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글지글 끓어오르는 핏빛 증기가 지하 사역장의 낡은 석벽 틈새를 거칠게 찢고 터져 나왔다.
화들짝 놀란 서리 늑대들이 꼬리를 다리 사이로 둥글게 말아 넣으며 깨갱 소리를 질렀다. 방금 전까지 무지개색 빗으로 이앓이를 달래며 가르릉대던 아기 곰 마수들도 붉은 열기에 말려들까 봐 웅성웅성 뒤로 물러섰다.
수석 보좌관 르네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기사들의 손이 일제히 자루를 쥔 채 굳어 들어갔다.
“주군, 압력 제어기가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지하 보조 제어 장치실 내부의 열기가 역류하고 있습니다!”
르네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사역장 입구 쪽의 굳게 닫힌 연청빛 대리석 문이 거칠게 열렸다.
쿵, 쿵, 구두 굽 소리가 요란하게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자욱한 김 서린 안개 사이로 우아하게 깃털 장식을 흔들며 걸어 나오는 인물이 있었다. 라벤더빛 실크 드레스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클로이 영애였다. 그녀의 뒤로는 금빛 테 안경을 쓴,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제국 법정 대리인 삼 인방이 무거운 양가죽 서류 가방을 든 채 보좌하듯 따르고 있었다.
“어머나, 이 끔찍한 꼴 좀 보세요.”
클로이가 실크 손수건으로 코를 살짝 가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문 전설의 수인 마수들이라는 것들이 고작 어린아이의 싸구려 장난감에 홀려 배를 까뒤집고 있다니. 게다가 지열 제어 장치는 폭발 직전이군요. 카엘렌 대공 전하, 그리고 르네 수석 보좌관님. 이 광경을 제국 법회가 그대로 보고만 있을 것 같습니까?”
클로이의 곁에 선 법정 대리인이 가죽 가방에서 붉은 밀랍 봉인이 찍힌 서류를 꺼내 들며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벨하르트 대공가의 지열 오염 및 핵심 동력원 관리 부실, 그리고 검증되지 않은 미성년 입양아에게 영지 회계 및 마수 사육 권한을 부실하게 위임한 죄를 묻겠습니다. 이에 본 법정 대리인단은 임시로 레오니 영애의 대공가 상속녀 신분과 재산 관리 권한을 전면 몰수하고, 벨몬트 자작가와의 합의에 따른 원상 복구 소송을 진행할 것을 청구하는 바입니다.”
사역장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기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지열 폭발 위기 때문에 성 전체가 날아가기 일보 직전인데, 사교계의 뱀이라 불리는 클로이가 제국 법회까지 등에 업고 들이닥쳤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클로이는 턱을 치켜들며 카엘렌 대공의 품에 안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너 같은 길고양이만도 못한 고아 년이 감히 이 침묵의 성에서 안주인 행세를 하려 들어?’ 하는 악의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가스라이팅 섞인 으름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머릿속의 ‘괴수 교감 장부’는 차갑고 명확한 숫자를 띄우며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시스템 경고: 호스트의 체온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습니다. 현재 체온 34.2℃] [원인: ‘아이스테라피 마수 전용 이앓이 소형 빗’의 실시간 다중 가동 및 장부 정밀 연산 과부하.]
‘으우, 추워…….’
뼛속까지 시려 오는 한기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나를 안고 있는 카엘렌 아빠의 단단한 목덜미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뺨을 아빠의 뜨거운 어깨에 부비자, 마치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를 통째로 껴안은 것처럼 화끈한 열기가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
카엘렌 아빠의 몸이 굳어졌다. 아빠의 붉은 눈동자가 지열 폭발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다. 내 귀가에 아빠의 낮은 가릉거림이 진동처럼 울렸다. 기쁠 때 도리어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 아빠만의 서툰 애정 표현이었다. 아빠는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커다란 한 팔로 내 엉덩이를 단단히 받쳐 안고 다른 손으로 내 마른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뜨끈뜨끈한 온기가 충전되자, 뇌 회로가 완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빠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고, 클로이와 제국 법정 대리인들을 향해 아주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아기 양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클로이 영애님, 그리고 똑똑한 서기관 아저씨들. 방금 레오니가 ‘부실 관리’를 해서 이 사단이 났다고 하셨나요?”
