녀의 가냘픈 비명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그녀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상황은 완전히 끝났다.
지열 폭발의 위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마수들의 폭동 역시 내 빗 하나로 완벽하게 진정되었다. 나를 이간질하고 쫓아내려던 정적들은 제 발로 판 함정에 빠져 완벽하게 파멸했다.
“와아아아아―!”
대공성의 하인들과 기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나를 연호했다.
“레오니 영애님이 우리 성을 구하셨다!”
“벨하르트의 보배이신 영애님 만세!”
쏟아지는 찬사와 뜨거운 시선들 속에서,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속을 짓누르던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 따뜻한 온기 속에서 조금씩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나, 드디어 진짜 내 울타리를 지켜낸 걸까?’
“레오니.”
그때, 아빠가 나를 다시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그의 품은 방금 전의 소동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따뜻하고 안락했다.
“잘했다. 내 딸이…… 이 성을 구했구나.”
표현이 서툴러 늘 으르렁거리던 아빠가, 내 뺨을 커다란 손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그의 눈가에 어린 벅찬 감정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을 간지럽혔다.
“웅, 아빠! 내가 아빠랑 오빠랑, 우리 집을 꼭 지키고 싶었어!”
나는 아빠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배시시 웃었다. 에르하르트 오빠도 츤데레처럼 고개를 돌리며 웅얼거렸다.
“쳇, 꼬맹이 주제에 제법 쓸만하네. 다음엔 내가 더 멋지게 해결할 수 있었다고.”
그러면서도 오빠의 꼬리는 기분이 좋은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내 계산대로, 내 장부의 경영대로 가문원들의 호감도는 최고치를 찍었고, 정적들은 완벽하게 축출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따뜻한 대공가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만끽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은 우리가 방심한 바로 그 찰나의 틈을 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싹트고 있었다.
* * *
그 시각, 대공성의 은밀한 서쪽 성문 밖.
아수라장이 된 지하 사역장에서 기사들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땀 범벅이 된 채 은밀하게 도망쳐 나온 그림자가 있었다.
클로이 영애였다.
그녀는 화려하던 드레스 자락을 찢어버린 채, 미친 여자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어두운 골목길을 달렸다. 가문이 파멸하고 제국 반역죄로 체포되기 전에 북부를 탈출해야만 했다.
하아,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성벽 모퉁이의 은밀한 골목 끝에 다다랐을 때였다.
스산한 북부의 만년설 바람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갑자기 사방이 기묘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밤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어두운 골목길 끝에서, 스산한 그림자들이 유령처럼 솟아올랐다.
“누, 누구야……!”
클로이가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검은 가죽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밧줄과 마력 포박구를 손에 쥔 사내들이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벨하르트 대공가의 문양이 아닌, 낯익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비열하게 찢어진 입꼬리를 한 사내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며, 낮게 읊조렸다.
“클로이 영애님, 그렇게 보기 좋게 패배하고 도망치시는 길입니까?”
그것은 벨하르트 대공가에 체포당한 줄 알았던 벨몬트 자작의 최후 비밀 암살 병단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곳에 매복한 채, 마지막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작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단 말인가?”
클로이의 눈에 기괴한 희망과 공포가 동시에 서렸다. 대장을 맡은 사내가 밧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붉은 안개 속에서 음산하게 속삭였다.
“대공가는 지금 축제 분위기겠지요. 하지만 진짜 사냥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 가냘픈 입양아 년을 우리 손으로 직접 찢어발겨 주지.”
그들의 타깃은 여전히, 벨하르트의 유일한 약점이자 보배가 된 나, 레오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