“그래, 꼬맹아. 네가 가당치도 않게 가계부를 쥐고 흔들며 마수들을 방치한 결과가 이 폭발 위기다. 벨몬트 자작께서 네 학대 사실을 주장하며 이권을 요구할 때 진작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대공가에서 과욕을 부린 대가이지.”
클로이가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나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 아줌마는 정말 공부를 안 하는구나. 데이터가 눈앞에 빤히 돌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톡 튕겼다.
스스스슥―!
순간, 내 머릿속 ‘괴수 교감 장부’의 정밀 데이터들이 푸르스름한 마력의 빛줄기로 변해 허공에 거대한 스크린처럼 펼쳐졌다. 장부가 연산해 낸 실시간 지열 압력 로그와 외부 주입 물질 잔류 분석표가 아주 투명하고 거대하게 인쇄된 문서의 형태로 투사되었다.
사역장에 있던 르네와 대공가의 행정 간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공중에 뜬 푸른빛 데이터로 쏠렸다.
“이, 이것은……?”
르네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주목해 주세요.”
나는 솜사탕처럼 달콤하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조목조목 짚기 시작했다.
“여기에 적힌 수치들은 대공성 지하 지열 난방 기구의 실시간 압력 수치예요. 이미 보름 전부터 지열 냉각석 표면에는 미세한 크랙이 발생하고 있었죠. 제2화에 장부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이 크랙은 단순한 자연 노화가 아니었어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열순환 구조에 충격을 주기 위해 외부에서 산성 부식 유해 액체를 주입한 흔적이 정확히 감지되었거든요.”
“무슨 터무니없는 소릴! 감히 어디서 마법 환영으로 사기를 치려 드느냐!”
법정 대리인이 당황해 소리쳤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사기인지 아닌지는 이 회계 장부 흔적이 증명해 줄 거예요. 르네 아저씨,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주시겠어요?”
내가 가리킨 화면에는 최근 성을 드나든 상인들의 거래 명세서와 영지 가계부 데이터가 나란히 복사되어 있었다.
“지난주에 열 제어실의 핵심 냉각 부품을 녹여버리는 ‘황산화 마력 추출액’을 대량 구매한 상가가 있어요. 그 상가의 결제 연동 계좌를 추적해 보았더니…… 어라? 정확히 ‘클로이 라파예트’ 영애님의 개인 상가 연동 비자금 계좌와 100% 일치하네요? 여기 계좌 일련번호와 서명까지 아주 똑똑히 찍혀 있는걸요?”
“……!!”
클로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일순간에 싹 가셨다. 그녀의 고운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런 조작된 종이 쪼가리를 믿으라는 거냐! 대공가에서 나를 음해하기 위해 급조한 위조품이 분명하다!”
“위조품이라뇨?”
나는 샐쭉 웃으며 품에서 또 하나의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것은 클로이가 벨몬트 자작과 공모하여 대공가를 압박하기 위해 법정에 제출했던 ‘양육 합의서 및 권리 양도 계약서’ 원본이었다.
“위조품을 논하자면, 클로이 영애님이 가져오신 이 서류야말로 진짜 위조품이죠. 여기 찍힌 벨몬트 자작가의 특유의 흑장미 인장을 좀 보세요.”
나는 아빠의 손을 빌려 서류의 인장 부분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어 올렸다.
“벨몬트 자작가가 사용하는 정품 흑장미 인장 잉크에는 아주 미량의 특수 납 성분이 들어 있어요. 이 납 성분은 신기하게도 공기 중에 노출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푸른 은광으로 부식되는 이중 위조 방지적 습관을 지니고 있죠. 5년 전에 작성되었다는 이 서류가 진짜라면, 지금쯤 인장 주변이 푸른 은빛으로 번쩍여야 정상이에요. 하지만…… 누군가 며칠 전에 급하게 날조했기 때문에, 인장은 여전히 시커먼 흑색 그대로네요? 자, 서기관 아저씨들. 법률 전문가로서 눈이 있다면 직접 확인해 보시죠?”
법정 대리인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서류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돋보기를 꺼내 인장 표면을 샅샅이 살피더니, 이내 사색이 되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이럴 수가…… 정말 부식 반응이 전혀 없잖아? 최근에 날인된 게 확실해!”
“게다가 이 계좌 추적 내역은 제국 중앙은행의 마력 인장과 완벽히 대조되는 공식 잔고 증명서다. 조작할 수 없는 영역이야!”
우렁찬 웅성거림이 사역장을 메웠다.
가장 취약하고 어리다고 생각했던 꼬마 영애가, 영지 내에 돌아다니는 모든 금전 거래 내역과 장비 지표를 빠짐없이 가계부 데이터로 탈탈 털어 고출력의 논리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클로이가 세운 얄팍한 위계와 법적 명분은 단 3분 만에 먼지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가슴을 쫙 펴고, 내 발밑에서 빗을 꼭 쥐고 자고 있는 마수들을 가리켰다.
“제가 부실 관리를 했다고요? 이 마수들이 왜 얌전해졌는지 아세요? 제가 소환한 ‘아이스테라피 마수 전용 이앓이 소형 빗’에는 빙결 가시를 품은 수냉 냉각 변환 특이성 기믹이 들어 있어요. 이 빗을 사용하면 마수들의 과열된 잇몸을 즉각 마취 치료하는 동시에, 대공성의 비정상적인 열기를 마수들의 체내에서 안전하게 배출해 주죠. 덕분에 폭동을 한 큐에 가라앉힐 수 있었던 거고요. 오히려 영지의 소중한 자산을 완벽하게 보존한 공로를 인정받아야 마땅하지 않나요?”
“와아아아아―!”
지켜보던 대공가의 간부들과 기사단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레오니 영애님이 맞다! 저 오만한 사교계 나방년이 우리 성의 지열을 망가뜨리고 죄를 덮어씌우려 한 것이다!”
“감히 대공가의 막내 아기씨를 모함하다니! 당장 저 사기꾼들을 지하 감옥에 처넣어라!”
상황은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클로이의 얼굴은 이제 붉다 못해 보랏빛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비난하는 기사들의 시선과 법정 대리인들의 배신감 어린 눈초리에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가문의 파멸은 물론이고, 제국 반역죄로 단두대행이었다.
“아니야……! 다 거짓말이야! 이 괴물 같은 전염병 고아 년이 마법으로 모두의 눈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
미쳐버린 클로이가 비명을 지르며 사역장 구석으로 내달렸다. 그녀가 향한 곳은 붉은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지하 보조 제어 장치실의 수동 물리 밸브 구역이었다.
“나만 죽을 수 없어……! 너희 벨하르트 놈들도 전부 이 성과 함께 지옥으로 가 버려!”
클로이가 얼굴이 벌게진 채, 보조 냉각 우회 밸브의 수동 차단기를 부수기 위해 미친 듯이 손을 뻗었다. 수동 차단기가 파괴되면 지열 핵의 과부하를 막을 마지막 안전장치가 사라져 성 전체가 폭발하게 된다.
“안 돼! 멈춰라!”
기사들이 급히 몸을 날렸지만, 가로막는 붉은 증기의 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지열 핵의 폭발까지 남은 시간: 00분 15초!]
모두가 절망 어린 비명을 지르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아빠의 품에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내 품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차갑고 묵직한 고대 합금 열쇠를 꺼내 들었다.
얼마 전 수석 보좌관 르네가 아무도 모르게 쥐여주었던, 고대 지열 조절 우회 관로의 보조 비상 키였다.
나는 열쇠를 가볍게 짤랑이며, 절망에 울부짖는 클로이를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클로이 영애님, 그걸 부숴도 소용없을 텐데요?”